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희생정신 가슴 깊이 새깁니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1년 06월 25일(금) 13:52
6·25란 무엇인가? 1950년에 발발한 6·25 동란은 우리 민족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뒤틀어놓은 국제적인 대환란이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여 동안 동족상잔의 비극을 돌아보면서 특별히 전쟁 후 태어난 젊은이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민족사의 비극이며, 따라서 잘못이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본 식민지 통지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곧 38선이 그어져 북에는 소련군,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였고 1948년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평양의 김일성 공산당 일당은 1950년 6월 남침하기에 이른다.
이에 앞서 1950년 3월 김일성은 6·25전쟁 작전 계획을 민족 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동안 극비리에 작성했다. 소련 고문단과 와실리에프 중장, 뽀스트 니고쁘 소장 등이 주동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6·25전쟁은 소련군과 북의 지도부의 공동 구상이라는 점이 확인된다.
소련은 북한군에 3천여명의 작전 고문관을 배치하여 직접 남침 훈련을 시켰으며 소련 출신 한인들을 중심으로 제105전차여단을 창설하였다. 내무성 산하에 보안대 경비대등의 이름으로 막강한 군사예비대도 확보하였다.
북의 남침준비가 완료되자 소련 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초 개전이 임박하여 북한에서 철수함으로써 남침 계획을 은폐하였다. 6월 25일 새벽 4시 기습 남침에 앞서 북한 김일성 정권은 전쟁 준비를 위장하기위에 상투적 평화공세를 했다. 곧 남한에 있는 남조선 노동당 중책인 김상용과 이주하를 북에 있는 우리 민족의 지도자인 조만식 선생과 교환할 것을 제의해온 것이다.
한편 한국의 신성모 국방장관은 북한군이 남침을 위해 38선에 이동 집결하는 위급한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리면서 남침 시기를 1950년 4월또는 5월로 예측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21일 발령한 경계강화 지시가 너무 오래되었고 농번기여서 6월 23일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하고 24일 토요일이어서 오전 일과를 마친 후 전 부대에 외출 외박을 허가하였다. 이틈을 이용하여 북한군은 6월 25일 새벽 4시 침공을 개시하였다.
북한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은 물론 자유세계가 놀랐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 소집되어 평화 파괴 행위로 규정했다. 이어 북한군의 즉각적인 적대행위의 중지, 군사력의 38선 이북으로 철수 요구안을 9:0으로 가결했다. 동시에 주일 미군 스미스 부대가 최초로 참전하게 되었고 16개국이 우리를 도우러 달려왔다.
특히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국제연합(UN)군이 1950년 9월 인천에 상륙하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조선인민군의 후방을 타격하고 이후의 전세를 일변시켰다. 이것이 6·25의 진상임을 모두가 잊지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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