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비문화원과 함께 하는 정자(亭子) 이야기

유학자 淸湖 姜達齡 선생이 귀향해 유유자적 '嚴子陵'을 꿈꾸던 書齋이자 학숙

三唐詩人 白光勳 등 많은 시인묵객의 주련, 시제에 건축사적 가치도 매우 높아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2022년 10월 07일(금) 14:43
청암(淸菴) 강한종(姜漢宗)은 1541년 쯤 강진 성전의 금당에서 영암읍 망호리 후정마을에 입향한 유학자 청호(淸湖) 강달령(姜達齡) 선생의 아들이다.
부친인 강달령 선생은 지금으로 말하면 '농막(農幕)'인 부춘별서(富春別墅)를 지어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선생과 교류했다. 강한종이 옥봉을 스승으로 삼은 배경이다. 무과 급제 후 평양 판관 겸 병마절제사를 지냈고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강한종이 광해군 때 난정을 상소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귀향한 것도 그 스승의 영향인 듯싶다.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 조선 중종에서 선조 연간에 시명(詩名)을 떨친 세 사람의 시인) 중 한명인 백광훈 역시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정치의 뜻을 버리고 산수를 방랑하며 시(詩)와 서도(書道)를 즐겼기 때문이다. 그는 〈관서별곡(關西別曲)〉으로 유명한 백광홍(白光弘)의 동생이요, 당시 진도에서 귀양살이하던 노수신이 그의 스승이다.
귀향한 강한종은 월출산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배날리길 연정산 자락 풍광 좋은 곳을 터 잡아 정자와 사당 겸 학당(學堂)을 짓고 '부춘정(富春亭)'(전라남도문화재 제284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정자에 서면 정면에 아름다운 월출산이 마주보이고, 유유자적 낚시를 즐겼을 덕진천이 흐른다. 월출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한가로이 낚싯대를 드리우던 강한종의 모습은 그가 지은 시에 그대로 스며있다.
桐江七里富春峰(동강칠리부춘봉) 오동나무 우거진 동강 칠리 부춘봉에
肯構斯亭樂在中(긍구사정락재중) 정자를 지으니 즐거움이 그 속에 있네
我有石坮上垂釣(아유석대상수조) 석대 위 걸터앉아 낚싯대를 드리우니
斜風細雨夢嚴公(사풍세우몽엄공) 빗긴 바람 가랑비에 엄자릉을 꿈꾸네
'부춘(富春)'은 절경으로 유명한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수도 항주(杭州)에서 유래한다. 항주는 바로 부춘강(富春江)과 동려현(桐廬縣)이 있는 곳으로, 후한(後漢) 때 엄자릉이 만든 '엄자릉 조대'(嚴子陵 釣臺)는 절강성의 등록문화재다. 이곳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광무제 유수(劉秀)의 절친(切親)인 엄자릉은 친구가 황제에 오르자 은둔한다. 광무제가 명을 내려 찾으니 낚시하는 일개 촌부였다. 황제는 오랜만에 만난 벗을 황실에 머무르게 하고 벼슬까지 내렸으나 극구 사양한다. 그날 밤 일이 벌어졌다. 엄자릉이 잠결에 황제의 배 위에 다리를 올리는 불경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다음날 아침 천문을 관장하는 태사(太史)가 "어젯밤 천상에 객성이 북극성을 범했습니다. 별고 없으신지요?"하고 묻자, 황제는 웃으며 "내 친구 엄자릉과 잠을 잤을 뿐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자릉은 이철 관내한 친구가 내린 벼슬을 끝내 마다하고 부춘강의 조대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훗날 북송의 범중엄(范仲淹)은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를 통해 '엄자릉의 마음은 해와 달보다도 높고, 황제의 도량은 천지 밖까지 미친다'고 칭송했다.
진주강씨문중 후손인 강학용씨에 의하면 원래 강달령 선생이 입향하면서 연정산 자락의 땅을 사들여 서재(書齋)와 부춘정(富春亭), 조어대(釣魚臺) 등을 만들어 많은 선비들과 교류했다. 특히 그가 지은 부춘정은 앞서 서두에 말한 '부춘별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부춘정은 1570년을 전후해 창건되었고, 1618년(광해군 10년) 진주강씨문중에서 입향조를 기리기 위해 다시 개축했으며, 1672년 중수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2010년 벽체와 지붕 등이 훼손되어 골조만 남기고 산자(?子) 이상 해체해 보수하는 과정에서 1866년에 또 한 번 중수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중수 상량문이 나왔습니다."
부춘정에 관한 공식기록은 강한종의 현손인 강필문이 1672년에 쓴 '부춘정 중수기'에 담겨있다. 이에 의하면 부춘정 건립은 1618년이다.
어쨌든 강달령 선생이 지은 부춘별서는 정자의 기능은 물론 서재와 학숙 역할도 겸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낳은 사대부들의 지적(知的) 교류의 공간인 누정(樓亭)이 대게 덕망 있는 향촌 인물이나 정계에서 물러나 향리에 내려온 인사들이 소요(逍遙), 은둔(隱遁), 교류(交流), 강학(講學) 등의 목적으로 풍광이 좋은 곳에 건립했다. 부춘별서 역시 강달령 선생이 당대의 문장가 백광훈 선생 등과 교류하며 후학을 기르던 곳이었음이다.
부춘별서는 아래에는 연꽃이 피는 연지(蓮池)가 있고, 고개를 들면 월출산을 마주보았다. 사방이 확 트여 월출산과 덕진강을 막힘없이 바라볼 수 있고, 송백녹음이 바람소리(松聲)와 그림자(松影)를 자아내고, 덕진강이 소(沼)를 이뤘다. 그 황홀한 모습은 백광홍의 유명한 시 <부춘별서(富春別墅)>에 제대로 묘사되어 있다.
夕陽湖上亭(석양호상정) 호수 위 정자에 저녁노을 비추니
春光在湖草(춘광재호초) 봄의 풍광은 호수의 풀숲에 있네
明月山前?(명월산전사) 월출산 밝은 달 장자 앞에 비추니
花陰看更好(화음간갱호) 꽃그늘이 보고 또 보아도 좋구나
강학용씨는 "영산강 하굿둑이 축조되기 전에는 지금 논인 덕진강 줄기 위쪽(현재 수도사업소 자리)에 모래사장이 있어 모래찜질을 하던 곳이었고, 강가에는 갈대밭이 우거졌다"면서, "영암 출신의 작사자이자 작곡가 김지평씨가 고향 덕진면 금산마을과 부춘정에 올라 월출산과 갈대밭 풍경을 바라보며 지은 노래가 바로 <숨어오는 바람소리>다. 부춘정의 절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길 떠난 소녀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으면/그 사람 목소린가 숨어 우는 바람소리//둘이서 걷던 갈대밭 길에 달은 지고 있는데/잊는다 하고 무슨 이유로 눈물이 날까요/아 길 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쓸쓸한 갈대숲에 숨어 우는 바람소리//둘이서 걷던 갈대밭 길에 달은 지고 있는데/잊는다 하고 무슨 이유로 눈물이 날까요/아 길 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쓸쓸한 갈대숲에 숨어 우는 바람소리'
부춘정은 이렇듯 주변 풍광이 뛰어나고 내부에는 백광훈이 쓴 주련(柱聯 시구나 문장을 종이나 판자에 새겨 기둥에 걸어 둔 것)과 부춘정기(富春亭記) 등 8개의 시제가 걸려 있어 스토리텔링 가치도 높지만 건조물 구조의 희귀성 등 건축사적 가치 또한 높다 한다.
평면 구성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전면(前面)을 벽 없는 마루로 하고, 배면(背面)을 벽으로 막아 방을 만들어 전후(前後)가 대칭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건축구조적인 면에 있어서 전후병렬식 겹집이다. 내부 가구 구조는 '쌍시옷(ㅆ)'자형으로 짜여있고, 가구구조는 주심도리, 중도리, 종도리가 있는 5량의 기본 가구구조를 취하고 있으나 마루와 방을 경계 짓는 내진주열에 주심도리에 상응하는 별도의 구조재를 추가 설치해 이 부재를 중심으로 대청마루상부와 방의 상부구조가 각각 별도의 병렬조합식 3량 가구 구조형식을 취하는 특이한 구조방식을 취하고 있다. 본 건물의 5량 가구 구조의 중도리가 대청마루상보의 종도리가 되어 3량 가구 구조의 형식을 취하고 인접한 방상부도 동일한 방식을 취해 2중적 가구 수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런 예는 한국의 전통 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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