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군 독립운동의 선구자 한남수(韓南洙)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2년 11월 18일(금) 12:24
이영현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영암학회 회장 소설가
구한말, 위정척사 운동에 부응하여 영보와 구림의 양반들이 움츠리고 있는 사이 우리 영암군에서 가장 먼저 세상의 변화에 눈을 뜬 것은 향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건운(韓健云 혹은 斗錫, 1856년생)은 장남 한동수를 자신의 뒤를 이어 영암군청에 들여보내고 둘째아들 남수(1882년생)를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 영암군에서 최초로 일본 유학을 간 당시 유행어로 ‘모던보이’가 한남수인 것이다.
한남수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1901년 약관의 나이에 중추원 의관(議官)이 되었고, 1907년 7월 6일에는 호남학회를 조직한다. 이듬해 1908년 7월 25일 발간한 호남학회 제1호를 보면 한남수는 회장 고정주(1906년 昌平英學塾 설립자)와 부회장 다음의 서열인 평의원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명인 고향 선배 양한묵(1862년생, 양한묵의 고향 옥천시면은 본래 영암땅이었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 한 마을 후배인 조극환(1887년생)도 회원으로 가입돼 있었다. 영암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인 조극환은 당시 한성사범학교 강습과 제1회로 입학하여, 동네 형인 한남수의 권유로 호남학회에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계기로 조극환은 당시 호남의 선각자들과 교류하게 되고, 1908년 8월 25일(호남학회 제2호)에는, 2대 회장 양한묵의 지명으로 사찰(査察)로 임명되었다. 사찰은 당시 경성 유학생들 중에서 호남출신들을 찾아서 가입시키는 임시 직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호남의 선각자들이 모여 신교육과 구국운동에 주력하던 호남학회가 1910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 출범과 함께 강제 해산되면서 한남수는 아버지가 살던 광주로 내려온다. 1896년 전라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뉘면서, 도청이 나주에서 광주로 옮겨가는데, 한남수의 아버지 한건운은 이때 관찰부 주사로 임명되어 광주에 머물렀다. 1919년 한남수가 구속되었을 때 주소가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 72번지(현 광주 불로동)이고, 출생지는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면 서외리(西外里)’로 돼 있는데, 당시 형 한동수가 살고 있었던 교동리 295번지(교동리 로타리 부근)가 본래 그의 탯자리였다. 지금까지 영암군 독립운동사에서 한남수가 지워져 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튼 1913년 8월 13일 신한민보에 의하면 한남수는 아직 철로 계획이 없던 광주~송정간 30여 리에 경편철도(輕便鐵道, 기존 철도보다 좁고 느린 간이철도. 당시 전주~익산 사이에 가설됨) 사업을 계획하여 거금 15만원을 투자하였다가 실패한 후 배임죄로 감옥을 다녀온다.
낙심하여 다시 서울로 올라간 한남수는 호남학회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 교유하면서 3.1만세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곧바로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홍면희(洪冕熹, 혹은 洪震), 이규갑(李奎甲), 김사국(金思國) 등과 전국적인 국민대회와 한성임시정부 조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참고로 홍면희는 1926년 7월 임시정부 수반을 맡았던 사람이고, 김사국은 1932년 6월 4일 영암농민항일운동의 주역인 김판권과 일본에서 박열을 중심으로 흑도회를 구성했던 인물로, 한남수의 조카 한현상(1922년 영암보통학교 휴학동맹의 주도자)은 박열과 평생을 함께 했다.
그러다 삼일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 여부 확인을 위해 홍면희, 이규갑, 김사국 등에게 국민대회를 부탁하고 4월 8일 상해로 출발하여 16일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비가 떨어져 상해에 머물고 있는 사이에, 4월 23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홍면희 등은 한성임시정부를 선포한다. 삼일운동 못지않게 일제를 경악하게 한 이날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남수를 그가 부재중일 때 이시영을 보좌하는 재무차장으로 공포했다. 정부 구성에 있어서 민주적인 방식을 채택하였다는 점이나, 대회를 개최해 정부 건설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는 점, 해외가 아니라 국내에서 건설되었다는 점에서 한성임시정부는 역사상 가장 정통성을 가진 임시정부였다.
하지만 한남수가 차비가 없어 상해에서 지체하고 있을 때 국민대회를 마친 홍면희 이규갑 등이 상해로 망명 오게 되고, 한남수의 무기력함에 실망한 탓인지 한성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해서 상해임시정부, 연해주국민의회를 통합하여 그해 9월 6일 발표한 새로운 상해임시정부 요인 명단에서 한남수의 이름은 사라지고 만다.
씁쓸한 느낌으로 조선으로 귀국한 한남수는 곧바로 검거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형을 언도받았다가 1920년 3월 방면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16일 인천의 미두장(米豆場)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검거되었지만,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돈이 없어 상해에 갈 때도 이규갑에게서 여비를 얻어탔던 탓에 스스로 독립운동가 계열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쓸쓸히 말년을 보내던 그는 1950년 6.25 때 서울 돈암동(68세)에서 납북되었다.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출신으로서 일찍이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조극환 선생과 낭산 김준연 선생 등에게 조선의 독립과 교육의 필요성을 일깨워준 선각자 한남수. 그가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영암군민 모두가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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