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내동리 쌍무덤 사적 지정을 위한 학술대회 주제발표 주요 내용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
2021년 07월 23일(금) 14:04 |
박 회장은 “아울러 5세기 3/4분기 무렵 금강 유역 이북의 제 수장들이 백제로부터 사여 받은 것과는 다른 유형의 금동관모를 사여 받았다는 사실도 의미있다”면서, “신촌리 9호 을관 금동관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기 때문에 지금까지 영산강 유역 정치체의 통합 중추로 여겨왔던 신촌리 9호분 을관 피장자가 백제로부터 인정받았던 정치적 위상은 실은 영암 시종의 쌍무덤 피장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회장은 이어 “영산강 유역의 통합 구심은 반남을 중심으로 하는 옹관묘 장제를 지속하는 세력으로 여겼고, 이런 판단의 배경에는 신촌리 9호분 을관 피장자가 착장하고 있던 금동관모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면서,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쌍무덤의 피장자는 5세기 중·후엽 영산강 유역 정치체의 핵심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방대형 분구묘를 족묘로 조성하면서 횡혈식 석실묘 축조를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에서 그러한 정치적 위상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박 회장은 “지금까지 드러난 고고자료를 보면 쌍무덤 세력은 영암 일대는 물론이고 전체 영산강 유역 제 세력 가운데서도 그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평가된다”면서, “한성 백제 말기에 정치적으로 백제 중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한편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일본열도와의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정치적 통합 구심력 유지를 부단히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쌍무덤 세력과 같은 지역 기반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세력이 전방후원형 고분인 자라봉고분을 축조하게 된 것은 그런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고고 자료”라고 주장했다.
시종면 일대, 지리·지정학적 위치 속 '關門社會'기능수행
나주 반남고분군 축조 세력과 동등 또는 능가 세력 암시
■ 영암 일대 방대형분의 축조 배경과 대외교류(내동리 쌍무덤을 중심으로) = 전남문화재연구소 이범기 조사단장은 ‘영암 일대 방대형분의 축조 배경과 대외교류 - 내동리 쌍무덤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영암 내동리 쌍무덤은 영산강 유역에서도 대형분에 속하며, 영암을 대표하는 방대형 고분으로, 지리적으로 영산강의 본류가 합류해 서해 바다로 연결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면서, “특히 내동리 쌍무덤이 위치하는 시종 일대는 영암지역 마한 세력을 대표하는 고총고분이 밀집한 곳으로, 대형의 방대형고분의 밀도가 높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 매장시설과 출토유물로 볼 때 5세기 2/4분기에서 6세기 1/4분기에 해당되며, 내동리 쌍무덤 피장자들은 다각도로 연결되는 국제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마한의 최고 수장층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한 이 조사단장은 “따라서 영암 시종면 일대는 지리적 지정학적 위치 속에서 관문사회(關門社會)의 기능을 했다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조사단장은 “영산강에 존재했던 마한 세력들은 당시 백제가 이 지역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마한 소국의 권위와 전통을 계승한 수장층들의 주체적이면서도 강력한 위상을 확인시켜주고 있다”면서, “중국 청자 잔과 금동관 등이 출토된 상징적인 의미는 5세기 후반 이후에 마한의 중심세력이 영암에서 나주 반남으로 이동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으나, 내동리 쌍무덤의 조사로 나주 반남고분군 축조 세력과 동등한 세력을 유지했거나, 보다 능가했던 세력이 공존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이 조사단장은 이에 “현재 내동리 쌍무덤은 사적지 지정을 위한 연차적인 학술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앞으로 3차 발굴조사에서는 분구의 축조 및 주구 등에 대한 조사를 중심으로 추진할 계획으로, 이에 따라 3차 조사가 마무리되면 내동리 쌍무덤에 대한 종합적인 결과가 도출될 것으로 판단된다”고 기대했다.
내동리 세력, 재지 성향 강하고 차별화된 지역 세력일 것
■ 영암 내동리 쌍무덤 출토 토기의 시기와 성격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서현주 교수는 ‘ 영암 내동리 쌍무덤 출토 토기의 시기와 성격’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내동리 쌍무덤 1호분의 유구 중복관계와 위치, 토기의 기종 구성과 형식 등을 고려한 1호분 출토 토기의 단계별 양상은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면서, “내동리 쌍무덤 1호분에서 하층의 1호 석실묘와 함께 고분이 초축되는 1단계는 5세기 후엽으로 추정되며, 상층에 해당하는 1호와 2호 석곽묘, 2호 석실묘 등은 2단계로 대체로 6세기 전후부터 전엽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또 “마지막으로 1호 석실묘 입구쪽에 조영된 1호 옹관묘와 3호 옹관묘 등의 3단계는 6세기 중엽의 이른 시기까지 내려갈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러한 1호분의 단계별 토기나 무덤 양상은 고분 조영 세력의 부상과 발전, 쇠퇴 양상과 함께 1,2단계를 중심으로 내동리 세력, 나아가 시종 세력의 반남 세력에 버금가는 위상과 재지 성향이 강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특히 “내동리 쌍무덤 1호분의 초축 이후 1, 2단계 매장시설로 대표되는 내동리 세력은 옥야리나 태간리 지역보다 재지계 요소도 강하고 백제계 요소도 늘어난 점이 주목된다”면서, “이 시기에 나주 복암리나 반남, 해남 등 영산강 유역의 다른 지역 세력들과 교류도 활발하다”고 설명했다. 또 “내동리 세력은 나주 반남고분군과도 통하는 점이 많아 재지성향이 강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석곽묘나 석실묘, 형상분주토기 등에서 나타나는 차이로 보아 차별화된 지역 세력의 상정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바닷길∼영산강 잇는 포구 활용 대표적 집단 성장했을 것
■ 영산강유역 마한사회에서 내동리 쌍무덤의 의의 = 전북대 김낙중 교수는 ‘영산강유역 마한사회에서 내동리 쌍무덤의 의의’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내동리 쌍무덤은 영산강 유역 고대의 사회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고분의 특징에 잘 부합하며, 그 중에서도 영산강 하구에서 처음 고총이 등장한 후 영산강 유역 전역에서 고총군이 활발하게 조영되는 시기 사이, 즉 5세기 중·후엽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때 고총이 축조되며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집단으로 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어 “집단의 성장 배경은 바닷길과 영산강을 이어주는 하구의 포구일 것”이라면서, “이런 배경으로 왜, 가야, 백제의 영향이 미친 흔적이 복합적으로 남아 있고, 나주 반남고분군이 활발하게 조성되던 단계에도 영암 시종 일대 지역 집단의 위상은 여전히 건재했을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환황해권 해상교역 주도권…중국과 일본도 무시 어려웠을 것
쌍무덤 피장자는 외부와 오랜 교역 통해 네트워크 확립 추정
■ 영암 내동리 쌍무덤 출토 유리구슬 성분분석(5∼6세기 영산강 고총고분 집단의 해상교역 네트워크 추정) = 전남대 허진아 교수는 ‘영암 내동리 쌍무덤 출토 유리구슬 성분분석-5∼6세기 영산강 고총고분 집단의 해상교역 네트워크 추정’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유리구슬의 유통은 동아시아 해상교역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상교역이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광역교류망 즉 네트워크 형성에 주요 매개로서 작용했다면, 이 네트워크의 일원이자 환황해권 해상교역 주도권을 확보한 내동리 집단의 당시 영향력은 백제나 가야를 비롯해 바다 건너 중국과 일본에서도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을 것이다”면서, “바다와 강을 아우르는 고난도의 항해술과 선박, 포구, 도로 등 기반시설을 포함해 오랜 시간 국제교역을 통해 쌓아 온 인적네트워크까지 당시 동아시아에서 영산강 해상교역 집단이 가졌을 사회경제적 위상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밝혔다.
허 교수는 이어 “주지하듯이, 4세기 후반부터 백제의 대외교류 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해상교역이 더욱 확대되어가는 방향으로 변화해간다”면서, “5세기대 영산강 중하류를 중심으로 방대형, 원대형, 전방후원분 등 다양한 고총고분이 출현하는 배경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마운드(mound)를 축조하기 위해 요구되는 대규모 노동력 동원, 사회비용 및 구조화된 시스템은 ‘분구’라는 형태의 영산강 고총고분이 정치권력의 지도와 통제 아래 세워진 기념비적 건축물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여기에 묻힌 피장자는 그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을 것이다. 특히 그 영향력의 주요 원동력은 아마도 외부사회와의 오랜 교역을 통해 확립된 네트워크, 즉 다양한 지역 및 집단과의 교역 파트너십이 아닐까 추측한다”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또 “영암 내동리 일대에 5∼6세기대 방대형 분구묘를 비롯해 마한의 전통적 묘제인 옹관이 더욱 성행하는 현상은 이 지역의 공동체가 백제와의 관계 속에서도 해상교역으로 대표되는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반면에 “내동리 집단과 백제 중앙과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구슬 같은 고가의 해상교역품이 국내에 유입된 후 어떻게 재분배되는지 소비 맥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무령왕릉에서 가장 다양하고 많은 구슬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슬의 국내 유통 및 소비가 중앙의 통제 아래 이뤄진 것인지, 아니면 내동리 같은 개별 집단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인지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옥야리 고분군, '고대문화 교차로', '공존과 융합의 땅' 상징
■ 영암지역 옥야리 고분군의 성과와 활용방안 = 고대문화재연구원 김승근 위원은 ‘영암지역 옥야리 고분군의 성과와 활용방안’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시종면 일대의 고분(군)들은 전남지역 고분의 주요한 특성을 대표하며, 백제로의 편입설에 대한 근거를 약화시키는 주요한 자료 중 하나”라면서, “마한의 독자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으로 5세기 중·후반 이후가 되면 반남 일대의 확장성이 커지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내동리 쌍무덤이나 옥야리 고분군의 발굴조사 성과를 통해 시종면 일대 고분 축조세력들의 지속성과 확장성이 밝혀졌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은 이어 “옹관에서 점차로 석실묘나 석곽묘로 전환되어 가는 양상에서 여전히 옹관이 주요한 위치를 점하면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갔음을 보여준다”면서, “이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마한 사회의 가치체계에 변화가 문화적 소산인 무덤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되며, ‘시대정신’을 반영해주고 있다. 시종면 일대의 고분(군)들이 남긴 유형적 요소와 무형적 요소들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재해석하고, 역사적 과정에서 결합한 당대의 시대정신인 ‘공존과 융합’을 현대적 가치로 정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은 특히 “마한의 경우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그 역사성을 고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진정성이 부여될 수 있도록 고고학적 조사 및 연구를 통해 창의성과 독창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며 마케팅과 홍보를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면서, “마한역사공원에서 시작해 내동리 쌍무덤으로 이어지는 ‘고분길’ 혹은 ‘고대길’을 만든다면 타 지역민도 트래킹 혹은 하이킹을 목적으로 관광하러 올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김 위원은 이어 “고분은 고대사회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로, 고분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으며, 지속적인 고고학적 조사와 성과를 통해 마한 주체세력이 군집했을 것으로 보이는 영암의 경우 ‘고대 문화의 교차로’ 혹은 ‘공존과 융합의 땅’ 등을 주요한 컨셉트로 제시할 수 있다”면서, “고분을 적절하게 보존 및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초조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 실험적인 개발을 위한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 고분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와 학술회의 등 계속된 연구가 필요하다. 또 지역민에게 고분군의 중요성을 알려 보존 및 활용 활동에 함께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