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영암왕인문화축제 학술강연회 주제발표 주요 내용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2021년 04월 02일(금) 14:42 |
이날 학술강연회에서는 정재윤 공주대 사학과 교수가 '양직공도의 편찬과 성격', 박중환 국립중앙박물관 특임연구관이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의 대외관계', 임영진 전 전남대 교수가 '양직공도 마한소국의 위치와 의미' 등의 주제 강연을 했다. 학술강연회는 축제 기간 유튜브 '영암왕인TV'에 업로드되고 있다.
학술강연회를 개최한 (사)왕인박사현창협회 전석홍 회장은 “고대 12국 사신의 용모와 13국의 실상을 기록한 중국의 양직공도 속의 마한과 백제를 주제로 삼아 왕인박사 문제를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측면에서 접근해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취지를 설명하면서, “이를 통해 마한과 백제, 더 나아가 왕인박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더욱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이번 학술강연회 주제발표 주요 내용이다.
■ '양직공도의 편찬과 성격'
외국 사신들 잘 묘사 友邦 및 풍속연구에 중요
중국국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양나라(502~557)의 ‘직공도’는 모사품이고 일부분만 남은 것이지만 매우 귀중하다. 이 ‘직공도’는 최초의 두루마리 그림으로서 외국 사신을 잘 묘사해서 우방 관계와 당시의 풍속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진한 이전부터 제후국들이 조공하는 의무가 있었는데 이를 ‘직공’이라고 한다. 한 이후에는 조공의 의무가 사방에 있는 외번으로까지 확대됐다. 조공한 나라의 수는 조공을 받는 왕조의 정통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남북조 시기에는 남북 쌍방이 각자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직공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화가들도 국가의 강성을 선양하기 위해 직공도를 많이 그렸고 이 같은 풍속은 후세까지 계속해서 영향을 끼쳤다.
양원제의 ‘직공도’는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동안 문헌으로만 알려진 것이었다. 원본이 전해오지 않으나 모사본 4종이 확인된다. 각각 사신들의 수나 용모 묘사, 제기 내용 등에서 차이가 있어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다. 이 가운데 백제사신 제기에 방소국들이 유일하게 기재되어 있는 중국국가박물관 소장 양원제 소역의 ‘직공도’가 중요하다.
양원제의 직공도는 ‘번객입조도’라 부르기도 하는데 높이 25㎝, 길이 198㎝이며, 여러 차례 다시 표구된 비단 채색화이지만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만 남은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옆으로 접은 두루마리 그림이며 그 내용은 외국 사신이 양 황제에게 공물을 드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제기를 부가한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북송대 모사본이며 모두 12인이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 순으로 활국, 페르시아, 백제, 구자, 왜국, 랑아수국, 등치국, 주고가국, 가발탄국, 호밀단국, 백제국(白題國), 말국 사신이 그려져 있다. 각 사신 옆에는 그 국가의 이름, 위치, 지리환경, 풍속, 남조 양나라와의 관계, 조공역사 등이 기록된 제기가 있다. 제기의 제목과 머리말, 활국 이전의 부분들은 다 없어졌고 말국 이후 부분도 남아있지 않다. 왜국 제기도 전반부만 남아있고 후반부는 탕창국에 해당하는데 탕창국 사신의 그림은 없어졌다. 다른 그림과 제기도 대부분 흐릿해서 분명하지 않다.
양원제 직공도는 세월이 지나 원본이 사라졌고 북송 시기에 이미 모본만 남았다. 다만 김유약 선생은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된 모본이 원본을 충실하게 따른 것으로 주장한다. 지금 남아 있는 직공도에는 8개의 도장이 찍혀 있다. 순서대로 초림서옥, 건륭어람지보, 석거보급, 삼희당정감보, 의자손, 어서방감장보, 가경어람지보, 선통어람지보이다. 그중에서 ‘초림서옥’은 감상가 양청표가 강희6년에 하북성 정정현에서 창건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직공도는 바로 청대 강희년간에 양청표에게서 가져와 청나라 궁정에 수장되어 건륭제, 가경제, 부의를 거쳤다고 본다.
양원제 소역의 직공도는 한꺼번에 그린 것이 아니라 15년 걸려 완성된 것이다. 화면의 전체 구조와 인물 표현은 성공적이고 예술성이 뛰어나다. 가로로 펼쳐지는 횡권식 그림에 각국 사신은 전부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것처럼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있다. 황제가 열병하러 온 것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소역의 회화는 사실적이고 인물들이 다 좌측 방향을 취하고 단장하고 비율이 정확하며 차림새 특징이 뚜렷하다. 인물의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밀화의 화법으로 인물의 머리 부분 특징과 복식의 차이를 자세히 표현해 형태와 기색이 모두 잘 나타나 있다. 선이 유창하고 색깔이 단아하며 간결하게 각국 사신의 형태와 차이를 묘사한다. 화가의 훌륭한 관찰력과 표현력을 볼 수 있다.
■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의 대외관계’
백제 사신 독점적 대중국 소통능력 고구려와 대등
백제국사조는 백제 우호-적대 외교 스펙트럼 반영
‘양직공도’ 백제국사조는 백제가 대중국 외교의 장에서 고구려와 대등하거나 보다 우월한 강국임을 주장하는 내용이 반영된 기록이다. 때문에 고구려와의 경쟁적 관점이 이 서화 기록 자료의 정치외교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신라까지 포함해 한반도 남부 일대의 정치세력들을 모두 백제의 방소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와 신라가 동반 입조한 상황에서도 백제 사신만이 중국어 구사능력과 독점적인 대중국 의사소통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초 당시 신라는 국내 통치에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의 금석문 자료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직접 대화에서 해당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던 신라 사신은 중국의 관리들과의 대면 상황에서 자기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이 백제국사조 작성의 상황적 배경이 된다.
백제는 ‘일본서기’ 신공기 49년(369)조에 기술된 바와 같이 목라근자 등이 참여하여 신라와 가야 7국에 대한 군사 공격을 했다. 후일 성왕의 회고에 등장하는 바와 같이 백제는 이와 같은 4세기 후반기의 군사 행동의 결과로 가야제국과의 사이에 부자-형제 관계로 표현되는 협약을 맺게 되었다. 방소국 기사에서 신라와 가야제국들이 백제의 방소국이자 부용국이라고 주장했던 백제 사신의 대외관은 이처럼 4세기 후반에 있었던 군사활동과 그 결과 맺은 우월적 외교관계(부자-형제관계)에 대한 역사적 기억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방소국 기사가 나타나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양직공도 기사에 거명된 9개 나라는 기록된 순서로 보아 지역적으로 ‘가야’, ‘신라’, ‘섬진강 이서지역’이라고 하는 3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관점이 있었다. 본고에서는 방소국 9개 나라가 지역적 그룹으로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국호에 반영된 백제 사신의 인식과 감정표현으로부터 백제가 갖고 있는 해당 정치체들에 대한 우호-적대관계의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는 ‘양직공도’ 백제국사조에서 한반도 남부 일대의 9개 나라들을 양측에 소개할 때 일부 나라의 이름들에 멸시나 적대의 감정을 담아 개칭해서 사용했다. 그 감정적 표현의 차이는 다섯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에는 521년 당시 백제가 해당 국가들에 대해서 갖고 있던 우호-적대관계의 외교적 스펙트럼이 반영되어 있다.
첫 번째 A유형은 백제가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정치체들로 인식하고 있던 나라들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당시 통용되었던 일반적인 국호를 그대로 썼다. 다라, 마련, 하침라의 3개 나라가 그러한 경우이다. 두 번째 B유형은 탁, 전라로서 나라 이름을 약칭으로 소개했거나 미자를 피하여 썼으되 악의가 담긴 오자를 선택하지는 않았고 호오와는 무관한 글자인 방위로서 국호를 표기한 경우이다. 세 번째 C유형은 사라이다. 양직공도 백제국사조가 작성되던 시기 이전에 이미 사라는 신라라는 새로운 나라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과거의 국명을 사용했다. 백제가 인정하지 않았던 새로운 국명 ‘신라’에는 ‘새롭다’는 의미의 ‘新’이 포함되어 있고 이는 미칭이라고 볼 수 있다. 옛 국명을 쓴 백제의 이러한 태도는 신라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B,C유형은 상대국가를 존중한 국호 표기라고 보기 어렵고 비하 혹은 폄하한 국호 표기의 범주에 든다. 하지만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상대국가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다. 이들 나라들에 대한 백제의 인식은 냉소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A,B,C 유형에 비하여 다음의 D유형의 나라들에 대해서는 나라 이름의 개칭을 통해 대상국을 조롱하거나 경멸하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지미(止美)와 상사문(상기문)이 그러한 사례이다. 좋은 의미의 글자나 美字를 피하고 惡字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국호를 표기한 것이다. ‘美’를 ‘迷’로 바꾼 것은 ‘무언가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라는 조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上己文을 上巳文으로 표기한 데에는 ‘巳’가 가리키는 글자의 뜻과 같이 ‘뱀처럼 혐오스럽고 끔찍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 나라들에 대한 백제의 인식은 경멸과 조롱과 혐오감을 드러낸 것이다. 다섯 번째 E 유형은 ‘반파’이다. 반파는 대가야를 가리킨다. 대가야는 加羅라고도 불리웠다. 백제는 加羅라는 원래의 이름을 경멸하여 표기한 반파라는 改惡한 국호를 쓰고 있었는데 방소국 기사에서는 이를 다시 한 번 더 改惡하여 ‘반파’라고 표기한 것이다. 대가야 즉 叛波가 백제와 대립적 관계를 갖게 되었던 것은 6세기 초 한반도 남부의 영역확장과정에서 백제와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파는 512년과 514년에 섬진강 유역의 기문과 체사를 둘러싸고 백제와 경합했으며 또 522년에는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고 연계를 도모한 적이 있었다. 조롱 이 섞인 ‘반파’라는 국호 비하는 대가야의 이러한 친 신라 행보를 겨냥한 백제 측의 감정적 대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파’란 ‘절뚝거리며 남의 뒤를 따라가는 절뚝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직공도’ 방소국 기록에서 ‘伴跛’를 ‘叛波’라는 적대적인 국호표기로 또 한번 바꾸어 썼다. 이 시기에 백제가 대가야를 위협적인 적대세력으로 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叛波’란 ‘반란의 물결’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국호의 악의적 개칭 양상에는 백제와 대가야 사이의 상호관계의 변화도 반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지미(止迷)는 ‘신찬성씨록’에 보이는 止美일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지적된 바와 같이 ‘신찬성씨록’ 하내국황별 지미련조에 나오는 백제국 止美邑에 해당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止迷(止美)는 지명 한자의 음 相似로 미루어 ‘진서’ 장화열전에 나오는 신미제국의 ‘新彌’ 그리고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록의 이른바 ‘남만 침미다례’와 같은 정치체일 가능성이 있다. 신미제국의 ‘신미’는 영산강 유역 일대의 마한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오고 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영산강 유역 일대에서 어디인가가 문제이다. 필자는 止迷(止美)와 新彌와 침미다례를 같은 정치체로 보는 관점에서 이 세 지명(국명)이 가리키는 지역은 섬진강 이서의 마한지역 가운데 가장 중심적이고 토착성이 강한 정치세력이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침미다례를 쳐서 무너뜨리자 그 주변 일대의 정치세력들인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이 모두 자연 항복했다고 하는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사의 전체적인 문맥 때문이다. 이 기사는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토착세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을 무너뜨리자 그 주변 군소세력들이 그 형세에 눌려 고개를 숙였다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기보다 규모나 군사력이 약한 세력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놀라 항복하는 정치세력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침미다례는 하나의 정치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은 4개의 정치체였다. 정치체 하나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그 인근 지역의 정치체 4개가 놀라서 항복했다면 그것은 먼저 무너진 하나의 정치체가 나중에 항복한 4개의 정치체를 모두 합한 것 이상으로 대표적인 위상과 힘을 가진 세력이어야 한다. 그러한 대표적인 세력인 침미다례(‘止迷=新彌)는 고고학 자료로 볼 때 영산강 유역 일대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총고분 밀집분포 지역인 나주 반남과 영암 시종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신찬성씨록’ 기사 중에 나오는 ‘취지미읍오녀’는 ‘止美邑의 오씨 집안의 딸과 결혼하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지미읍의 오씨’는 통일신라말 후삼국 분립 시기에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의 견훤세력을 견제했던 나주 호족 오다련의 선조와도 연결되는 혈족관계에 있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은 왕건의 비가 되어 고려 2대 왕 혜종을 낳은 장화왕후 오씨이다. 해주오씨의 도시조로 여겨지는 오첨은 신라 지증왕 때에 중국으로부터 건너왔고 그 둘째 아들 오응(吳膺)이 나주의 토호였던 오다련(吳多憐)의 선대가 된다고 전한다.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국호의 글자를 그대로 쓴 경우이거나 변형된 국호를 썼으되 악의적인 개칭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는 多羅, 麻連, 下枕羅의 3개 나라이다. 국호의 개칭에 백제의 의도적인 감정표현이 개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본고에서의 관점이 타당하다면 이 3개 나라는 방소국 기사에 열거된 9개 나라들 가운데 521년 당시 백제와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나라들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백제의 영역확장 과정에서 이들 세 나라가 비교적 쉽게 포섭되어 갔었거나 백제의 남방경략에 상대적으로 협조적이었던 경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대신라 영토경쟁 과정에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백제와 해당국 간에 대립적인 요인이 적었던 경우도 상정해 볼 수 있다. 下枕羅(耽羅)는 말할 것 없이 육지와 격절된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고 多羅의 경우도 신라, 가야 제국 가운데 상대적으로 신라의 중심으로부터 먼 곳에 위치한 세력이다.
영산강 중류 유역의 나주 반남이나 영암 시종지역에 있었던 止迷와 전남 서북부지역이나 고창, 광주 일대였던 것으로 보이는 麻連이 가야지역의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등과 함께 백제의 방소국에 포함된 것은 ‘양직공도’가 기재되던 521년 전후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영산강 유역이 백제의 지배영역 안에 아직 포함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국사의 과장된 주장을 근거로 한 양직공도에서조차 영산강 유역이 백제의 ‘방소국’이었다고 주장되고 있는 것은 영산강 유역이 369년 백제의 직접 지배영역에 포함되어 들어갔다고 하는 기존의 통설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양직공도’ 방소국기사에서 나라의 이름에 투영시킨 백제의 주변국 인식은 521년의 시점에서 백제의 대신라 전선과 영토확장과정이 어떠한 굴곡을 겪고 있었는지에 대해 시사해 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방소국 기사의 국호 개칭은 치열한 영토전쟁 과정에서 백제 조정이 느끼고 있었던 불안감과 각각의 정치체들에 대한 우호감 혹은 불만, 분노가 포함되어있는 특이한 사료이다.
■ '양직공도 마한소국의 위치와 의미’
양직공도는 521년 백제 남쪽 마한제국 존재 증명
마한·백제사 연구에 있어 역사고고학적 의의 至大
전남지역 고대사회는 백제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1959년 이병도 박사가 주장했던 369년 백제 근초고왕의 전남지역 마한 병합설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불확실한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문헌사학계에서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문제점이 지적되고 새로운 해석이 나온 바 있다.
하지만 실제 연대 문제에 있어 2주갑 내려 보아야 한다는 견해, 3주갑을 내려야 한다는 견해 등이 있고, 내용에 있어 픽션이거나 후대 백제 측의 현실과 기대감이 표출된 것일 뿐이라고 보거나, 양직공도 방소국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천하관이 반영된 것으로서 후대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복속지역에 대해서는 야마토 정권이 임나가라 지역을 직할 영역으로 삼고 신라와 백제를 신속시켰다고 보는 견해에서부터 백제가 마한 잔여 세력과 가야 세력을 복속시켰다는 견해, 마한의 잔여세력에 국한시키되, 구체적으로는 전남지역, 충남·전북지역을 복속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개로왕대에 안성천 이남에서 노령 이북까지 시행되었던 왕·후제가 동성왕대에 전남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견해, 강진·해남지역에 해상교역 루트를 확보하였고 영산강유역에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였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마한 연맹장이었던 백제 근초고왕이 남아있는 마한 세력을 병합하였지만 영산강유역은 신라나 가야 7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회성 강습에 불과하여 통일된 지배망을 구축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최근에는 ‘진서’ 新彌와 ‘양직공도’ 止迷를 같은 것으로서 전남지역으로 보고 신미국이 3세기 후반 국제무대에 등장한 이후 6세기 전반에 백제의 부용으로 나타나는 것은 백제의 마한 복속과 전남지역의 영역화 추세에 부합한다는 견해가 나왔고 중국 서안 대당서시박물관 소장 백제유민 진법자 묘지명이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이 묘지명에는 진법자의 증조 진춘이 백제 성왕 3년(525년) 무렵에 태어나 태학의 장관을 지냈고 조부 진덕지는 마련대군장을 지낸 것으로 기술되어 있어 麻連이 양직공도에 백제 방소국으로 소개되었을 시점에는 아직 백제의 영역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견해도 나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서’ 新彌(新彌諸國)은 ‘일본서기’ 침미다례나 통일신라 침명현과 상통하므로 해남 군곡리 일대에 해당한다고 보면서 마한과 구분되는 별도의 세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백제인·마한인·왜인이 아닌 독자적인 문화를 갖는 토착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이와 상통하는 견해일 것이며, 심지어 왜의 영역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부정확한 문헌 기록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에서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다양한 견해들이 고대사회의 진면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어 있는 기록이 있다면 개별적인 다양한 해석들은 그것을 전제로하여 보다 세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발전적인 일일 것이다.
양직공도는 중국 자료이고 정식 역사서는 아니지만 다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백제 방소국 자료를 통해 521년 당시 백제 남쪽에 마한 제국들이 존재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이병도 박사가 양직공도 백제 방소국을 알았다면 369년 백제 근초고왕 전남지역 병합설을 제기하였을지 의문이다.
문헌기록이 충분하지 않은 고대사회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고고학적 연구가 필요하다. 양직공도 백제 방소국 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감안해 보면 마지막 마한 제국들은 15개국에 해당하며 전북 변산반도 남쪽의 고창지역에서부터 전남 서해안지역, 영산강내해지역, 전남 남해안지역에 분포되어 있다가 530년경 백제에 편입됨으로써 지방행정조직이 22담로에서 37군으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양직공도가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마한·백제사 연구에 있어 양직공도가 가지고 있는 역사고고학적 의의는 지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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