6·25 69주년 민족최대 비극 바로알기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2019년 06월 21일(금) 14:35 |
신대재 무공수훈자회 전라남도지부 영암군지회장 |
6·25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사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뒤틀어놓은 국제적인 대환란이었다.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여 동안에 걸친 동족상잔의 비극을 돌아보면서 특히 전쟁 후 태어난 젊은이들이 비극을 잊지 않고, 더 나아가 전쟁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몇 자 적는다.
우리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곧바로 38선이 그어져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1948년에는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체제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에 앞서 김일성은 1950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을 방문했고, 6·25 전쟁 작전계획을 극비리에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로써 6·25 전쟁은 소련군과 북한 지도부의 공동구상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소련은 북한군에 3천여명의 작전 고문관을 배치하여 직접 남침훈련을 시켰으며, 소련 출신 한인들을 중심으로 제105 전차여단을 창설하였고, 해군과 공군의 창설을 지원하였으며, 내무성 산하의 보안대, 경비대 등의 이름으로 막한 군사 예비대까지 확보하였다. 북한의 남침 준비가 완료되자 1950년 6월 초 개전이 임박하여 소련 군사 고문단을 철수시킴으로써 그들의 남침 기도를 은폐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은 6월 25일 새벽 4시 기습 남침을 위해 상투적인 평화공존전술도 구사했다. 남한에 있는 남조선노동당 중책인 김삼용과 이주하를 북한에 거주하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과 교환할 것을 제의해온 것이다.
한편 남한에서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북한이 남침을 위해 38선으로 이동해 집결하는 위급한 상황을 파악해 국민들에게 알리면서 남침 시기를 1950년 4월 또는 5월로 예측하는 등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21일 발령한 경계강화 지시가 너무 오래되었고, 농번기라는 이유로 6월 23일 비상경계 태세를 해제했으며, 토요일인 24일 오전 일과가 끝난 뒤 전 부대에 외출과 외박을 허가하기도 했다. 북한군은 바로 이틈을 이용하여 전 전선에 걸쳐 침공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이에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되는 등 남한은 물론 자유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긴급소집된 유엔 안보리에서는 북한의 행위를 평화파괴행위로 규정하고,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지, 군사력의 38선 이북 철수 등을 결의했다.
동시에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 제24사단 스미스 부대가 최초로 참전을 하게 되고 우방 16개국이 줄지어 참전하게 된 것이다. 또 6월 29일에는 맥아더 장군이 수원에 도착해 전투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군 병사를 만나 “씩씩한 병사”라고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6·25 전쟁은 다시는 이 땅에서 반복되어선 안 될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굳건한 안보와 철통같은 방위태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