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봉(國師峰) 오르기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3년 04월 07일(금) 14:18
조정현 영암읍도시재생주민협의체 위원장 스마트영어학원(영암읍) 학원장
영암에서는 월출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국사봉에 오른다. 입석제(立石堤) 끝자락, 어진 사람들만 살았던 계곡이었는지, 어진골이라 이름 붙인 곳에서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며 가볍게 몸을 풀어본 후 출발이다. 해가 뜨는 쪽을 바라보는 몇 가구의 집들이 개울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동네를 지나니 감밭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금표(禁標)라 쓰인 안내석을 만난다. 햇볕이 나는 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덕에 금표는 세월의 풍화를 맞아 글씨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해어져 있다. 모 선배님의 식견 덕분에 고대 이집트 문자처럼 난해하게 변해버린 글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내게는 ‘로제타스톤’을 해독해낸 프랑스의 ‘샹폴리옹’보다 더 위대하다. 금표는 산자락 위에 자리한 쌍계사와 연관이 있을 텐데, 여기서부터는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오는 동네 사람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표식일 것이다. 이곳 어귀에서 땔나무 한 소쿠리 지고 오다 감시인들과 실랑이를 벌였을 촌부들의 모습이, 어렵사리 얻은 땔나무로 저녁을 짓기 위해 집집마다 아궁이에 지핀 불로 내려앉은 연하(煙霞)가 동네를 싸고 있었을 모습이 그려진다.
넓은 둠벙으로 이어지는 마을길을 뒤로 한 채 산행길로 접어든다. 산길이지만 졸졸 흐르는 계곡을 따라 길은 이어진다. 자잘 자잘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우뚝 선 돌덩이(立石)와 마주 선다. “고놈 참 힘차게 생겼네!” 하며 물이 흐르는 개울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여성을 닮은 세 조각의 돌덩이가 놓여있다. 물이 흐르는 곳에는 음문의 혈(穴)이 퍼즐 조각처럼 놓여있고, 계곡물 옆 마른 땅에는 거대한 양물(陽物)이 놓여 마치 음양의 조화를 설명해 놓은 듯하다. 도올 선생이 유튜브를 통해 강의하던 ‘도덕경’ 속 한 구절, ‘도법자연’(道法自然)이 퍼뜩 떠오른다. ‘도란 스스로 그러한 것을 본받는다.’ 우주의 모든 조화도 음양의 조화에 따라 스스로 이뤄지듯이, 도(道)란 스스로 그러한 것을 따라 이뤄진 것이다. 억지로 쥐어짜는 것들로는 자연의 조화를 지어낼 수 없음을 설명이라도 하듯이, 덩그렇게 그리고 고요히 ‘음양의 돌’들이 그곳에 놓여있다.
쌍계사 터가 가까워지니 어지러운 대나무가 길을 막는다. ‘달빛 아래 먼지도 일지 않게 섬돌을 쓰는 대나무’(竹影掃階塵不動)를 옛 고승은 귀히 여겼는데, 그 귀함을 하찮은 중생들이 길을 트기 위해 밀치고 가니, 옛 고승은 ‘중생들이 푸릇한 대를 조아리게 한다’(衆生使靑竹叩頭)고 다시 노래해야 할 듯싶다. 몸을 이리저리 수그리며 한참을 올라가니 벙거지를 쓴 석상 두 개가 마주 보고 서 있다. 쌍계사지 앞에 있는 석장승 한 쌍이다. 오른쪽은 당장군(唐將軍)이요, 왼쪽은 주장군(周將軍)이다. 낡은 안내판에 의하면, 나주 운흥사와 불회사의 석장승과 비슷한 시기인 18세기 초·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왜 갑작스레 그 시기에 당장군, 주장군이란 글귀가 새겨진 석장승들이 세워졌을까?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자면, 민초들의 삶이 무너져 내린 임란과 병란을 겪은 후, 조선의 장수들을 불신하며 중국의 장군(당나라, 주나라)들이 그들을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을 표했을 것이라 여겨본다. 마주 보고 서 있는 석장승을 바라보며 노곤했던 조선 민초들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고찰의 터와 어울리지 않는 당장군, 주장군을 뒤로 한 채 조금 더 올라서니 이제야 옛 절의 기품을 보여주는 안내자가 등장한다. 길 양쪽에 서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산객을 반긴다. 지주 뒤편에 건륭기미(乾隆己未)라 새겨진 글귀가 보이는데, 청조 건륭제 기미년(1739년)을 의미한다. 사찰 터에 남아있는 거의 모든 지주가 그러하듯, 당간은 간데없고 받치고 있던 기둥만이 서 있다. 홀이 두 개씩 있는 아담한 지주의 높이로 보아 산사 입구 오솔길에 어울리는 적당한 크기의 지주가 서 있었을 것이다. 본당 앞터가 넓었으면 본당 앞 도량에 자리하였을 텐데, 절 이름(雙溪寺)처럼 두 개의 계곡 사이 좁은 터에 자리하느라 당간지주를 밑으로 자리한 듯하다.
이어 나오는 절터는 쌍계사지(雙溪寺址)로 후기 신라시대인 문성왕 16년(서기 854년)에 백운대사에 의해 수남사(水南寺)로 창건되어,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쌍계사(雙溪寺)로 바뀌었고, 고려 원종 4년 승아국사(僧阿國師)의 중창(서기 1263년)으로 덕룡사(德龍寺)로 바뀌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다시 쌍계사로 그 이름을 이어왔다. 이 고찰은 도선국사(道詵國師)와 승아국사(僧阿國師), 두 분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곳이다. 국사봉의 유래이다. 그러나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은 돌로 쌓아 올린 터와 지금은 층층이 나무가 그 자리를 차지한 작은 무지개다리(虹橋)를 제외하고는,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도량 어딘가에 부처님을 모신 곳이 있었을 것이고, 삼층석탑 하나 정도는 하늘 향해 우뚝 서 있었을 텐데,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당대의 이름은 모두 세월에 씻겨가 버리고, 이제는 도량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폐사지가 되어버린 절터를 보면서, 부처님이 일갈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다시금 새겨본다.
절터를 찾아 올라오는 길은 선조의 지혜가 담긴 ‘독다리’도 쉬엄쉬엄 건너며 여유로운 산책을 즐겼지만, 절터를 뒤로하고는 오르막 산행의 시작이다. 뒤로 쳐지기 시작하는 동행인을 위해 숨을 고르며 기다려주고, 격려도 한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인생사처럼,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하는 산행도 함께 가는 동행길이다.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하며 고개 돌려 뒤를 돌아보니, 풍력발전기가 새로운 산세로 바뀐 지 오래인 활성산 자락이 펼쳐진다. 풍력발전기 이후 최근에는 태양광 발전 장비가 활성산의 지붕까지 덮어버렸다. 저곳이 과거 전국에서도 그 규모를 자랑하던 천혜의 목장이었음을 지나가는 산객들은 이제는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산마루에 알알이 박힌 인공구조물 너머로 영암의 자랑인 월출산이 펼쳐진다. 언제 보아도, 어디에서 보아도 반가운 영암 월출산이다. 국사봉 정상은 한두 발짝을 건너면 장흥땅에 서게 되는 군(郡) 경계지역이다. 동편으로는 이름 모를 봉우리들이 이어진다. 북동쪽으로는 무등산이 솟아있고, 시선을 좀 더 동쪽으로 돌리면 지리산 자락이 춤을 추듯 멀리 이어져 있을 것이다.
세월의 풍파에 안내판 하나 없이 세상에 잊힌 쌍계사, 친환경 에너지원이라는 미명 아래 쇠말뚝에 박혀 신음하는 활성산, 영암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며, 질곡의 역사를 담고 있는 국사봉을 생각하며, 흐르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하산한다. 쌍계사에 안내판 하나를 달아주는 일, 활성산 남아있는 공간으로 캠핑족들이 다시 찾아와 멋진 풍경을 담아내 영암을 알리게 하는 일, 아담하지만 오르는 굽이굽이 계곡길이 정겨운 국사봉을 많은 사람들이 찾게 하는 일 등등, 앞으로 우리 영암군이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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