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비문화원과 함께 하는 정자(亭子) 이야기 - 영암 장암정(場巖亭)

장암 대동계가 1668년 지은 집회소(주주총회장)…350여년 전 '민주적 경제질서' 꽃피운 명소

영암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 '用下記' 복식부기는 국내 最古 회계장부 조선 후기 經濟史 함축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2년 10월 14일(금) 15:22
영암읍 장암리 497에 자리한 장암정(場巖亭)에 보존된 한시다. 애일당(愛日堂) 문창혁(文昌爀)이 1748년 3월에 썼다.
영암읍 망호리 배날리길의 ‘부춘정(富春亭)’이 풍치 좋은 곳에 자리한 정자라면, 장암정은 마을 중앙의 안길에 바로 면해있다. 통상 정자라면 덕망 있는 향촌 인물이나 정계에서 물러나 향리에 내려온 인사들이 소요(逍遙), 은둔(隱遁), 교류(交流), 강학(講學) 등의 목적으로 건립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장암정은 ‘집회소’ 성격의 정자여서다.
장암정은 장암 대동계가 1668년(현종 9년) 동약(洞約)의 모임 장소로 지은 누정이다. ‘동약’이란 조선 시대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규칙 같은 거다. 좋은 일은 서로 권유하고(德業相勸), 예의로 서로 사귀며(禮俗相交),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고(過失相規)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는(患難相恤) 것이 목적이다.
장암 대동계는 남평 문씨들이 덕진면의 영보에서 장암정으로 이주해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던 때인 1667년(현종 8년) 창설됐다. 주민 18명이 벼 1석씩을 내 장암 대동계를 조직하고 이듬해부터 회계장부의 보고를 시작했다. 그 후 340여년 동안 계 답을 운영해 대출하기도 하고 수익을 올려 계원들의 경조사를 돕는 등의 지출 내용을 계원들에게 매년 보고하기 위해 회계장부를 작성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용하기(用下記)’다.
장암 용하기는 오늘날 ‘복식부기’(모든 거래를 대변과 차변으로 나눠 기입한 뒤 각 구좌마다 집계해 기록, 계산하는 방식의 부기)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경제 변천사와 세계경제사학 연구에도 중요한 국보급 자료로 평가된다. 더구나 장암마을 용하기는 복식부기의 요건을 갖춘 국내 최고(最古)의 기록으로 알려진 1798년부터 22년 동안의 북한 소장 사개장부를 연대에서 57년이나 앞설뿐더러, 1741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300여년 동안의 기록으로 조선 후기 경제사(經濟史)가 함축된 대단한 자료이기도 하다.
향토사학자 고 이원형은 생전 <영암군민신문>에 기고한 ‘氣의 고장 영암을 말하다’에서 장암 용하기를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세계 회계학계에서는 이탈리아 루카 파치올리가 1494년에 저술한 ‘산술, 기하, 비 및 비례 총감’을 복식부기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입증자료는 단편적이고 완전한 회계장부의 형태로는 남아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장암 용하기 같은 국내의 회계장부를 발굴 수집해 체계적으로 분석할 경우 우리나라가 복식부기 최고(最古) 자료의 보유국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학계에서는 장암마을의 용하기를 경주최씨 문중의 용산서원 전여기, 경주 옥산서원의 회계록, 서울 육주비전의 회계록 등과 비교한 결과 복식부기의 형식을 갖춘 기록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자료로 보고 있다. 이 엄청난 기록이 국가나 관청이 아닌 일개 시골마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자 경이로움이다.”
장암정 대동계 문서(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7호)는 모두 12권이 남아 있다. 이중 계헌(契憲)은 장암마을 계 조직 운영을 위한 성문헌법이다. 매년 음력 5월 8일 즈음해 열리는 ‘강신(講信)’이 그것으로, 연말에 결산보고서를 낭독하고, 부정부패가 없는 것을 서로 확인하면서 신뢰를 도모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강신회’는 오늘날로 따지면 ‘주주총회’다. 바로 이 강신이 열리던 ‘주주총회장’이 장암정이었으니, 오늘날 민주적 경제질서의 원형이 350여년 전 영암에서 꽃을 피웠던 셈이다.
장암 대동계는 다른 동계와 마찬가지로 사족적 기반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나, 점차 향촌의 통제적인 규약을 첨가하면서 보완돼 촌락공동체 조직으로 변화되어 갔다. 1787년(정조 11년)에는 동약이 전면 수정되고 권학조(勸學條)와 여속조(勵俗條)도 첨부됐다.
이렇듯 장암정에 면면히 전해 내려오는 아름다운 전통은 안타깝게도 고색창연한 누각과 대동계 문서, 그리고 한시 현판에 스며있을 뿐이다. 미풍양속은 세월의 흐름에 퇴색하고 변화되기 마련이다.
“인간사 흥망성쇄가 어쩌면 자연적이면서도 인위적인 일인지라 한 시대는 어느 장소든 문전성시를 이루고 또 한 시대는 처마에 거미줄이 처지는 것이 인생사의 모습이다. 참으로 짧은 인생사에 늘상 대인관계에 겸손과 솔선수범이 사람을 모이게 하는 좋은 방법인 줄 알면서도 운잉(雲仍)이 선대의 바람처럼 되지못하고 옛모습을 잃으니 참으로 처창(悽愴)한 심정이다. 마을과 성씨 집단이 필연적으로 인간의 모임이라 타고난 성품과 학식과 예의가 사회와 융합치 못하면 억만장자나 당대에 학문이 풍성했던 집안일지언정 해와 달이 오래토록 흐르면서 어찌할수 없는 환경에 이른다. 어느 나라고 어느 민족이고 성씨가 덜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싶어하랴. 오늘 영암의 유명한 장암 남평문씨 장암정에 주옥같은 현판들이 보존되어 나의 가슴을 출렁이게 하는 환희감과 그 고매한 정신이 차츰 변해가는 비애감이 교차한다.”
6월 11일 장암정에서 열린 ‘2022년 선비와 함께하는 전통문화 계승사업-영암과 강진의 정자 이야기’에서 ‘장암정에 게재된 한시 현판에 대한 고찰’을 주제로 강연했던 성균관청년유도회중앙회 제16대 김득환 회장은 이처럼 말하면서 애일당(愛日堂) 문창혁(文昌爀)의 한시 ‘장암정(場巖亭)’에서 차운해 한시를 썼다. 정자에 보존된 주옥같은 현판들을 본 환희감과 그에 서린 고매한 정신이 차츰 변해가는 비애감이 교차하는 마음 절절하다.
花落鳥鳴已晩春(화락조명이만춘) 꽃 지고 새우니 늦은 봄 이미 지나고
凉風入袂正良辰(양풍입몌정양진) 서늘한 바람 소매에 드니 참 좋은 때에
南平古閥守鄕約(남평고벌수향약) 남평 문씨 옛 문벌은 향약을 지키며
東國到今契洞人(동국도금계동인)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동민과 계를 한다네
探義登亭窮究舊(탐의등정궁구구) 의로움 좋아해 정자에 올라 옛것을 궁구하고
吟詩觀板創成新(음시관판창성신) 시를 읊고자 현판을 보며 새로운 것 이루네
京湖遠近儒生?(경호원근유생니) 서울과 호남의 원근에서 선비님들이
講信場巖咸集茵(강신장암함집인) 장암정에서 강신코자 모두 자리에 모였네

過慾人生取月猿(과욕인생취월원) 욕심이 지나친 인생은 달을 취하려는 원숭이 같고
道心逸脫體難存(도심일탈체난존) 도덕적인 마음이 벗어나면 몸을 보존하기 어렵네
尋常省察此亭上(심상성찰차정상) 항상 성찰하면서 이 정자에 오르며
善守靑氈傳後孫(선수청전전후손) 대대로 유물을 잘 지켜서 후손에게 전하세
한편 현재의 장암정은 1760년(영조36년)에 지은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한다. 1788년(정조 12년)과 1819년(순조 19년)에 각각 개축이 이뤄졌고, 1880년(고정 17년) 전체적인 보수공사가 이뤄졌으며, 1976년 일부 수리가 이뤄졌다.
정자는 앞면 4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임 팔작지붕이다. 앞쪽에 마루를 깔아 개방된 구조로, 뒤쪽 중앙으로 마루방 2칸을 뒀다. 부속건물로는 고직사(庫直舍)와 강신소(講信所)가 있다. 장암정 내부에는 장암정기(場巖亭記)와 장암정중수기(場巖亭重修記) 등의 현판 23개가 있다. 장암정 편액은 명필 김이도(金履道)의 친필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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