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군향토사' 발간을 기대하면서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2021년 10월 15일(금) 13:53 |
이영현 소설가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
하지만 서글프게도 지금까지 내게 문의해 온 기관이나 군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958년 조극환 선생이 쓸쓸히 원고를 안고 고향을 등진 이유를 다시한번 곱씹어볼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없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하였듯이 향토사가 없다면 우리 영암의 미래도 없다. 우리가 오늘날 밖에 나가서 영암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영암인임을 내세울 수 있는 것도 선현들이 기록한 향토사가 있기 때문이다.
영암(靈巖)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기록된 문서는 1145년에 발간된 '삼국사기지리지'다. 그곳에 '靈巖郡本百濟月奈郡(영암군은 본래 백제 월나군이다)'이라고 기록돼 있고,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를 거치면서 한반도 남쪽에 영암이 있다는 것이 전국에 알려졌다.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더욱 자세히 영암이 기록되었고, 여기에는 영암의 지명이 구정봉 아래 동석(動石)에서 비롯되었다는 글귀도 나온다. 50여 년 후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도 등을 추가한 '여지도서'가 발간되었고,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의 기록도 이곳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다 1793년에 '호남읍지'가 발간되는데, 몇몇 대학에서 복사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이 읍지에는 영암군의 실상이 잘 드러나 있다. 1871년에는 열강의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종의 지시로 '전라도읍지'가 편찬되었고, 우리 영암군에서 제작하여 보고한 1872년 지도는 지금 보아도 걸작이다. 1897년에는 행정 개혁을 담은 '전라남도 영암군읍지 여지도책'이 간행되었고, 영암문화원에서 2009년에 번역한 '영암읍지'는 이 책을 저본(底本)으로 했다. 1930년에는 일제가 '영암군지지(靈巖郡地誌)'를 발간하였고, 1953년에는 박종환 군수가 조극환 전 군수를 위원장으로 위촉하고 '영암군향토사' 발간 작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영암 출신의 박종환 군수가 떠난 뒤 군에서는 조극환 선생이 일제 때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영암군향토사' 편집위원회와 거리를 두었고, 편집위원들마저 흩어지면서 크게 낙심한 조극환 선생은 원고를 갖고 고향을 떠났다. 마음이 다급해진 영암군에서는 1962년 '영암군지'를 급히 발간했고, 1972년에는 '영암군향토지'를, 그리고 1998년에는 지방자치의 열풍 속에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자하여 1,500페이지가 넘는 '영암군지'를 펴냈다. 이상이 이 세상에 영암을 알리고, 우리가 영암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싶어 몸부림쳐 온 영암군 관찬(官撰) 지리지의 간추린 역사다.
그러나 우리 영암의 지리지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것은 '영암군향토사' 원고가 지금까지도 버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1962년 '영암군지'와 1972년 '영암군향토지', 1998년 '영암군지'에는 '영암군향토사'가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1930년에 일제가 만든 '영암군지지'조차 파악하지 못해 해방 후 발간된 영암군 역사서(군지, 향토지, 각종 기관지, 문집 등)들 안에는 우리 영암의 최대 격동기라고 할 수 있는 일제 강점기와 50년대의 기록이 거의 없거나 부실하게 기록돼 있고, 사망·실종자가 6천여명에 달했음에도 6·25 관련 인명피해 통계 하나 없다.
'영암군향토사' 자료를 안고 고심해 온 지 어언 3년, 지난 8월 영암학연구회 회원들에게 소개를 했더니 국한문 혼용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부터 시작해 보자고 하였고, 현재 공동 번역이 조금씩 진행 중이다. 영암군에 '영암군향토사' 발간 예산을 요구했다 하니, 60여년 동안 객지를 떠돌고 있는 이 비운의 역사서가 영암으로 귀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암군과 영암군민이 버린 '영암군향토사'! 낡고 조잡한 미완의 원고들이지만, 700여 페이지가 넘는 이 원고는 해방 후 영암을 이끌어가던 분들이 혼과 열정을 담아 직접 기록한 영암군 역사상 가장 고귀한 기록문화유산이다. 이제라도 국가기록원에 방치돼 있는 이 육필 원고가 영암군의 보물로 지정되어 우리 군민들에게 영원한 희망의 등불이 되기를 소망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