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찬열의 산티아고 순례길 2천리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2023년 04월 14일(금) 11:58 |
2천리 길을 함께 걸어갈 신발. 그리고 베낭 |
기차에서 내려 아내와 함께 배낭을 짊어지고 순례자 사무실로 향했다. 순례자 50여명이 함께 걸어간다. 땅거미 지는 거리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순례자 증서(La Credencial)를 발행해주고 있다. 증서가 있어야만 순례자 숙소에 머물 수가 있다.
사무실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서 한국인 몇 명이 보여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젊은이 너댓 명과 서울에서 왔다는 한 부부다.
골목 여기저기 알베르게 간판이 걸려있다.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를 위한 숙소다. 출발하기 전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어두었지만 비가 오고 날이 저물었는데 여기저기 찾아다닐 형편이 아니다. 우선 가까운 집의 문을 두드리니 마침 방이 있다고 한다. 아침식사 포함 1인당 20유로란다. 30달러 정도다. 한 방에 여섯 명씩 잔다며 안내하는데 2층 침대 3개가 놓여있다.
배낭을 놓고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갔다. 술집에는 젊은이들이 어울려 왁자지껄하지만 음식점은 문을 닫았다. 피자집 간판이 보여 들어갔다. 파리 몽파르나르역에서 역무원이 영어가 통하지 않아 좀 애를 먹었는데, 이 집도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넵킨을 달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 한다. 피자 작은 거 하나에 12유로, 작은 맥주 한 병에 2유로를 받는다. 문 닫는 시간이 가까워오는지 서두르는 성싶어 우리도 서둘러 먹었다.
순례자 사무실에 들어가 날씨를 물어보았다. 그렇잖아도 날씨 안내를 하고자 이렇게 앉아있다며 인터넷 일기예보를 보여준다. 내일 눈이 많이 내릴 것이란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건 위험하니 골짜기를 따라 아래쪽 길을 택하라고 당부한다. 한 달 전 산을 넘던 순례자 한 명이 눈보라 속에 길을 헤매다 목숨을 잃었다고 덧붙인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이 산티아고 길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대여섯 개의 산티아고길 중에 이 프랑스 길을 택한 것은 피레네를 넘고 싶다는 아내의 의견을 따른 때문이었다. 아내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하다. 빗소리와 함께 밤이 깊어간다.
#순례길 첫째 날(4월 27일) - 피레네산 넘어 론센스바예스(Roncesvalles)도착 27㎞ 걸음
순례길 첫 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직 어둡다. 빗방울이 창문을 때린다. 식당에 아침이 준비되어 있다. 식사래야 빵 몇 조각과 우유가 전부다. 긴 탁자에 둘러앉아 순례자들과 아침을 먹으면서도 날씨가 화제다. 영어가 공통어다. 영어가 되지 않는 사람하고는 소통이 되지 않는다.
스틱을 기내에 휴대할 수 없다고 하여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구입해야만 했다. 마침 바로 건너편이 스포츠용품점이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주인남자에게 날씨가 좋지 않아 피레네 산을 넘기가 어렵다고들 한다고 운을 떼자, “이 정도 날씨면 괜찮을 거라며 한 번 넘어가 보라”고 한다. 아내가 "그렇지요." 한 마디 거든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주인에게 스포츠용품점 주인의 얘기를 전했더니, “그 사람 참 무책임한 사람이네요, 사고 나면 그 사람이 책임진다고 합디까?” “목숨이 하나니까 알아서 하시라”며 말문을 닫는다. 집에서 가져왔던 “산티아고길 안내책”을 이곳에 들를 한국인이 읽을 수 있도록 놓고 가겠다고 했더니 주인이 흔쾌히 받아준다.
아침 7시30분, 배낭을 둘러맸다. 침낭과 간단한 옷가지, 꼭 필요한 일용품만 넣었지만 만만찮게 무겁다. 500마일, 800킬로미터 여정, 그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이 길은 예수 열두 제자 중의 한 분인 야고보 성인의 행적을 기리는 길이다. 산티아고(Santiago)는 성(Saint) 야고보(Diego)의 합성어다. 천년이 넘는 오래된 순례길로 로마, 예루살렘과 더불어 세계 3대 순례길로 불린다. 매년 17만여명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를 향하는데 종교와 관계없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가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세진 학생이 함께 가자며 따라붙는다. 어제 기차에서 만났던 젊은이다. 대학생인데 금년 7월에 입대를 하게 되어 있어 그 전에 산티아고 길을 걷고 싶어 왔다고 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순례객들이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다. 오래된 이층 돌집들 사이로 벽돌을 박아 만든 길이 나 있다. 이 거리는 몇 백 년이나 되었을까. 길이 사람들의 발자국에 반질반질 닳았다. 제법 가파른 골목길이 빗물을 받아 번들거린다. 순례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낯선 얼굴들끼리 아침 인사를 나눈다.
우장을 둘러쓴 사람. 비옷을 입은 사람, 그리고 작은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도 보인다. 우장을 둘러쓴 사람은 배낭이 불쑥 튀어나와 곱추 같은 모습으로 뒤뚱거리며 걸어간다.
오늘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땅 론센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걸어갈 예정이다. 어제저녁 순례자 사무실에서 들었던 얘기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시가지를 벗어나니 삼거리가 나왔다. 윗길과 아랫길이 갈라지는 곳이다.
순례자들이 골짜기길을 택하고 있다. 어느 길로 가야하나. 아내가 “피레네 산맥을 넘고는 싶지만 당신이 결정한 대로 따르겠다”고 한다. 세진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눈 속에 길을 헤매다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하나뿐인 목숨”이라는 알베르게 주인의 말도 생각난다. 목이 탄다. 생사의 갈림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병을 꺼내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레테의 강물이었을까. 조금 전 떠올랐던 얘기들을 까마득히 잊었다. 두 사람이 내 입을 바라보고 있다. 잠깐, 외롭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결단을 내렸다. “그래, 피레네 산맥을 넘자”
셋이서 비를 맞으며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세게 분다. 고개를 바로 들 수가 없다. 병사를 몰아 눈보라 속에 이 길을 넘었던 나폴레옹처럼, 산초 판사를 대동하고 준마 로시난테를 몰아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돈키호테처럼, 두 사람을 앞세우고 피레네 산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비가 주춤한다. 산 중턱에서 숨을 돌렸다. 산 아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골짜기는 골짜기대로 등성이는 등성이대로 푸르다. 능선을 따라 산이 넘실댄다. 골짜기에 안개가 피어오른다. 산꼭대기까지 조성된 풀밭에서 소와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평화롭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길이 가파르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비가 눈으로 바뀐다. 앞뒤를 살펴보아도 걷는 사람은 우리 셋뿐이다. 눈보라가 몰아친다. 두 시간 남짓 걸었을까. 길가에 카페가 보였다.
들어가 차 한 잔을 마시며 앉아있는데 세 사람이 눈을 털면서 카페로 들어온다. 우리보다 두 시간 먼저 출발한 분들인데 눈바람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되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다른 그룹 3명이 들어왔다. 오늘 피레네 산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같은 처지에 놓인 아홉 사람이 의논을 했다. 택시를 불러 타고 아랫길로 내려가, 거기서 론센스바예스를 향해 걷기로 했다. 카페주인에게 부탁하여 택시를 불렀다. 작은 승합차여서 뒤쪽 짐칸에 네 사람이 쭈그려 앉았다. 20여분 택시를 타고 골짜기 길로 내려왔다.
그런데 우리를 길가에 내려놓은 택시 운전사가 택시비를 받지 않으려한다. 돈을 주려고 했지만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렇다면 이름이나 알자며 이름을 물었지만 “부엔 까미노(좋은 순례길 되세요)”라고 인사를 던지더니 수줍게 웃으며 도망치듯 떠나 버린다.
세상에 이럴 수가! 지나가는 택시를 손들어 세운 것도 아니고, 전화를 받고 산중턱까지 손님을 실으러 온 영업용 택시가 돈을 받지 않다니. 이름 남기는 것조차 거절하다니. 길가에 선 우리들 아홉 명은 그가 사라진 쪽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는 ‘천사’일 거라며 누군가 혼자 중얼거렸다.
40대 중반쯤의 해맑게 웃던 운전사의 모습이 생생하다. 나뿐만 아니라, 택시를 타고 갔던 아홉 사람에게 그 운전사는 산티아고 길과 함께 오래오래 기억될성싶다.
길을 걸어가면 발자국이 남는다. 우리가 살아온 길도 되돌아보면 제각기 걸어온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우개로 박박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도 있고, 생각하면 할수록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는 아름다운 추억도 있다.
개가 달려가면 매화꽃이 떨어지고(拘走梅花落), 닭이 걸어가니 댓잎이 돋아난다(鷄行竹葉生). 눈 덮인 마당 위에 생겨난 개의 발자국을 매화꽃이라 부르고, 닭의 발자국을 댓잎이라 표현한 옛 시 구절이다.
개가 달려가면 매화꽃잎 떨어지듯, 산티아고길 운전사처럼 살아온 길목에 꽃을 피워내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겼을까. 그리고 어떤 무늬를 남길 수 있을까, 궁금하다.<다음호에 계속>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