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산성을 찾아서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2022년 06월 03일(금) 14:04 |
이영현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소설가 |
한데, 영암산성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삼국사기부터 1897년 호납읍지까지 아무리 살펴보아도 영암산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우리 군 산성을 최초로 조사한 1943년 조선총독부의 '조선보물고적조사보고'에 의하면 월출산 곳곳에 540간(間, 약 970m) 정도되는 석성의 흔적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도 영암산성이라는 문구는 없다. 영암군의 디지털영암문화대전에도 활성산성 터 등 8개소의 산성만 나와 있고, 2013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 ‘영산강 유역 고대산성’을 조사할 때도 영암산성은 빠져 있다.
그렇다면 영암산성은 애초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아니다. 기 체육공원 등산로 중간쯤에 위치한 산성대는 산성 돈대, 산성의 전망대, 산성의 망루 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필자가 몇 차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산성대 주변에 기와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동안 영암성 조사에 몰두해 온 필자는 다음 단계로서 영암산성 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5월 23일 영암문화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분들과 영암산성 탐방에 나섰다. 8시에 먼저 출발한 선발대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아홉시 반경이었다. 성벽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사진의 우측 부분이 바로 겉쌓기 된 약 10미터 가량의 성벽으로서, 고용규 고대문화재연구원 말씀에 의하면 80년대까지만 해도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 있었다고 한다.
걸음을 재촉해 올라가자, 주능선 중앙 암벽에 개거식 성문이 있었음직한 구멍이 눈길을 끌었다. '송은(松隱)'이란 분이 성문지 암반에 월출산 유람객들을 위해 '월출제일관(月出第一關)'이라 새겨 놓았지만, 그곳은 우리 영암 백성들이 외적의 칼날을 피해 도망갔던 생사의 관문이자, 남정네들이 목숨을 걸고 주민들을 지켜낸 최후의 보루였음에 틀림없었다. 주변의 시누대 밭과 벚나무, 때죽나무들은 나의 이런 추측을 더욱 뒷받침해 주었다. 시누대는 고대부터 화살대로 사용하던 것이고, 벚나무 껍질과 때죽나무는 활을 만드는 재료들이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성문지 뒤쪽으로 은밀하게 숨어 있는 100여 평 남짓한 평지와 그 아래 축조된 성벽들, 전망대로 활용되었을 우뚝 솟은 바위들, 도처에 흩어진 수많은 기와 파편들은 영암산성의 슬픈 역사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암산성의 기록이 없는 이유는 뭘까? 추측컨대 성벽의 흔적을 거의 볼 수가 없기 때문인 듯하다. 고려말부터 영암성을 쌓던 우리 선조들이 쓸 만한 성돌들을 골짜기로 굴러내려 영암성 축조에 사용했기 때문에 성벽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1451년 영암성이 완공된 이후부터는 영암산성 터를 봉수대로 가끔 사용하다 보니 사람들이 대부분 산성대를 봉수 시설로 여겼고, 산성대 입구의 안내판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하지만 영암산성은 시종면 성틀봉산성에 이어 가장 오래된 산성으로서 1천여년 동안 영암군민을 지켜준 어머니 같은 산성으로 보였다. 아무쪼록 민선 8기에는 영암성과 함께 전문적인 조사를 시행한 후 망루와 빗물을 담은 저수조, 봉수지 등을 복원해서 영암성과 함께 관광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영암의 르네상스가 펼쳐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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