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Me Too”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0년 10월 30일(금) 14:12
이진 前) 영암군 신북면장 前) 전라남도 노인복지과장 前) 완도부군수
최근 우리사회에 “Me Too”운동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Me Too”는 영어로 “나도 너와 똑 같다”라는 뜻인데, 요즘에는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약자를 성적으로 희롱하거나 폭행하는 행위를 폭로하는 운동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Me Too”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약자들이 성폭력이나 성희롱을 당해도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감추면서 정신적 고통을 혼자 감내 하며 살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인권의식이 높아지고 용기있는 피해자들의 피해사실 폭로가 이어지면서 미투운동이 크게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6년 10월 문화계 성추문 폭로, 2018년 1월 검찰청 내부 성추문 폭로 등을 계기로 피해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언론, 스포츠 등 여러 분야로 확산되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Me Too 사건'에 대해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이들의 행위가 단순 우발적인 성범죄가 아니라 조직내에서 갑과 을이라는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는 비열한 성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Me Too”사건은 오늘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조선시대에도 벌어져 세상을 떠들썩 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1438년(세종20년) 조선판 'Me Too 사건'이 터졌다. 성균관 유생 '최한경'이 성균관내 공자 사당에서 거행하는 제사를 모시기 위해 개울에서 목욕을 하다가 지나가는 아녀자를 붙잡아 희롱하며 욕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조선시대 국립대학으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수학하는 성균관에서 성범죄 사건이 발생했으니 발칵 뒤집어질 수 밖에 없었다. 성균관이 즉시 자체조사에 착수 하였으나 조사가 지지부진하자 피해 당사자가 사헌부(오늘날 검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하였다.
당초 고소장에는 강간미수를 당했다고 하였으나 사헌부 수사과정에서 피해자가 말을 바꾸어 단지 희롱만 당했다고 진술하여 사헌부는 곤장 80대에 해당한다는 수사결과를 세종에게 보고하였는데 세종은 단지 성희롱만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재수사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사헌부 재수사 결과도 피해 당사자가 성희롱만 당했다고 진술함에 따라 더 이상 죄상을 밝힐 수 없다고 세종에게 보고했다. 결국 세종은 곤장 80대의 처분을 내리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사헌부에서 당시 명문 사대부 집안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어떤 외압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입지가 좁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조선시대 범죄의 형량은 명나라 형법 '대명률'을 따랐는데 성범죄에 해당하는 형량을 보면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에 처했다, 또 조간(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에 처했고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에 처하는 등 매우 엄했다. 특히 강간죄는 모반과 같은 대역죄나 존속살인 등과 맞먹는 중죄로 취급해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했던 대사면령에도 해당되지 않았다고 하니 당시 성범죄를 얼마나 엄하게 다루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공정하였다고는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부녀자 강간죄 처벌을 보더라도 천민의 경우에는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양반의 경우 태형이나 유배형으로 마무리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성범죄를 저질러 곤장 80대에 처해진“최한경”의 그후 삶을 살펴보면 이를 짐작 할 수 있다.
최한경은 성범죄로 처벌 받은 6년 뒤인 1444년(세종26년)에 실시된 식년시에 합격한후 8년만에 도관정랑(정5품)에 올랐지만 1456년(세조2년)에 행호조정랑때 기생 청류월을 첩으로 삼고 스캔들을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3년도 안되어 불사조처럼 다시 복귀해 당상관을 거쳐 마침내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했다.
성균관 유생시절 강간미수 사건의 가해자이고 기생과의 스캔들로 파직을 당한자가 조선시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성균관의 수장이 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지금보다 오히려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가해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떠한 상황이었는가에 따라 처분의 잣대가 오락가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은 비단 조선시대 때의 일만이 아니고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다.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는 건설업자로부터 성접대를 받은 정황이 동영상으로 명확히 들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자기식구 감싸기 수사로 결국은 실체적 진실이 왜곡된채 처벌을 피해 갔고 언론사 사주 개입의혹을 받고 있는 장자연 사건 역시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채 공소시효를 넘기고 말았다. 이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제기된 많은 성범죄 사건이 피해자들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유야무야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행히 공수처가 신설되고 검경수사권 조정이 이루어 지는등 사법개혁의 제도적 틀이 마련되었다. 성범죄 피해자들이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법이 지배하는 사회, 밥 앞에 평등한 사회, 인권이 보호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되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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