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우재(愚齋) 이원형의 역사탐방 □ 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 영산강유역 마한(馬韓)을 중심으로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2019년 12월 22일(일) 23:03 |
우재 이원형 |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왜곡인 '임나일본부'만 보더라도 4세기의 일본은 고대 국가는 고사하고 변한과 가야에서 철을 수입하여 겨우 초기 철기시대로 들어선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고 운영했다는 주장은 지금의 일본 역사학자들도 거의 인정하지 않고 일부 극우 학자들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사실로 우리 고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왜(倭)에 대해 일본의 당시 문화수준으로는 초기 고대국가의 형성도 어려운 실정이 분명하거늘 그렇게 자주 바다를 건너서 한반도를 침범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이 당시의 왜가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재야학자 일부의 주장은 다분히 설득력을 가진 견해라 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하여 일왕 히로히토는 자신이 신의 후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표했다. 이는 그 동안 금기시 되어온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대한 사료 비판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서술에 있어 도래인의 일본역사에 기친 영향은 그 의미를 축소하는 경향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는 일본 대부분의 역사책이 도래인을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표기한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의 동반자적 한일 관계를 위해서 일본의 좁은 속만 탓할 수는 없다.
왕인이나 아직기 박사처럼 문명의 전도사로 갔던, 한반도의 정세 변화로 삶의 기반을 잃고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 난민이었던,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한 정복자였던,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은 수없이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예로부터 한반도와 일본은 그렇게 가깝게 위치한 이웃이란 운명을 안고 살아왔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위의 논문에서 '양국의 지난 역사는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하지만 동아시아와 중동에서의 이러한 반목은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수많은 아시아 국가 중 한국과 일본은 나름대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양국이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대립과 반목을 계속한다면 동아시아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일본인이 진정 누구이며, 생물학적 문화적으로 밀접한 한국인과 어떻게 갈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는 작업은 양국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 위한 기초라는 그의 지적에 한일 양국인은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상당히 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세계적인 석학인 제3자가 한일 양국의 역사문제를 그나마 객관적으로 진단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이아몬드 교수가 지적한 한일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찾는 것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은 우리 고대사를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이기에 이에 대한 한일 양국 국민의 열린 마음과 양심 있는 역사학자들의 끊임없는 교류가 더욱 요구된다 하겠다. Ⅶ. 맺음말 - 영산강유역 마한사의 새 지평을 바라며 지금까지 한반도 고대사의 최대 미스터리인 영산강 유역의 마한사를 영암시종과 나주 반남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삼한사 연구에 있어서는 대체로 3세기 후반 중국 진(晉)나라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와 5세기에 편찬된 <후한서(後漢書)> 그리고 7세기의 <진서(晉書)>의 동이전(東夷傳)을 기본사료로 삼는다.
삼한 중 진한이 문헌기록에는 제일 먼저 등장하나 삼한(三韓)이란 용어는 3세기 오(吳) 나라의 사승(謝承)이 편찬한 후한서에 제일 먼저 등장한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삼한의 풍속에 납일(臘日, 보통 12월 그믐)이 되면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삼국지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삼한에서 5월과 10월에 농경과 관련하여 제의를 올렸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한의 제사는 향후 삼한의 실체를 밝히는 주요 연구 과제라 하겠다.
삼한은 조선후기 17세기 이후에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마한을 세웠다는 삼한정통론과 실학자들의 실증적 연구를 바탕으로 새롭게 조명 되었다. 현대에는 삼한이 과연 고대국가의 형성에 이르렀는가와, 고고학적인 유물 연구,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보는 시각으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대체로 마한의 영역인 영산강 유역은 4세기 중엽에 백제로 병합되기까지 마한 세력이 온존한 것으로 보는 게 역사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고고학계에서는 마한이 5세기 말까지도 영산강 유역에 대형 옹관고분을 조성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고 보고 있으며 이 글도 그러한 시각에서 쓰여 졌다. 앞서 언급한 시대구분에서 원삼국시대를 대신하여 삼한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주장되고 있으나 만주지역이 우리 역사에서 제외되는 문제점이 있어 그리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오늘 날 영산강 유역의 마한은 토실(土室), 옹관묘, 조족문(鳥足文)의 토기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가 알려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보다 심도 있고 다각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삼한의 연구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삼국시대와 삼한을 단절적이 아닌 연속적 측면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가 삼한에서 잉태되고 그 연속선상에서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발전하였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은 오랜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여 국내 역사학계의 마한사 연구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고 축적된 자료도 부족하여 많은 애로가 있었다.
또한 이 글을 씀에 있어서 필자의 학식과 연구가 일천함은 복할 수 없는 난관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통하여 보완할 것을 약속드리며 이 글이 기존의 연구와 상이한 점은 필자의 사견임을 밝히면서 이에 대한 많은 지도 편달을 바란다.
*사족:필자가 살고 있는 영암에서의 마한 연구는 영암 출신 왕인과의 관계 설정을 어찌 하느냐에 따른 애로가 있다고 하겠다. 마한과 왕인에 대한 올바른 정립 즉 왕인문화축제와 마한 연구는, 같은 시기와 공간에, 백제인 왕인과 마한의 양자가 여하히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설정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그래서 필자는 이미 4년 전 부터 주장했듯이 우리 영암에서는 4세기 이전의 고대 마한에 집중하여, 시종 마한공원을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처럼 벼농사 이른바 도작문화체험관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거듭 제안하는 바이다.
이는 최근 국립종자원 유치에 맞추어 우리 영암을 벼농사와 관련한 콘텐츠 사업을 기획해보는 것은 충분히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는 우리 영암에 설립되는 국립종자원과의 어울려 도작문화의 시너지 효과가 막대하리라 사료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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