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그리고 민주주의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2년 12월 09일(금) 11:39
조정현 영암읍도시재생주민협의체 위원장 스마트영어학원 원장
광장 문화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이다. 고대 그리스 중 아테네에서 만들어낸 ‘민주주의’란 독특한 정치체제는 그들의 언어로 ἀγορά(agora-아고라)라고 불리는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아크로폴리스 아래에 위치한 아고라에 시민권을 가진 모든 남성들이 모여 ‘ekklesia’(에클레시아-민회)를 통해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 광장은 그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곳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 의해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사라진 후에도 광장 문화는 서양의 문명권으로 전파되었다. 그리스의 문화를 숭상했던 로마제국에 의해 민주주의란 정치체제의 알맹이는 빠진 채 광장이란 장소만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다.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광장이 만들어졌고, 멀리 산 계곡에서부터 시작된 수로를 따라 도심에 물이 공급되는 분수가 있는 곳이 또 광장이 되었다. 민주주의에서 시작된 광장은 민주주의가 사라졌던 2000여 년 동안에도 유럽의 문명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없었던 동양의 역사에서는 광장이라는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원(庭園)이라는 공간이 있고, 영암성(靈巖城)처럼 한 지역을 지키기 위한 성(城)이라는 공간이 있다. 사방으로 넓게 뚫린 서양의 광장과는 달리 동양에는 사방이 빙 둘러싸인 폐쇄적 공간이 존재하였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왕이 지배하는 전통을 가진 동양의 문화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양도 서양의 광장처럼 민의를 수렴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을마다 존재하였던 장터가 그런 역할을 하였다. 장터는 또한 시대의 전환기마다 큰 역할을 하였는데, 1894년 동학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기 위해 집결한 곳이 고부의 말목장터였고, 일제치하 기미년(己未年-1919년) 유관순 열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이 병천 아우내 장터였고, 석초 조극환(石蕉 曺克煥)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영암의 4.10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곳도 영암 오일장터였다.
광장문화와 함께 성장했던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중세시대까지 사장(死藏)되었다가 근대시대로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미합중국 독립선언(1776년)과 이후 미합중국의 건국으로 재생되었다. 이제는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 그들이 되살린 민주주의란 정체가 이식되었다. 우리나라도 미군정기(1945.9.16.-1948.8.15)에 민주주의란 정체가 도입되면서, 대한민국 헌법도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시작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과거 왕조시대와는 달리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임을 헌법에서 표방하고 있다. 국민의 여론에 따라 선출된 공직자들이 국민의 여론을 잘 살피며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탓에 정권을 가진 권력자들에 의해 민주주의란 정체가 왜곡되기도 하였다. 광장을 넓히는 등 광장문화가 활성화 되는 시기와 그렇지 못한 시기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흐름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1995년 6월 27일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해 지방정부 민선1기가 출범하였다. 과거 지방의회는 존재한 적이 있었지만 지방자치단체장까지 선출하기는 처음이었다. 지방자치는 소위 “민주주의의 완성” 또는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표현한다. 중앙정부에까지 5천만이 넘는 대한민국 국민의 여론을 속속들이 반영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되었던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김대중 정부에 의해 한층 강화되면서 그 틀을 다져왔다. 과거의 철학자들이 지적하였듯이, 민주주의는 국민과 그 지도자의 역량 또는 의도에 따라 부침(浮沈)이 존재해왔는데, 지방자치도 마찬가지였다. 광장이 있는 지방정부는 민의(民意)에 더 귀 기울일 것이고, 주민의 목소리가 지방정부의 정책에 더 반영될 것이다.
지난 11월 24일, 영암군청 앞에서는 “2022 YoungArm 젊은영암 페스티벌”이 펼쳐졌다. 600여 명 이상의 주민이 모여 흥겨운 자리를 가졌다. 비좁은 주차공간을 활용하여 주차에 어려움을 야기했다는 애로사항도 있었지만, 군청 앞 주차공간이 광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새로운 쓰임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군청 앞에서 진행되는 페스티벌에 대해 제안을 했을 때 군청 앞을 쉽게 내줄까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영암군 관계자들과 우승희 영암군수의 지지로 그날 하루 영암군청 앞은 광장이 될 수 있었다.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광장은 국민이 주인으로서 소통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주요한 핵심요소이다. 소통공간이 되는 광장이 상시적으로 열려 있어서 군민들의 의견이 군정에 반영되고, 군민들의 수준과 더불어 영암군이 발전해 나간다면, 영암 군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는 한층 높아질 것이고, 삶의 질도 또한 높아질 것이다. 영암군청 앞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장소로, 사지에 내몰린 영암골 백성들을 긍휼(矜恤)히 여겨 분연히 떨쳐 일어나 영암성을 지켰던 을묘년(1555년) 양달사 의병장의 왜적을 향한 고함이 울렸던 곳이다.
이제 광장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기가 되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하던 시절도 지났고, 이제는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하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 민주주의’에 가장 근접한 형태가 지방자치 제도일 것이다. 아테네 민의의 중심이 아고라(광장)였듯, 지방자치의 중심도 당연히 광장이 되어야 한다. 지금보다 더 넓은 공간이 기대되는 영암군청 앞 광장에서, 영암의 모든 기운이 꿈틀거리는 월출산을 바라보며 삼삼오오 모여앉아 영암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젊은 영암의 미래는 더욱 밝아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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