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과 의병장 양달사의 영암성 수성활동 학술세미나 주제발표 요지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19년 09월 27일(금) 10:50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교수는 ‘을묘왜변과 영암’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1555년(명종 10) 발발한 을묘왜변 당시 영암에서의 승보는 왜적을 물리치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그때 경험한 민관합동의 국란극복의 노하우와 그때 입었던 상처의 치유과정은 나중에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적지 않은 자산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의 영암은 한반도의 남해와 서해를 끼고 있어 왜적을 막는 요지로 해양 방어의 요충지였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에 의하면 을묘왜변이 발발해 달량성을 점령한 왜적은 계속해서 강진의 가리포진(현재 완도군 완도읍), 마도진(현재 강진군 대구면 마량리) 등을 습격했고, 강진읍성, 병영성, 장흥읍성 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다른 무리는 진도의 금갑도진(현재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남도포진(현재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을 무너뜨리는 등 진도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또 다른 무리는 서북쪽으로 올라가 해남의 어란포진(현재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을 점령한 후 온갖 방화와 약탈을 일삼으며 해남읍과 영암읍까지 당도했다.
한편 달량성 함락 소식을 들은 영암사람들은 모두 영암읍성 안으로 모여들었고, 왜적에 항복해 목숨을 보전한 영암군수 이덕견은 관찰사에 의해 체포, 구금되어 영암읍성 수성장은 부재중인 상태였다. 이에 임시로 영암읍성 수성장을 맡은 이는 전주부윤 이윤경이었으며, 왜적을 크게 물리쳐 전라도 관찰사에 오른다. 영암읍성의 승전에는 양달사 같은 영암 출신 장수들의 공헌이 지대했다. 이윤경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영암 전투는 처음에 출문을 하고자 시험한 것인데, 조구 김희장 등이 활을 쏘고 칼과 창을 쓰기를 비록 많이 하였으나, 활로 적을 가장 잘 죽인 사람은 조구 김희장 양달사 3인이 최고’라고 했다. 당시 양달사는 ‘모사(募士)’, 즉 선비를 모집해 왜적을 격퇴하는데 관군과 함께했다.
당시 왜적들이 영암향교에 진을 쳤고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향교가 큰 피해를 입었다. 선성 위판이 거의 다 타고 세 위만이 남았다. 제기도 망가뜨려졌다. 이 때문에 영암향교는 을묘왜변 이후 이건된 것 같다고 김교수는 지적했다. 영암향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할 때 당시 군의 남쪽 2리에 있었으나 후대 기록을 보면 읍성 서문 밖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을묘왜변이 전라도 사람들이 조선 건국 이래 가장 충격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장흥출신의 문장가 백광훈이 당시의 아픔을 ‘달량행’이라는 시로 표현하기도 했고, 당시 어떤 사람은 을묘왜변을 주제로 장흥부(長興府)의 원벽(院壁)에 시를 써 붙였는데, 바로 그 시에 양달사가 나온다.
‘…절도사는 중도에서 일부러 머뭇거렸네, / 감사는 어째서 계책을 도모하는데 어두웠으며, /방어사는 어찌하여 사람 죽이기를 즐겁게 여겼는가./ 품계가 올라간 이윤은 진정한 장수이지만, /자급을 뛰어넘은 변협은 바로 간사한 신하이네. /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가고, /의리 없는 유충정이 강진에 부임했네./ 평소 국록을 먹을 때에 모두 거짓을 꾸몄는데,/오늘날 위태함을 당하여 문득 실상이 드러나네….’
김 교수는 “을묘왜변 당시 왜군은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휩쓸었지만, 영암과 해남에서의 패전을 계기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영암읍성 승전은 을묘왜변 극복의 큰 계기였다”면서, “특히 영암읍성 승전은 수령이 없는 상황에서 임시 수성장이 연합관군을 지휘하고, 거기에 영암출신 사족들의 의병에 힘입은 결과였다. 이는 임진왜란 극복 때 조선이 보인 전형적인 국란극복 방안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 을묘왜변과 영암군 선소
영암군은 남해안 해상방어에 중차대한 일익 담당
영암의 해양성(海洋性)에 대한 인식 새로 가져야
정현창 전남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연구원은 ‘을묘왜변과 영암군 선소’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영암은 옛 교통수단인 영산강과 서호의 수로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중앙정부의 관심 대상이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성종 1년(995)에 낭주안남도호부로 승격, 강진, 해남, 영암을 아우르는 커다란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절도사가 파견된 나주, 승주보다 우위를 점하는 등 전남 서남부 행정중심지로 부상했다고 분석했다.
정 연구원은 이 같은 영암군의 위세는 구한말까지 유지되어 현 영암군 외에 해남과 완도 도서지에 많은 월경지를 관할했으며,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불과 반세기도 못 미쳐 16세기 중엽에 을묘왜변을 겪으면서 완도 해역을 중심으로 많은 수군진이 보강 설진됐다고 덧붙였다. 또 이들 중에 영암군 월경지로 관할하던 곳이 달량진, 어란진, 이진진, 갈두진, 삼도진, 삼내진, 소안진 등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정 연구원은 이런 연구결과를 토대로 영암군은 내륙 서남지방의 중심지로 한반도의 끝을 지키고 을묘왜변을 잠재운 훌륭한 의병지였다면서, 뿐만 아니라 고대 상대포(上臺浦)부터 해외로 나가는 항로의 거점이었으며, 서남해안 제주뱃길의 주요 길목을 관리하는 월경지가 있었다고 보았다.
정 연구원은 이에 영암군이 이처럼 광대한 월경지를 관할하는 행정구역에서 남해안의 해상방어에 중차대한 일익을 담당했다는 영암의 해양성(海洋性)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을묘왜변과 의병장 양달사의 영암읍성 수성
영암읍성 수성은 양달사의 적극적인 수성전 덕분
영암읍성 복원 역사자원화 추진해 정체성 살려야
의병장 양달사 장군의 적극적인 수성전과 외곽 전투에서 왜구를 격멸했기 때문이다. 또 왜구
노기욱 (사)호남의병연구소 소장은 ‘을묘왜변과 의병장 양달사의 영암읍성 수성’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을묘왜변 당시 연해변 읍성이 차례로 함락되고 조선의 국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전 해남현감인 양달사는 상제의 ‘시묘살이’ 신분을 벗고 스스로 의병을 모집해 관군을 지원하며 왜구를 격퇴, 영암읍성 수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노 소장은 특히 영암읍성 수성은 호남서남부지역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전략적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며, 왜구의 서울 진공 계획을 좌절시킨 계기가 됐다고도 평가했다.
노 소장은 또 “을묘왜변 당시 양달사는 영암군민들에게 의병이 되길 권하고 그의 형제까지 의병으로 활약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영암군의 의로운 정체성을 효와 충이 동일함을 강조하며 함께 싸우길 독려한 의병장으로 크게 조명 받아야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노 소장에 의하면 의병장 양달사(1518~?) 장군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본관은 제주이며 자는
통원, 호는 남암이고, 그의 아버지는 주부 승조이다. 양달사는 힘이 장사였는데 18세(중종31년 1536)에 무과에 급제하고 25세(중종 39년, 1544)에 중시에 합격했다.
의병장 양달사 장군은 명종 10년(1555)에 해남현감으로 재직하던 중 모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왜구가 70여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 일대, 특히 영암 달량성을 점령했다. 이 을묘왜변으로 어란포, 장흥, 강진, 진도 등을 차례로 침략,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왜구의 침입을 맞아 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사로잡혔다. 특히 영암은 왜구가 영암성을 포위하는 위협에 처했다.
이에 의병장 양달사 장군은 모친상을 당해 거상 중에 있었으나 긴박한 사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분개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임금과 어버이는 일체인데 어찌 예제에 얽매여 국난을 외면하고 있으랴”고 했다. 그가 상복을 입은 채로 군사를 모아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니 영암군민들과 형제들이 앞 다투어 뒤를 따랐다.
의병장 양달사 장군은 적을 현혹시키기 위해 오색 비단옷을 입고 고깔을 쓴 광대를 동원해 적 앞에서 광대놀이를 하도록 했다. 한편으로 용감한 병졸 수백명을 인솔해 역 고개를 넘어 일제히 적을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광대들도 일제히 적을 협공했다. 또 성안의 노인과 젊은이들도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의병장 양달사 장군을 뒤따라 쳐들어가 적을 요격하는 성과를 거
뒀다. 그러나 적은 여전히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었으며 아직 물러가지 않았었다. 양달사는 적을 공격하는 도중 적으로부터 창상을 입어 병사를 일시 거두어 쉬고 있을 때 적이 추격해 왔다. 그는 후퇴하면서 적을 금교로 유인해 진흙탕에 빠뜨려 무찔렀다. 의병장 양달사 장군의 활약으로 영암군민의 사기가 높아지고 관군의 교두보를 마련해 적을 공격해 섬멸했다.
노 소장은 영암군이 을묘왜변 당시 적의 함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의병장 양달사 장군의 적극적인 수성전과 외곽 전투에서 왜구를 격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왜구는 영암전투 패배로 서울로 진격을 포기하고 물러가게 됐다고 보았다.
노 소장에 따르면 의병장 양달사 장군은 을묘왜변이 평정된 후 집으로 돌아와 모친의 상제를 지켰다. 그러던중 적에게 당한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이에 참판 이기경이 전기를 짓고 유선 윤득부가 묘지를 지었으며 목사 임육이 행장을 지었다.
영암군민들은 도포면 봉호리에 양달사의 순국비를 세웠고, 영암읍 장독거리에 공적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선양하고 있다.
노 소장은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의병장 양달사 장군의 정신을 발굴하는 콘텐츠로 양달사의병길 조성과 뮤지컬 연극 및 호국 기념관 조성 등의 사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 소장은 특히 영암읍성의 복원을 통해 영암군민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방안도 앞으로 진행해야 될 과제라고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노 소장은 “영암군이 추진한 의병장 양달사 장군 조명 세미나는 역사문화자원 발굴이 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고, 당면과제로 을묘왜변역사관과 영암읍성 복원 필요성을 제시했다.
노 소장은 “영암읍성은 전남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큰 읍성으로, 조선시대 서남해안지역 마도·회령포·어란포·남도포·금갑도 등을 통솔하는 거대한 진영이었음을 밝히고 영암군의 정체성을 높여야 한다”면서,“성곽 복원을 위해 일제강점기 지적도 원장을 참고해 성의 지목이 잡종지 전답으로 바뀐 지번을 추적, 복원의 기초작업을 이루고, 일차적으로 영암읍성길을 만들어 공론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소장은 또“성길 안내를 위한 간단한 표시물로 거점별 주요 구간을 표시해 스토리 보드판을 설치, 자원소스를 제공해야 한다”면서,“성곽과 함께 문루 동서남북의 복원이 필요하며, 동헌과 내아 등의 관아 복원, 관아 건물 등의 연차적 복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노 소장은 아울러 영암읍성 역사자원화사업은 을묘왜변기념관 건립(300억), 영암읍성 구간별 복원(240억), 영암읍성 4대 문루 복원(160억), 관아 및 부속건물 건립(500억) 등 4개 부분으로 나누어 단계별로 차례로 복원하면 된다고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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