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정 사포계 연혁비 오픈식 가진 황용주 공사원

"열무정·사포계에 대해 後代에 널리 알려야한다는 사명감으로 세운 것이 연혁비…

이제 남은 소망은 열무정 향사례 재현하는 일, 문화재 보존전승 더욱 매진할 터”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2019년 07월 26일(금) 14:41
'영암 열무정은 호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사정(射亭)이다. 열무정에 소장된 사포계 문서에 의하면 열무정은 1535년(조선 중종 30년)에 창건됐고, 사포계는 1797년(정조 21년) 5월에 창설됐다. 옛 영암읍성의 동문밖에 射亭이 창건된 시대적 배경은 왜구들의 잦은 침입에 따른 노략질과 연관돼 있었다. 삼포왜란(1510년) 이후 전라도 왜변(1529년) 을묘왜변(1555년) 등 16세기에 전라도를 포함한 남해안 지역은 많은 왜변을 겪었다. 1417년(태종 17년)에 전라병영이 광주 광산현에서 도강현(현 강진군 병영면)으로 옮겨진 것도 이 때문이다. 射亭은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하여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지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남쪽 지방을 방어하는 보장처(保障處)였다. 활을 쏘는 사람들이 무예를 연마하기 위해 조직한 사포계는 지역의 향청(鄕廳)과 향리(鄕吏), 유지(有志)들이 주민들과 함께 射亭을 유지 관리하였다. 사정에서는 육례(六禮) 가운데 하나인 사례(射禮)를 익히었으며,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중시하는 향사(鄕射)도 함께 실행하였다. 그 후 매년 4월에 정기 모임을 개최한다. 射亭은 1858년, 1879년, 1933년, 2012년에 중수되었다. 射亭은 별칭으로 강론과 무술을 익히는 장소라는 의미의 강무지처(講武之處)라 부르기도 했다. 현재 열무정 입지는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62번지’이다. 열무정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단층 한옥으로, 조선 후기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열무정이란 정호(亭號)는 전라병영병사의 요청으로 조정에서 하사하였다. 1872년에 제작된 『郡邑地圖』에 영암읍성과 열무정의 명칭과 위치가 기록되어 전한다. 또한 일제 강점기인 1937년(소화 12년) 6월에 제1회 전선궁술대회(全鮮弓術大會)를 개최한 바 있다. 사장은 2009년 영암읍 동무지구 소도읍 육성사업 편입토지로 보상비를 지급받고, 현 궁도장인 ‘영암군 영암읍 여운재로 21번지’로 이전하여 2014년 3월 14일 현판식을 다시 거행하였다. 열무정에는 사포계 관련 문건이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丁巳年 사포계官節目」, 「丁巳年 사포계完議」를 비롯하여 17개 문서가 1988년 3월 전라남도문화재 제160호(열무정 및 사포계 문서 일괄)로 지정되었다.'
지난 7월 22일 영암공설운동장 옆에 자리한 열무정의 궁도장 한쪽에 세워진 '연혁비'에 새겨진 글이다.
열무정이 단순히 '활 쏘는 곳'이 아니라 국가적인 '보장처'였고, 간행된 책자마다 각각 달리 기록된 열무정의 창건과 사포계의 창설시기를 명확히 해놓았다. 바로 지난 2017년 4월부터 사포계를 이끌고 있는 황용주 공사원이 일궈낸 소중한 성과물이기도 하다.
"사정이 건립된 1535년 조선 중종시대에 영암은 해남 북평, 송지, 옥천, 계곡면과 강진 성전면, 완도군의 도서지역 등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혼란했으며, 북쪽은 야인 오랑캐, 남쪽은 왜구들의 끊임없는 노략질과 약탈로 나라가 불안했습니다. 이에 우리 선조들이 지역을 수호하기 위해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하던 곳이 바로 열무정이었고, 이들이 조직한 모임이 사포계였습니다. 국가적으로 보장처 역할을 했던 사정인 열무정이 베일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 너무도 안타까워 연구를 시작했고, 그 결과를 토대로 열무정과 사포계를 후대에 널리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세운 것이 바로 연혁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 공사원은 이날 중복행사에 앞서 가진 '열무정 사포계 연혁비' 오픈식에 대해 이처럼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연혁비를 세우는 근거자료인 사포계 문서를 영구보존하기 위해 군비 3천만원과 도비 3천만원을 들여 보존처리작업을 진행 중"이라면서, "관련 예산이 크게 부족한 만큼 앞으로 지원금을 더 확보하고 이를 보관할 수장고를 열무정 내에 설치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황 공사원이 열무정과 사포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6년 7월이었다.
"당시 오랜 세월 풍우에 씻겨 색이 바랜 사정에서 궁사들이 활을 쏘고 있었어요. 함께 어울려 활을 잡고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겨보았고, 이런 연유로 열무정을 자주 찾아 활을 배우고 사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활을 쏘는 정자라 하여 사정(射亭)이라고 부르는 열무정이 언제 세워졌는지, 안내판에 적힌 기록만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지요. 사정과 영암읍성에 대해 관련 자료와 책자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 공사원은 이에 2015년 1월 열무정 사두로 일하면서 전라남도문화재 제160호로 지정된 열무정과 사포계 문서를 접하게 됐고, 이를 국역(國譯)한 목포대 김경옥 교수를 만나 자문을 얻어가며 책자들을 샅샅이 살폈다.
"그 결과 구전으로 내려오는 연대나 창건목적 등이 이미 간행된 책자들의 기록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고, 2017년 4월 사포계 공사원으로 일하면서 이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국역작업을 마친 뒤 문서에 담겨있는 내용들이 속속들이 파악됐고, 열무정이 무슨 일을 하던 곳이었고, 언제 세워졌으며, 사포계는 언제 조직되었는지 문서적 근거를 파악하게 된 것이지요."
황 공사원은 "한문과 이두문, 초서체로 기록된 사포계 문서는 해독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국역을 끝냄으로써 구전들로 기록된 각종 책자들의 잘못된 내용을 하나씩 찾아내 수정하고 정정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보람 있는 일이었다"면서, "연구 결과 사정이 창건된 시대적 상황, 사포계의 창립정신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보니 우리 선조들의 애향심과 국가 안위를 걱정하는 투철한 국가관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고, 후세들 역시 선조들이 남긴 유무형의 가치를 결코 부정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어 보고서를 만들고 연혁비까지 건립했다"고 설명했다.
황 공사원은 앞으로 남은 소망에 대해 "열무정에서 행해졌던 향사례(鄕射禮)를 재현하는 일"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연혁비에도 쓰여 있듯이 국가적 보장처였던 열무정에서는 육례 가운데 하나인 사례를 익히고,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중시하는 향사(鄕射)도 함께 거행했습니다. 나중에 매년 4월 정기모임이 열리게 됩니다. 영암군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것입니다."
열무정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향사례의 문화적 가치를 이처럼 높이 평가하는 황 공사원은 "문화유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일 자체가 귀한 선용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가치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표현매체를 통해 널리 드러내고 즐길 거리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유산의 적극적인 활용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우리다운 옛것이야말로 세계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열무정 향사례는 세계적으로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통의 대중화 가능성 측면에서도 열무정 향사례는 돋보이는 유산일 뿐만 아니라, 요즘 뜨고 있는 정통 한류의 맥과도 맞닿아 있고, 전국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향토문화로서도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무정 향사례를 오늘날 실정에 맞게 재현해냄으로써 열무정과 사포계의 가치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가 꼭 만들어지길 기대합니다."
이처럼 소망한 황 공사원은 "앞으로도 지역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전승, 발전시키는데 전력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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