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성 대첩 기념사업’ 제안한 양달사현창사업회 이영현 사무국장 “월출산은 천연요새이자 영암사람들 목숨 구한 靈山, 영암성은 바로 월출산의 축소판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
2022년 05월 13일(금) 11:17 |
▲ 양달사현창사업회는 1555년 5월 25일 영암성 대첩에서 영암군민과 함께 6천여 왜구를 물리친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장군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고 영암군민의 자긍심을 고양시키기 위한 비영리 민간단체입니다. 회장은 장만채 전 전남도교육감이 맡고 있고. 정회원이 전국적으로 230명 정도 됩니다.
2019년 9월 25일 창립총회에서 매년 5월 25일 영암성 대첩일에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으나, 코로나19 관계로 올해까지는 이사회로 갈음하기로 했습니다. 내년에는 차분히 준비해서 영암성 대첩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개최할 예정입니다.
지난해 초에 홈페이지(http://www.yangdalsa.kr)와 사무실을 열었고, 관내 초·중·고교 리플릿 배포와 군민과 교사들 대상의 각종 특강, 졸작인 소설 「바람벽에 쓴 시」 발간 등을 통해 양달사 의병장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양달사 시묘공원과 장독샘의 1단계 정비 공사를 추진 중에 있고, 지난 4월 23과 24일 이틀 동안 개최된 제2회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장군 배 전국궁도대회도 적극 후원한 바 있습니다.
- 조선 최초 의병장인 양달사 장군에 대한 소설 「바람벽에 쓴 시」를 통해 양달사 장군의 영암성 대첩을 극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양달사 장군과 영암성 대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뭔가?
▲ 20대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나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30대 초반에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글을 써서 밥벌이를 했던 경력 때문에 군정 홍보 업무를 주로 맡게 되면서 영암군의 역사를 섭렵할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성 대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영암군에서 역점적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해 오다가 유신정권의 압제와 당시 본 사업을 주도했던 분들의 사망 등으로 중단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말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말단 직원이어서 이 사업을 재개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고, 더욱이 영암성 보전이나 복원 문제는 금기어처럼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이런저런 사유로 늘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던 2015년 가을에, 열무정 앞에서 만난 여고생들로부터 질문을 하나 받았습니다. 동무지구 개발사업으로 두 쪽으로 갈라진 영암성터를 가리키면서 “여기가 우리 영암의 쌍무덤인가요?”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머리가 선뜩했습니다. 곧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만, 그 충격은 오래도록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 재개 방안을 늘 고민해 오던 중 2017년 7월에 도시개발과로 발령 나면서 기회를 잡았습니다. 쌍무덤처럼 남북으로 갈라진 영암성을 보도교로 연결하는 사업을 군수께 건의했고, 자연스럽게 성터에 대한 시굴 조사가 선행되면서 영암읍성의 윤곽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영암군에서 지난해 발굴된 읍성을 보존하면서 달맞이공원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압니다.
- 소설 「바람벽에 쓴 시」에도 묘사되어 있지만 영암사람들에게 월출산과 영암성은 조상 대대로 삶 깊숙이 스며있는 상징과도 같다. 특히 영암성은 영암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나?
▲ 영암성은 월출산의 축소판입니다. 월출산이 영암사람에게 어떤 산인가를 알아야 영암성을 제대로 알 수가 있는데, 전에도 몇 차례 말씀드렸지만, 월출산에는 돌이 많습니다. 무기가 없던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돌멩이가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이 쳐들어오면 산으로 도망가서 투석전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월출산 주변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가 축적되면서 자연스럽게 빗물 저수조와 망루 등을 갖춘 산성대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월출산은 그야말로 목숨을 지켜주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 757년 12월(신라 경덕왕)부터 월나군은 영암군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700여년 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에 ‘동석(動石)이 있어서 영암이라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월출산이나 영암의 지명에 관한 연구 결과는 추후 자세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어쨌든 애당초 월출산은 그 자체가 천연 요새이자 우리 선조들의 목숨을 구해주는 신적인 영산(靈山)이었고, 여기에서 영암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인구가 계속 늘어나자 고려말부터 우리 선조들은 평지에 읍성을 만듭니다. 가파른 산으로 도망 다니는 것이 힘들고, 사람도 많아져서 당시 영암의 대표 포구이던 도시포의 상류에 읍성을 축조한 것입니다. 월출산의 풍부한 돌들을 활용하기로 하고 계곡을 둘러싼 야산들을 연결한 포곡형(包谷形) 읍성을 쌓았습니다. 외벽만 석축을 쌓는 내탁(內托) 방식으로 총 길이가 2.01㎞에 달하는 전라도에서 가장 큰 읍성을 만든 것입니다. 이때부터 영암성은 영암군민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보물이 되었고, 영암군은 전라도 서남부의 육로와 해로를 연결하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 <영암군민신문> 고정칼럼 ‘낭산로에서’ 기고를 통해 6·1 지방선거 영암군수 후보들에게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을 제안했다. 그 배경은 무엇인가?
▲ 영암성 대첩은 영암군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업적입니다. 이덕견 군수가 왜구에게 항복한 치욕을 영암성 대첩으로 말끔히 씻어냈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와 나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양달사 장군의 행장(行狀)을 쓴 나주목사 임육과 양달사 묘지명을 쓴 성균관 대사성 윤득부 등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이 한 말입니다.
하지만 영암성 대첩을 보고하던 도원수 이준경은 영암성을 임시로 지키러 온 전주부윤이자 자신의 친형인 이윤경에게 모든 공을 돌렸고, 주변의 관리들까지 거기에 장단을 맞추면서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군민들의 의병 활동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머니 상중에 출전하였기 때문에 양달사 형제들이 공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양달사 의병장의 공적 덕분에 이윤경은 곧바로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전라도 전역에서 이러한 조정의 논공행상이 잘못되었다는 공론이 용암처럼 분출되었고, 장흥부 바람벽에는 조정의 조치를 비판한 시가 나붙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준경의 밑에서 명종실록을 만들던 사관들이 장흥부에서 떠돌던 이 시를 1555년 12월 2일 실록에 남긴 것은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오죽했으면 사관들이 이 시를 기록해 두었겠습니까? 나의 졸작 「바람벽에 쓴 시」의 제목은 여기에서 가져왔습니다.
아무튼 당시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조정의 처사에 불만을 가진 전라도 선비들의 공론이 대대로 이어지다가, 1757년 발간된 여지도서에 양달사 의병장의 기록이 실리게 됩니다. 관리들의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20년 후인 1777년에는 전라도 각 시·군의 유생 444명이 관찰사에게 연명으로 탄원을 하는 등 줄기차게 도내 선비들이 요구한 끝에 1847년 양달사 의병장은 좌승지로, 그의 형 달수는 사헌부 지평으로 추증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서일까요? 당시 조정에서 내린 포상에 대해 영암군에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50년 후(1897년)에 발간된 영암군지에 도내 유생들이 수 차례 표창을 상신하였다는 기록만 있거든요? 영암군수나 군청 관리들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반증이지요.
그러다 416년 후인 1971년에 영암군에서도 양달사 장군에게 관심을 가진 군수가 한 분 등장합니다. 바로 제19대 김기회 군수. 그분이 처음으로 군청 앞 장독샘 전설에 관심을 갖고 조사를 시작하여 공적비를 세운 것이고, 2019년 양달사 현창사업회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는 신문 기사를 보시고는 저에게 축하한다는 전화를 걸어 오셨습니다. 21대 김연수 군수는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성 대첩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양달사 장군의 묘지 앞에 ‘호남창의 영수 양달사 선생 순국비’를 건립했을 뿐만 아니라, 양달사 의병장의 형제들 묘소 앞에도 비석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지만 김연수 군수 후임으로 온 군수님들은 유신 정권의 서슬이 무서웠는지 다시금 양달사 의병장을 외면했습니다. 1995년 부임한 양복완 부군수가 장독샘을 잠시 정비했을 뿐 지금까지 이 일을 다시 하자고 나선 군수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이번에 군수 후보님들께 이 사업을 제안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영암군민이 세운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인 영암성 대첩과 양달사 의병장 기념 사업을 영암군의 주요 군정 업무로 추진해 달라는 것입니다.
- 영암군수 후보들에게 제안한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의 내용은 무엇인가?
▲ 첫째 영암성 대첩 기념 조례를 제정했으면 합니다.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의 법적인 근거를 확보하자는 뜻입니다. 이미 지난해 영암군에 조례안을 전달한 바 있고, 언론에도 몇 번 기고한 바 있습니다. 1555년 5월 25일을 영암군 기념일로 제정해서 영암군수답고, 영암군민답고, 영암군다운 일을 해 보았으면합니다.
둘째, 영암성 대첩 기념 행사 개최입니다. 우리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 백성들은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6천여 왜구를 물리쳤지만, 도원수가 의병이라는 이유로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 역사에 묻혀 버렸습니다. 당시에는 이준경, 이윤경의 서슬이 무서웠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지방자치 시대입니다. 우리라도 나서서 양달사 의병장의 공적을 역사 속에 바로 세우는, 후손다운 일 좀 하자는 것입니다. 을묘왜변 당시 변협 해남현감은 왜구를 방어한 것을 기념으로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해남군에서는 지금 그 나무를 ‘해남 수성송’이라고 부르면서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암군도 매년 5월 25일에는 기념식을 개최하고, 세미나 개최와 각종 예술공연, 궁도대회를 비롯해 각종 체육대회와 글짓기 대회 등을 열어야 합니다. 영암성 대첩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창작극을 만들 수 있습니다. 금년에 양달사 전국 궁도대회가 궁도협회 주관으로 열렸는데, 이런 명예로운 행사는 응당 군 주관으로 개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영암성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조선 말까지 서남부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영암성을 서둘러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존 작업을 제대로 추진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내가 그 동안 나주읍성과 병영성, 진도 금갑진성 등을 수차 가 보았지만, 성터 흔적이 우리 영암성보다 적었던 곳들이 대부분입니다. 영암읍교회부터 신동아빌라 뒤편의 성터는 아직도 숲 덤불에 묻혀 있습니다.
차기 영암군수께서는 영암군의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영암성을 한번 제대로 발굴 조사해서, 당시 영암읍성 안팎의 건물터와 영암성 대첩 당시의 전적지에는 안내판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영암성과 영암성 대첩을 교육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넷째, 영암경찰서 앞에 남문을 복원하자는 것입니다. 남문을 고집하는 이유는 좌우로 성곽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남문을 중심으로 좌우의 남은 성곽을 연결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성루 1층에는 영암성 모형도를 비치해서 관광객들에게 영암성 대첩을 알리고, 망루에는 망원경을 여러 대 설치해서 월출산의 아름다운 풍광과 서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상주시가 올해부터 3년간 상주읍성 복원에 120억여 원을 투자하고 충남 태안군도 50억여 원을 들여 읍성 복원에 나섰습니다. 나주는 4대 문을 이미 2018년에 복원했고, 강진 병영성과 진도 금갑진성 복원사업도 한창 진행 중입니다. 영암읍에 문화재가 없다고 하는 분들을 간혹 있는데, 모두 영암읍의 역사를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영암군의 자랑스러운 문화재는 거의 대부분 영암읍 중심지에 있었습니다.
다섯째. 영암성 대첩길을 조성하자는 것입니다. 1915년 일제가 만든 지적도를 보면, 영암성의 윤곽이 명확히 그려져 있습니다. 영암정수장 옆길을 다시 트고 성 밖의 영암성길을 가능한 곳만이라도 복원해서 사람들이 영암성길을 탐방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영암성길과 연계한 대첩길도 만들기를 제안합니다. 을묘왜변 당시 가장 치열한 전적지였던 군청 앞에서 출발하여 영암장터, 공설운동장, 역리 로터리, 제일교회 앞을 지나오는 대첩길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영암성길과 대첩길 주변 가게들은 영암 먹거리며 관광상품들을 판매하게 하고, 열무정에는 활쏘기와 죽궁 만들기 체험 교실을 개설해서, 영암읍 시가지가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진풍경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군데군데 멋진 화단과 수석공원 등의 볼거리도 만들어서, 영암 시내를 전국의 관광 명소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여섯째, 군수라면 마땅히 영암성 대첩을 자랑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함에 ‘최초 의병장 양달사의 고장 영암군수 ○○○’라는 문구를 넣어 영암을 알리고, 양달사 장군 표준영정을 만들고, 영암읍 입구에 동상도 건립해서 을묘대첩의 호국영웅 양달사의 고향이 바로 영암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다녔으면 합니다. 영암읍 중앙로를 양달사로로, 달맞이공원은 영암성 대첩 공원으로 바꾸어 영암성 대첩과 양달사 장군의 이름이 온 국민의 뇌리에 박히게 해주시길 제안합니다.
일곱째, 양달사 시묘공원 조성사업도 서둘러야 합니다. 시묘공원 옆에 양달사 형제의 사당을 세우고, 공원 안에 여막이며 쉼터를 만들어 학생들의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했으면 합니다.
-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에 들어 있는 영암성 대첩길 조성이나 남문 복원 등은 지금 현재 대부분이 훼손되었다고 볼 수 있는 영암성의 복원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할 일들이다. 도시개발과장과 일선 면장을 역임한 행정경험으로 미뤄 영암성 복원의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가?
▲ 그 부분은 내가 그 동안 수없이 고민했던 부분으로, 지금도 다양한 법률 검토와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자문을 받고 있습니다.
우선 해야 할 일은 남아 있는 영암성을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부 몰지각한 건설 업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몰래 성돌들을 실어다가 자기집 정원을 꾸미거나 외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이 돌들을 더 이상 없애지 못하도록 먼저 영암성을 영암군 문화재로 지정하고 추후 사적지로 격상시켜야 합니다.
둘째, 영암군의 도시계획, 공원계획, 관광계획 등의 일부 변경도 당연히 수반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계획을 수립하거나 변경할 때는 영암군민들, 토지 소유자들이 참여하는 공청회가 필수적이구요.
셋째, 현재 영암성터인 달맞이공원과 영암공원 부지 외의 땅은 대부분 개인 소유로 돼 있습니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할 때 성 안팎의 땅들을 당시 일본인들에게 헐값으로 매각한 까닭입니다. 따라서 건물이 들어선 개인 소유의 땅들은 그대로 두고, 공공용지를 중심으로 길을 복원했으면 합니다. 예산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곽의 보존을 원칙으로 하되, 꼭 필요한 땅들만 매입하는 방안으로 영암성을 복원해 나갔으면 합니다.
넷쩨, 1915년에 일제가 만든 지적도와 현재의 지적도, 그리고 현재의 위성사진을 하나로 일치시킨 앱을 만들어서 영암성 안팎과 영암성 대첩 전적지를 스마트폰으로 수시로 볼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합니다. 건물 등에 막혀 있더라도, 저 건물은 당시 어떤 건물이 있었던 곳이고, 작청이며 형방청이 어디였는지를 상시 검색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 영암성과 양달사 장군 외에도 영암의 근현대사 등 향토사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줄 안다. 영암군향토사 발간, 영암군의 역사 인물 재조명 등에 대한 생각과 방향을 제시한다면?
▲ 영암군 향토사를 얘기하자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영암군 향토사 편찬은 영암군 주관으로 의욕적으로 시행했던 사업입니다. 해방 직후 건준위원장으로서 영암군수직을 수행하였던 조극환 선생이 편찬위원장이 되어 위원들과 함께 1953년부터 1960년까지 편집했던 순수한 영암군 역사서입니다. 3·1 만세운동의 주역들과 6·25 전쟁을 이겨낸 자랑스러운 선조들이 열정과 혼을 불어넣어 엮은 보물급 문화재입니다. 그럼에도 영암군과의 갈등으로 조극환 선생이 원고들을 갖고 영암을 떠나면서, 영암군 향토사 원고는 60여년 동안 객지를 떠돌다가 기록원에 기증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다행히 영암군과 군의회, 영암문화원의 지원으로 금년에는 국한문체를 한글로 번역한 책자가 발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다시는 영암군지나 영암군향토사가 영암군에서 버림받는 비극이 없었으면 합니다.
영암군의 역사 인물 재조명 사업을 얘기하면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 전, 전라남도교육연수원의 남도민주평화길 프로그램에서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의 의병사’를 특강한 적이 있습니다. 영암 의병사를 살펴보면 양달사 의병장의 친동생 양달해의 사위가 바로 전몽성 장군입니다. 양달해의 장남 양우신은 매형인 전몽성을 따라 의병에 투신하였다가 1597년 9월 25일에 해암포(영암군 학산면 석포리) 전투에서 전몽성 장군 가족과 함께 전사하고 맙니다. 을묘왜변에서 시작된 의병의 역사가 정유재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미암 유희춘의 일기를 보면 양달사 의병장이 김천일과 함께 당시 전라도관찰사인 미암 유희춘을 찾아가 함께 밥을 먹은 기록이 나옵니다. 양달사 의병장이 19살이나 어린 김천일 장군과 막역하게 지낸 것으로 보아, 김천일 장군이 의병장이 된 것도 양달사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임진왜란 때 명성을 떨쳤던 고경명 장군과 최경회 장군이 영암군수를 역임한 분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양달사 의병장의 혼이 깃든 영암성에서의 생활이 그분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우리 영암은 조선 최초 의병장의 고향이자 의향(義鄕)인 것입니다.
한말 의병 때 영암희소 사령부가 금정 국사봉에 있었고, 우리 영암사람들이 심남일 장군 휘하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함평 사람인 심남일과 무주 사람인 선봉장 강무경의 휘하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 군경을 400여 명이나 사상시킨 주역이 바로 우리 영암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학자들은 대부분 장흥과 능주, 담양 등으로 이어지는 곳이라서 국사봉에 사령부를 두었을 것이라고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영암사람들의 의로운 기상 때문에 국사봉에 호남의소 사령부를 두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치홍, 박찬희, 박사화, 이덕삼, 정관오 등 무수히 많은 항일 의병장들이 바로 우리 영암의 선조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영암군의 한말 의병에 대한 정리는 아직도 덜 되어 있고 그분들에 대한 예우도 미흡합니다. 김치홍 의병장의 사당 말고는 공적비 하나 제대로 없고, 학산면의 박찬희 훈련장은 지금도 각종 기록에 출신지며 생몰 연대가 미상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영암의 독립운동사도 마찬가지입니다. 3·1 운동 직후 한성임시정부가 탄생하는데, 그 당시 발의자 중 한 분이 우리 영암 교동리 출신의 한남수입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전라도 대표로 한성임시정부 준비 요원으로 참여하고, 1919년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게 됩니다. 일제를 피해 상해로 옮겨가서는 한성임시정부 요원들이 대부분 상해임시정부 요원이 되는데, 한남수는 이시영의 밑에서 재무부 차장으로 활약했습니다. 영암군 독립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암읍 교동리 에서 한남수를 보고 자란 다섯 아래인 인척이 조극환 선생이고, 조극환보다 여덟 살 적은 제자가 낭산 김준연입니다. 이런 영암군 독립운동사의 친인척 관계나 성장 과정 등을 무시하다 보니, 영암에 후손이 남아 있지 않은 한남수나 한현상은 영암군지나 영암군 독립운동사에서 아예 이름조차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삼일절만 되면 영암공원에 올라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할 게 아니라 당시 우리 영암에서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그분들이 잡혀 가서 장흥에서 재판을 받고 걷고 또 걸어서 둔덕리를 지나 남문으로 돌아오는 광경도 한 번쯤 재연해 보는 행사를 가졌으면 합니다.
-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의 본격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양달사현창사업회의 외연 확장 등 위상 재정립도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
▲ 이미 1974년에 영암군에서 여기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도포면 봉호정마을 입구 양달사 시묘공원을 가 보면 ‘호남창의영수 양달사 선생 순국비’가 있는데, 당시 추진위원장이 영암군수이고 영암군의 주요 단체장들은 추진위원, 허련 도지사와 강기천, 길전식 국회의원 등은 고문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회도 이렇게 꾸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21년 1월에 제가 양달사현창사업회 간판을 만들면서 간판 하단에,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회 추진단’을 명기한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영암성 대첩은 우리 전라도만 아니라 국가를 살린 위대한 승리입니다. 금년 9월에 제주도에서 당시 영암에서 도망친 왜구 1천여 명을 물리친 김수문 목사와 김성조 건공장군의 공적을 알리는 을묘왜변 세미나가 제주특별자치도 주최로 개최될 예정인데, 전라남도에서는 을묘왜변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영암군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와 인물을 알리는 것은 자치단체장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입니다. 민선 영암군수가 앞장서서 영암성 대첩과 양달사 의병장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우리 영암군의 자존감을 높이고, 군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구에게 항복한 죄로 참수당한 영암군수 이덕견의 죄를 참회하는 심정으로 차기 영암군수께서는 이 사업에 발벗고 나서서 영암성 대첩이 학생들의 역사 교과서에 기록될 수 있도록 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영암성 대첩 기념일이 ‘영암성 대첩 기념 대축제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