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공원에 대한 단상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3년 01월 06일(금) 13:14
이영현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영암학회 회장 소설가
영암군 공원 제1호인 영암공원은 본래 객사등이었다. 왕의 전패(殿牌)를 모신 객사(客舍) 건물 뒤쪽에 있는 구릉이라는 뜻으로, 아이들이 올라가 뛰어놀던 놀이동산이자 객사에 머물던 관리들과 영암군수 등이 이따금 올라가 한담을 나누던 휴식처였다. 「1953년 영암향토사」를 보면 김경남이라는 분이 1958년 10월 6일에 쓴 글에 객사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영암면소재지 아이들이 매일같이 올라가 놀던 놀이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필자는 졸작 소설 「바람벽에 쓴 시」에서 객사등에 소양루(小陽樓)라는 누각을 하나 설치해서 주요 무대로 활용한 바 있다.
하지만 객사등의 운명은 일제가 침략하면서 크게 변질되었다. 지난해 '영암군청이 동쪽으로 온 까닭은'(<영암군민신문> 11월 25일자)에서도 밝혔듯이,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이등박문에게 사죄를 하라는 지시에 의해 영암군이 사죄제단을 설치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놀이동산이던 객사등이 영암 군민들에게 치욕을 안겨주는 공간으로 변한 것이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객사등을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성역화했다. 1929년 5월 23일 일제 전범들이 합사된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하는 영암신명신사(靈巖神明神祠)가 설치된 것이다.
신사 설치 배경을 좀더 설명하자면, 본래 신사 설치는 1926년에 소화천황(昭和天皇)이 되는 히로히토(裕仁)가 1924년 1월 26일 결혼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조선 각지에서 황태자 결혼기념 사업들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영암군에서는 신사 설치 사업이 선정되었다. 1924년 2월 7일 전라남도지사가 총독부 식산과장에게 보고한 공문(국가기록원 관리번호CJA0010668)의 내용은 이렇다. 영암군 영암면에 사는 효도카즈오(兵頭一雄, 당시 29세) 외 조선인 30명은 황태자 전하의 결혼기념사업으로 영암신사를 설립하겠다면서 주변 국유림 3,801평을 신사의 경내로 활용할 수 있도록 을종요존예정임야(乙種要存豫定林野)로 처분해서 효도카즈오를 비롯한 6명에게 양여하여 달라고 하는데, 총독부의 의견이 어떠한가를 묻는 내용이다. 총독부에서는 1911년 산림령을 공포하고 국유림을 요존예정임야와 불요존예정임야로 구분하면서, 중요도에 따라 총독부 소관은 갑종요존예정임야로, 도지사 소관은 을종요존예정임야로 관리했다.
당시 효도카즈오 등이 양여받고 싶어한 땅은 현 군청 뒤편인 동무리 160번지와 영암읍 서남리 74번지. 하지만 임야의 관할권과 양여 문제 등이 원활하지 않았는지 이 사업은 몇 년이 더 경과한 후, 1929년 5월 22일 영암군청 이전 신축 기념식이 거행된 다음날에야 허가가 났다. 곧바로 효도카즈오와 구자경 영암군수 등은 객사등 정상을 지나가던 높다란 영암성의 성벽들을 허물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다 위풍당당하게 신명신사를 설치했다. 일본 천황의 조상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영암군청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영암군민들을 황국신민으로 지배하게 한 것이었다.
이 신명신사를 가장 좋아한 사람들은 영암심상학교 학생들이었다. 당시 영암면 소재지에는 영암보통학교 외에 일본인 자제들만 다니던 영암심상소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영암보통학교보다 다소 늦은 1909년 11월 13일 모가미토요타(最上豊大)가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영암성 안에 설립되었다. 1912년에는 현 서남리 공용주차장 부근에 건물을 지어 일본인 자녀(1938년 이후 조선인 학생도 일부 다녔다)들만 다니게 하였는데, 학생들은 영암신사 경내를 영암공원이라 부르며 벚나무도 심고 화초도 기르고 청소도 하였다. 해방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영암에서의 소중한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영암회를 조직하였고, 1984년 7월에는 '추억의 영암'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2017년 하정웅미술관에서 번역본으로도 발간한 이 책자 47페이지에는 신사에 참배하고 청소를 한 후 찍은 영암심상소학교 학생들의 단란한 모습과 도리(鷄居), 그리고 지금도 의연하게 서 있는 독립기념탑 옆의 커다란 소나무들이 보인다. 이케가미데이카(池上定可)라는 청년이 전쟁터에 출정하는 것을 기념한 장소도 영암신명신사인 것을 보면, 당시 영암신사의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해방이 되고 영암신명신사가 사라지면서 객사등은 오랜만에 군민의 품으로 돌아오는가 싶었다. 하지만 1959년에 영암군에서는 그 자리에 6·25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충혼탑을 세웠다. 1984년에는 동아일보와 영암군이 나서서 신사 참배객들이 손을 씻던 그 자리에 조극환 선생 등을 추모하는 3·1운동 기념탑을 건립하였고, 이후에도 추모비들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객사등은 다시금 추모공간으로 변했다.
1451년 영암성 완공 이후 500여 년 동안 동헌과 객사 사이에서 군민과 객사 손님들의 휴식공간이자 아이들의 놀이동산 역할을 했던 객사등. 밤이 깊도록 동산 위에서 시끄럽게 웃고 떠들었을 그 옛날의 정취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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