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의 목적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2년 08월 19일(금) 14:23
조정현 영암읍도시재생주민협의체 위원장 영암군향토사 감수위원 영암학회 연구회원
도시재생은 영문 'Urban renewal' 또는 'Urban regeneration'의 직역이다. 그 기원은 19세기 영국 산업혁명 후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낙후해가는 지역의 소규모 도시들을 정부가 재건사업을 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시기에 본격적인 '도시재생'이라 할 수 있는 사업이 시행되었다. 1853년 도시재생 사업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Baron Haussmann(오스만)이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파리 중심부 센느(Seine)의 주지사로 발탁되어, 지금의 파리도심의 틀을 짜게 되면서 본격적인 도시재생이 시작되었다. 그 후 20세기를 거치면서 전 세계로 도시재생사업이 퍼지게 되었고, 가까운 나라들 중에서는 싱가폴이 가장 먼저인 2차 세계대전 중에 도시재생에 관심을 기울였다. 타이완은 1976년 타이베이 동부지역을 재개발하면서 그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 4월 13일에 입법화하고, 그 구체적인 시행의 시작은 2017년 6월 13일에 발표된 문재인 정부의 5개년 계획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의 새마을 운동,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이 있던 해,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주도했던 청계천 복원사업도 도시재생의 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도시재생이 추구하는 바는 해당 도시의 공간 안에서 생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함과 동시에 그 지역의 생활환경을 인위적으로 좀 더 쾌적하게 바꿔주는 것이다. 도시재생을 위한 지역의 문화와 역사는 공간의 지리적, 시간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영암은 국립공원 '월출산'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있고, '영암읍성'이라는 역사적 공간이 존재했던 농촌형 주거형태에 가까운 도시이다. 도시재생의 성공모델이라고 해안 도시의 모델 또는 산업도시의 모델을 그대로 차용할 수 없는 이유이다. 도시재생이 끝나고 난 후 그 지역의 사업이 잘 진행되었는가는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고, 또 가질 수 있는 역사와 문화가 잘 스며들어있는가, 그리고 타 지역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우리만의 것을 우리 지역을 찾는 외지인들이 느낄 수 있는가'가 될 것이다.
현재 우리 지역 영암에도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타 시·군에 비해 늦게 시작하다보니 활성화 단계로의 진행은 되지 않고 있어서, 실제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피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영암읍도시재생주민협의체는 집수리 개량사업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영암보다 먼저 시작하여 그 성과를 내고 있는 곳에 찾아가 그들의 아이디어를 보고, 배우기 위해 선진지 견학을 다녀온다.
작년에는 순천과 강진을 다녀왔다. 순천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가 다소 완화되어 오랜만에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주말시장을 부러워하였고, '사평역에서'란 시로 익숙한 곽재구 시인을 위한 공간을 보며, 도시에 들어서는 문화적 여유로움의 중요성도 배웠었다. 영암은 그보다 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영암 아리랑'이 있다. 그리고 더 멀리 보면 월출산을 노래한 점필재 김종직, 매월당 김시습, 백호 임제,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등이 있다. 월출산이 잘 보이는 곳에 그들의 시비를 하나씩 설치하고, 도시재생 공간 곳곳에 그림을 넣은 시화를 벽화로 장식해둔다면, 영암을 다녀간 옛사람들의 풍류를 오늘날 우리의 문화로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는 전북 완주와 군산을, 그리고 나주를 다녀왔다, 우리 영암과 비슷한 배경과 환경을 가진 완주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그들의 '로컬푸드' 시스템과 현재 300개를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마을협동조합'에 대해 지속적인 교류를 하면서 꼼꼼히 살펴본다면, 먼저 출발한 그들로부터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완주군의 주도하에 현재 진행하고 있는 협동조합은 노년층 등 취약계층의 소득구조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목사골 나주의 구도심은 문화재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나주읍성의 둘레만도 3.7km에 달하였지만, 과거 동헌 역할을 하였던 금성관 외에 모두 소실되었던 역사의 흔적을 다시 차곡차곡 만들어가는 중이다. 지금 현재 나주에 가면 볼 수 있는 성터 등은 발굴 작업 등을 통해 다시 조성한 것이다. 실제로 나주에 남아있었던 유적은 현재 영암에 방치되다시피 남아있는 영암읍성의 유적보다 더 열악하였다. 영암읍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옛 읍성의 흔적은 옛 열무정 터에서 경찰서 뒤로 이어지는 곳, 무등 아파트 뒷길, 그리고 영암읍교회와 천주교회 뒤쪽으로 이어진 정수장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하면 많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는 유적이지만, 지금 남아있는 곳을 발굴하고 보존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과거 영암을 상징하였던 우리의 얼굴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우리 고장 영암은 마한 문화의 중심지에서, 해상무역의 거점이었던 백제와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에서는 전라도 지역의 주요거점 도시였다, 당연히 우리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오경박사 왕인, 국사 도선, 별박사 최지몽, 조선최초 의병장 양달사, 조선 명필 한석봉, 임진란의 영웅 이계정, 정유년 영암을 지킨 전몽성, 구한말 강무경과 그의 부인 양방매를 포함한 수많은 항일의병들, 기미년 4·10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극환, 의사 박열과 함께 일본에서 항일단체 '불령사'를 조직했던 잊혀진 의사 한효상, 전국 최초로 항일 동맹휴교를 선언했던 영암보통학교, 그리고 농민항일운동이었던 형제봉 사건 등이 있다. 우리가 지닌 이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콘텐츠에 지리적 인식까지를 더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영암'이라는 공간 속에 조화롭게 녹여낼 수 있다면, 우리는 도시재생의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영암(靈巖)'이라는 독특하고, 특별한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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