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란다 꽃길을 걸으며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0년 08월 28일(금) 14:30
정찬열 시인 군서면 장사리 출신 미국 영암홍보대사
'코로나19', 죽음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쳐도 올 것은 온다. 오고야 만다. 보라보라. 오뉴월 캘리포니아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저 보랏빛 꽃구름을 보라. 저녁이면 15촉짜리 꽃등을 달아 뒤뜰 밝히는 석류나무, 둥글둥글 여물어 가는 무화과 열매를 보라. 계절은 인간 잡사는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히 우리 곁을 찾아오고 또 간다.
오랜만에 길 따라 자카란다 가로수 밑을 걷는다. 평소와 달리 사람들의 왕래가 뜸하다. 저만치 젊은 남녀가 팔짱을 끼고 걸어간다. 사회적 거리두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좋은 때다.
바람이 분다. 자카란다꽃 이파리가 나비처럼 날아오른다. 난분분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종소리가 들린다. 보랏빛 종소리가 푸른 하늘에 물결처럼 여울져간다. 자카란다는 신기하게도 깨꽃을 닮았다. 깨꽃이 떨어지면 고향 산천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라색 꽃잎이 길 위에 수북이 내려앉는다. 저렇게 쌓인 꽃잎을 보면 밭 귀퉁이에 이불 호청을 깔고 참깨를 털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수북수북 쌓여가는 깨를 보며 '하따 오지다잉 징허게 오지다야'. 참말로 오지게 웃던 우리 엄니 웃음소리며, 흩어진 깨알을 쓸어 담으며 '오~매 으째야 쓰꺼나 깨 한 말이면 느그들 한 학기 납부금인디' 하시던 말씀 귓가에 맴돈다. 게으르게 깻단을 날라 오는 나에게 '죽으면 썩을 삭신 애깨서 뭐한다냐'며 혀를 끌끌 차시던 어머니가 보인다. '죽으면 썩을 삭신'이라는 말이 가슴을 후빈다.
길은 산타아나 강둑으로 이어진다. 강물에 백조가 노닌다. 오리 부부가 갓 태어난 새끼 오리 아홉 마리를 몰고 간다. 저놈들은 흐르는 물 어디에 알을 낳아 숨겨두었을까. 어떻게 알을 품어 새끼를 데려왔을까.
강물 위에 꽃 이파리가 흘러간다. 꽃잎이 여행을 떠난다. 가을이면 낙엽들이 저렇게 단체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나무에겐 그것이 아픈 이별이다. 꽃잎이나 낙엽이 황홀한 여정을 꿈꿀 때 나무는 말없이 이별을 준비한다. 이별을 준비한다는 건 눈물을 참는다는 의미다.
천천히 걸어 우리 집 뒤뜰에 들어섰다. 무화과나무에 탱글탱글한 열매들이 촘촘히 매달려있다. 감나무도 가지가 휘어지게 열매가 열렸다. 간당간당한 나무가 저놈들을 제대로 익혀낼까 싶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June drop.' 매년 그리해 왔듯이 올해도 유월이면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탱탱한 열매들을 에누리 없이 솎아내 버릴 것이다. 나무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감당할 만큼만 매달아 두는 일. 능력을 넘어서는 욕심을 버리는 일. 자연은 말없이 인간들을 가르친다.
어느새 달이 떴다. 보름달이다. 어디선가 개구리 울음소리 아스라이 들린다. 별처럼 반짝이는 저 소리. 다시 귀 기울여보니 보름달 살 빠지는 소리다. 아직은 다리심이 짱짱하여, 초승달 살 붙는 소리와 구분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 또한 얼마나 오래 갈까 당신도 나도,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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