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달사 장군은 수군 첨절제사 출신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3년 04월 07일(금) 14:28
윤광제 언론인 예비역 육군 소령 미암면 출신
향토사를 공부하다 보면 궁금했던 우리 지역의 이야기의 빠진 조각이 인근 지역 이야기를 통해 맞춰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 소개할 양달사 장군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익히 알다시피 1555년 발발한 을묘왜변에서 조선 최초의 의병장으로 활약한 양달사 장군(1518~1555)은 우리 영암의 자랑이다. 양 장군은 1537년 20세에 무과 급제를 했고, 1546년(29세) 중시에서 좋은 성적으로 거둬 전라병영우후와 진해현감, 해남현감 등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현감을 지냈다고 하더라도 직급도 그리 높지 않고, 앞서 무과에 급제했다고 설명했지만 시묘살이를 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살짝 문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현감은 조선시대 지방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고, 품계도 종6품 외관직으로 종5품 현령보다 작은 고을의 원님이었다. 그런 그가 의병장이 되었다니 뭔가 경력이 빈약해 보인다. 물론, 그만큼 젊었으니 패기가 왕성했을 것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경험 부족에 대한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현재 필자는 완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지역의 역사문화에 대한 자료를 접할 기회가 많다. 우연히 완도 향교에 방문했다가 <가리포진 첨사 선생안>(이하 선생안)이라는 책자를 보게 됐다.
이 선생안은 역대 가리포 첨사의 명단이 적혀 있는 책자로 1522년(중종 17) 초대 첨사 이반부터 228대 이범규 첨사까지 기록돼 있다.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군사편재가 바뀌면서 1895년 을미개혁으로 전국 수군진은 폐진됐고 당연히 이후 기록은 없다.
그 선생안에 ‘梁達泗 堂下 貶下 遞 在靈巖(양달사 당하 폄하 체 재영암)’라는 문장이 있다. 즉, 양달사 장군은 가리포 첨사로 근무한 당하관으로 근무평정은 하를 받아 체직(직을 바꿔 다른 부서로 보내다)됐으며, 영암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출전 : 완도문화원, 국역 가리포진). 선생안을 보면 양달사 장군은 16대 첨사로 부임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양 장군의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자는 도원(道源), 호는 남암(南岩)이다. 감역(監役) 양흥효(梁興孝)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주부(主簿) 양승조(梁承祖)이다. 문인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 아버지의 팔촌 형제이다.
또, 군청 홈페이지를 보면 ‘장군은 1537년(중종 32)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546년(명종 1)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전라 좌우 우후(全羅左右虞侯)와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역임했다. 1553년(명종 8)에 남해 현감으로 부임하던 중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1555년(명종 10)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았다. 젊은이들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연회를 벌여 왜군들이 참관하는 사이에 의병과 관군이 함께 공격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전열을 가다듬고 재차 공격해 오는 왜군을 진흙땅으로 유도하여 다시 크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상을 당한 사람이 전쟁에 나간 것을 부끄러워하여 공을 관군에 돌리고 돌아와 시묘살이를 계속하다 사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다. 완도 향교에서 고이 보관 중인 ‘가리포진첨사 선생안’에 양달사 장군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군청 홈피에는 진해현감과 해남현감으로만 표기가 돼 있다는 점이다. 번역상 오류는 없었는지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편 생소한 수군진 이름이 가리포진이다. 가리포진은 전라우수영 관할의 수군진으로 위치는 지금의 완도이다. 1522년 전까지는 완도에 수군진이 없었다. 당시 왜구의 주요 침입로는 五島(고시마), 三島(미시마), 청산도, 고금도, 가리포(완도)를 거쳐 해남, 강진으로 쳐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왜구는 청산도를 1차 거점으로 삼고 2차 완도에 상륙해 곧이어 강진과 장흥, 해남 등을 공격하는 방식을 취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완도가 수군 전략 요충지라고 판단하고 1522년(중종17년) 완도에 가리포진이라는 새로운 수군진을 설치했던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가리포진은 1522년 설진됐다가 1894년(고종31)에 폐진될 때까지 371년 동안 첨사 226명이 가리포진에서 근무했다. 이중 첨사 2명이 2번 근무를 했기 때문에 실제 228대 첨사를 배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첨사는 첨절제사의 준말로 절도사의 바로 아래 무관직이며, 지방의 여러 작은 진을 지휘하는 거진(巨鎭)의 최고 지휘관이다.
이 가리포진은 휘하에 4개의 만호진이 있었는데, 회령포, 마도, 어란, 남도포, 금갑도의 수군진을 관장했다. 이후 회령포진은 좌수영으로 속하게 되고, 고금도에 고금진, 신지도에 신지도진, 해남 북평에 이진진이 설진된다. 첨사의 품계는 종3품, 만호는 종6품이며 가리포진은 전라우수영 내 수군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방어지역도 넓은 곳이었다.
즉, 우리가 알던 양달사 장군은 종6품 현감 출신이 아니라 종3품 첨절제사를 했던 분이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도 조선시대 임명직 특성상 임금의 명령에 따라 정읍 현감을 거쳐 수군통제사로 고속 승진을 했다가 백의종군을 하기도 하듯이 양달사 장군도 종3품에서 종6품으로 강등당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 우수영지역 군선 현황을 보면, 고군산진의 경우 19세기에 이양선이 서해안에 출몰하면서 병선과 전선 도입의 규모가 커졌다. 이는 19세기 전장 상황 변화로 이뤄진 현상이며 그 이전에는 을묘왜변의 영향으로 현재의 완도 지역인 가리포진이 주요 거점으로 활용됐다.
가리포진은 명장 배출의 산실로 유명한데, 임진왜란의 주역이었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정걸, 구사직, 가리포 첨사 이응표, 이영남 등이 모두 가리포진 첨사를 지냈다.
현재까지 기록으로는 이순신 장군, 정걸 장군의 가리포첨사 경력이 누락돼 있으나, 지역 향교에서 보관하던 서류의 그 기록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첨사 선생안이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면 양달사 장군에 대한 평가 또한 재조명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최초의 의병장이라는 상징성도 재평가가 필요하다.
군민의 단결된 힘으로 만들어낸 영암성 대첩은 오는 5월 11일 영암성대첩기념식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아직 그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셨던 군민들도 애향심을 고취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
한편 이런 국난 극복의 역사는 후에 수군 전선이 맹선(猛船) 체제에서 판옥선(板屋船) 체제로 변경되는 역할을 했으며 이 판옥선이 임진왜란 승리의 결전 병기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는 ‘소는 잃었어도 반드시 외양간을 고치는 후속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가리포진 첨사 선생안. 좌측에서 5번째가 양달사 장군의 이력이다.
가리포진 첨사 선생안. 좌측에서 5번째가 양달사 장군의 이력이다.
완도문화원에서 가리포 객사에서 망궐례를 하는 모습(완도문화원 제공).
완도문화원에서 가리포 객사에서 망궐례를 하는 모습(완도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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