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질의 추억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1년 07월 02일(금) 13:54
정찬열 군서면 도장리 출신 미국 영암군 홍보대사
캘리포니아 가뭄이 심각하다고 한다. 가뭄,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오래 전, 어머니와 함께 두레로 물을 품어 올리던 일이다.
논농사는 못자리를 만드는 일로 시작되었다. 썩굴 골짜기에 우리 논 다섯 마지기가 있었다. 대부분의 산골짝 논처럼 하늘만 쳐다보는 천수답이었다. 일곱 다랭이 논 맨 위쪽에 논배미들을 먹여 살리는 제법 큰 둠벙이 있었다.
맨 윗 다랭이에 못자리를 마련했다. 겨울 동안 논에 물을 담아 놓았기에 쟁기로 갈아엎고 못자리를 만들어 볍씨를 뿌렸다.
봄 가뭄이 시작되었다. 못자리에 물을 넣어주어야 했다. 매일 어머니와 함께 두레질로 물을 퍼 올렸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새끼줄 두 개를 양손으로 잡아 균형을 맞춰 물을 퍼 올리는 작업이었다. 두레에 담기는 물의 양은 작은 양동이 하나에 담기는 정도. 농사일을 처음 배우는 어머니와 중학을 갓 졸업한 나에게 모를 키우는 데 필요한 물을 품는 것만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모내기철이 왔어도 비가 오지 않았다. 물을 퍼 올려 모를 심어야 했다. 한 마지기 논에 모를 심으려면 얼추 6,7천 두레의 물이 필요했다. 장단을 맞춰가며 두레질을 했다. 몇 두레 인가를 세어가는 의미도 있지만 그렇게 해야 힘이 덜 들었다. "마흔아홉에", "어이", "백에 반 튼", "허이", "쉰하나요", "그라제"….
해가 지면 달이 떴다. 두 모자가 물 품는 모습을 달빛이 비추었다. 열일곱 아들과 서른여섯 어미가 달 빛 아래 허리를 굽혔다가 일어서면서 두 팔을 허공에 뻗치며 춤을 추었다. 달그림자가 한 번 춤을 출 때마다 '철퍼덕' 물 떨어지는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촤르르 촤르르 논바닥에 물 번져가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듣기 좋은 소리는 배고픈 자식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와 마른 논바닥에 물 내려가는 소리라 했다. 목마른 벼들이 꿀떡꿀떡 물 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은 퍼내는 만큼 줄어갔다. 물이 깊어갈수록 힘이 들기 마련이었다. 결국, 밑바닥이 아스라이 보일 정도로 물이 줄었다. 그 깊은 곳까지 두레를 내려 물을 담은 다음, 팽팽하게 균형을 이뤄 젖 먹던 힘을 다해 한 두레 물을 퍼 올렸다. 두레를 따라 둠벙으로 끌려들어 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견뎌내야만 했다. 물 품는 일은 슬픔을 퍼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내 어린 가슴에 소리 없이 흐르는 서러움의 강물을 어머니와 함께 두레로 담아내는 일이었다. 눈물을 닦으며 슬픔을 말리며 서서히 여물어 가는 모양이었다.
쉴 참이면 어머니는 땀을 닦으며 나를 조용히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의 눈 속에는 학교 갈 나이에 농사를 짓는 아들에 대한 '미안하고 짠한' 마음이 녹아 있었다. 어머니의 눈길을 느끼면서도 나는 모른 척 딴청을 피우곤 했다.
반세기 전쯤, 호롱불을 켜고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도 '가뭄' 이라는 말을 들으면 두레로 물을 품던 일이 생각나고, 솨르르 솨르르 마른 논바닥에 물 스며드는 소리가 내 가슴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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