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공론정치와 대동정신' 세미나 개최

(사)마한문화역사연구회, 약재·만암의 탕평책 의미 되새겨

이승범 기자 stonetigs@hanmail.net
2021년 11월 19일(금) 13:42
'조선조 공론정치와 대동정신'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지난 11월 12일 월출산 氣찬랜드 내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열렸다.
대한민국헌정회(회장 김일윤)와 (재)한국학호남진흥원(원장 천득염), (사)마한문화역사연구회(회장 유인학)가 공동주최 한 이날 세미나에는 김일윤 헌정회장과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장, 유인학 마한문화역사연구회장, 전주최씨 최흥열 대종중 회장 등이 참석했다. 특히 이날 행사에는 유성엽 전 국회의원을 비롯한 21명의 헌정회원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유수택 마한문화역사연구회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세미나는 유인학 회장이 조선조 이전 한국정치의 이념과 현실, 조선 후기의 공론정치와 세도정치, 공론정치 연구과제 등을 설명했고, 이어 헌정회 김충환 회장이 우리나라의 정치이념과 당파의 형성과정 등을 설명했다.
이어 이종범 조선대 명예교수와 이종묵 서울대 교수, 조창록 성균관대 퇴계학연구원 선임연구원, 김세호 원광대 교수 등이 참석해 조선사회 공론정치와 약재(約齋) 유상운(柳尙運)의 당벌과 거리두기, 행적과 저술, 조선조 공론정치와 만암 유봉휘의 정치활동 등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설명했다.
이종묵 서울대 교수는 "유상운은 1664년 인현황후가 복직되자 이조판서에 복귀했고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며 파란을 겪으면서도 1696년 영의정에 올랐다. 당벌의 지옥 속에 노론의 공적이 되어 소론으로 몰린 유상운은 노론의 공세 끝에 숙종25년(1699) 10월 영의정에서 파직됐다. 조정의 파란을 막지 못했다 해 그를 내친 것"이라면서, "당대 영의정 남구만, 좌의정 유상운, 우의정 신익상은 당벌과 거리두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창록 퇴계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유상운은 주요한 내·외직을 거치고 영의정에 올라 관직 생활의 정점에 올랐고, 그의 아들 만암(晩菴) 유봉휘(柳鳳輝) 역시 좌의정에 올라 2대에 걸쳐 상신(相臣)이 되었다"면서, "얼핏 보면 화려한 관직 생활을 누린 혁혁한 문벌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위직으로 활약했던 숙종 대에는 당쟁이 치열했던 시기였고, 이러한 정치 환경에서 본인은 계속해서 탄핵을 입었고 직산으로 유배 갔으며, 아들은 유배지 경흥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김세호 원광대 한문번역연구소 연구교수는 "조선 후기 정치사는 당쟁사와 그 흐름을 함께한다.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이후 당파는 분열을 거듭했고 국가의 정책은 각기 붕당의 입장에 따라 주도되고 전개됐다"면서, "이러한 당쟁은 옥사와 같은 피바람을 불러오기도 했다. 권력을 잡은 당파는 상대에 대한 숙청에 들어갔고 정세가 바뀌면서 이 같은 현상들이 반복되었다"고 당시의 시대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진 토론 시간에는 박해현 초당대 교수의 진행으로 참여자 질의응답 및 자유토론이 벌어졌다.
이승범 기자 stonetig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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