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비문화원과 함께 하는 정자(亭子) 이야기 - 영암 죽림정(竹林亭)

현징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해 '就陰亭'을 옮겨 지은 정자 문곡 김수항이 죽림정 命名

이순신 장군이 사헌부지평 현덕승에 보낸 "若無湖南是無國家"문구 실린 편지 등 보존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3년 06월 02일(금) 14:25
현대인에 낯선 단어 중에 '누정(樓亭)'이 있다. 누각과 정자를 포괄하는 용어로, 조선시대 유교 문화가 낳은 사대부들의 지적 교류의 공간이다. 대개 덕망이 있는 향촌 인물이나 정계에서 물러난 후 향리에 내려온 인사들이 소요, 은둔, 교류, 강학 등에 활용하기 위해 풍광이 좋은 곳에 지었다.
죽림정(竹林亭)은 현덕승씨 조카인 현건의 손자 현징(호는 죽림 1629~1702)이 1678년(숙종4)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해 지은 정자다. 정자의 원형은 내동리에 있던 취음정(就陰亭)을 현징과 종형이 이축했다. 대나무로 둘러싸여 '죽림유거'라고도 했는데, 취음정을 지금 자리에 옮겨 지은 현징(1629~1702)이 영암에 귀향 온 문곡 김수항에게 정자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했다 한다.
건립연대는 상세하지 않으나,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 귀양길에 들러 현약호를 위해 '삼벽당(三碧堂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 세 가지를 뜻함)'이라는 당액(堂額)을 써주었다고 하며, 문곡 김수항의 죽림정기가 1678년(숙종4년)에 쓰인 것으로 보아 이 연간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네 기둥에 활주가 받쳐져 있다.
현 건물은 40여년 전에 들보만 개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건립연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연주현씨 대동보 기록과 죽림정이라는 송시열의 편액, 죽림정기가 모두 1678년에 써진 것으로 보아 이 연간으로 추측한다.
■ 죽림정 당액 및 죽림정기 = 현징의 아들 현약호(1665-1709)는 삼연 김창흡을 찾아가 삼벽당기를 받아온다. 아버지 현징이 삼연의 아버지 문곡에게 죽림정기를 받았으니, 아들인 현약호가 문곡의 아들 삼연에게 삼벽당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에서였다.
그 당시 삼연 김창흡은 아버지 문곡 김수항이 기사환국으로 두 번째 유배지 진도에서 사사(賜死)된 지라 벽계(壁溪)에 은거하고 있었지만 삼벽당기와 삼벽당 시를 써 주었다. 삼벽당 당액은 우암의 글씨다. 안타깝게도 삼벽당은 사라지고 없다.
苦竹與松柏(참대와 소나무 그리고 잣나무)
不曾桃李顔(복숭아꽃이나 배꽃과 다르지만)
知君三碧號(푸른 세 가지 삼벽이라는 이름 알고 나니)
用意雪霜間(눈서리 내려도 그 뜻은 푸르다)
죽림정에 들면 이순신 장군이 군자주부(軍資主簿, 從5品) 현건에 보낸 4통의 편지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正5品) 현덕승(1564~1627)에 보낸 3통의 편지가 빼곡하게 붙어있다. 현건의 삼촌뻘인 연주현씨 14세손 현덕승은 병예조정랑과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여러 편지 중 이순신 장군이 현덕승 지평에 보낸 한 통의 편지는 잘 알려져 있다. "若無湖南是無國家(만약에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진영을 한산도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현약호의 자는 흠보(欽甫), 호는 삼벽당(三碧堂), 본관은 연주(延州)로, 현미의 아들인데 백부 현징의 후사로 들어갔다. 전라도 영암 월출산 서쪽 구림리(鳩林里)에서 살았다.
김수항이 김창협이 25세 때인 1675년(숙종1) 7월 영암에 유배돼 영암군청이 있던 근처에 풍옥정을 짓고 살았는데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동갑 친구인 현징의 권유로 구림에 옮겨 귀양살이하던 3년 동안 현징의 집에서 묵었다. 김창흡 등 여러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를 뵈러 자주 왕래하면서 현씨가문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삼벽당(三碧堂)은 세 가지가 푸른 집이라는 뜻으로, 현약호가 자기가 살고 있는 구림의 사시사철 푸른빛을 띠고 무성하게 자란 참대와 소나무, 잣나무의 의미를 취해 붙인 호다.
■ 죽림정 편액 건립 이력 = 죽림정은 현징의 누정이라고는 하지만 문곡 김수항과 관계가 매우 깊은 곳이다. 김수항(1629~1689)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현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사람이다.
죽림정의 편액 양각, 자작 죽림정기 편액 음각, 죽림정십영(竹林亭十詠) 등 3편을 1678년 죽림정에 손수 걸었다.
우암 송시열(1607~1689)도 빼놓을 수 없다. 숙종조 2차 예송(1675년)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남향에 유배됐고, 김수항은 영암에 유배(1676~1679)돼 죽림정에서 살다가 1680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1689년 기사사화로 송시열은 제주도, 김수항은 진도로 유배 가던 도중 서로 만나기 위해 죽림정에 잠시 머물렀다.
이때 송시열은 현약호를 위해 삼벽당(三碧堂)이란 당액(堂額)을 써 현약호의 집에 걸게 하고 崇禎己巳二月日(숭정기사이월일)이라 써서 표가 나게 했다. 지금 죽림정 안쪽 종손 현삼식의 집에 걸려있다.
이밖에 조선 중기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몽와 김창집(1648~1722)의 작시 편액 음각 1편, 조선 중기 학자로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농암 김창협(1651~1708)의 1696년 작시 편액 음각 1편, 조선 중기 학자로 이조판서를 지낸 삼연 김창흡(1653~1722)의 1684년과 1689년 작시 편액 음각 2편, 1681년 진사가 되었으나 관에 나가지 않고 서울 강북구 장위동에서 전원생활을 했으며 당대에 시문과 그림이 뛰어나 화양서원에 모신 우암 송시열의 화상을 그렸고, 겸재 정선의 그림 선생이었던 노가재 김창업(1658~1721)의 연대 미상의 작시 편액 1편도 남아있다. 또 김수항의 손자로 이조판서 겸 제주(祭主)에 추증된 노천 김신겸(1693~1738)의 1730년 작시 음각 편액 1편, 효헌 송흡의 임자년 작시 음각 편액 1편,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오산 이식(1643~1700)의 1681 신유(辛酉)년 작시 음각 편액 2편, 동천 김철호 전 영암군수의 작시인 죽림정 차운 음각 1편, 취석 전석홍 전 전남도지사의 작시 죽림정 차운 음각 1편 등 모두 14편의 편액이 죽림정에 보존되어 있다.
■ 문곡 김수항의 영암 유배과정 = 숙종 1년 1674년 효종과 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이자 인선왕후의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또 한 차례 논쟁을 벌였다.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제왕가를 높이 받들고자 했던 남인은 기년복(1년)을 주장했지만, 왕과 사대부가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서인은 대공복(6개월)을 주장했다. 대공복으로 하면 현종의 아버지 효종이 서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숙종은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암 송시열을 덕원으로, 문곡 김수항을 영암으로 유배 보냈다.
1675년 영암에 유배 온 김수항은 구림마을 대숲가에 대나무 집을 지었다. 바람에 부딪히는 대숲소리가 마치 옥 구르는 소리 같아서 풍옥정(風玉亭)이라 했다. 현건의 손자 현징이 숙부의 허물어진 별장 취음정을 옮겨 짓고 정자 이름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자 문곡은 중국 죽림칠현에 비유해 죽림정이라 이름 짓고 죽림정기를 써 주었다. 문곡의 셋째 아들 삼연 김창흡은 시를 짓고, 넷째 아들 노가재 김창업은 죽림정 당액을 썼다.
■ 현씨 일가와 학파농장 일군 현준호 = 현재 죽림정 일대는 대나무숲이고, 바닥에 고운 모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상대포까지 물이 들어 왔으므로 인근은 해변가로 추정된다. 죽림정에는 숙종이 약으로 쓰라고 하사(나주 20그루)한 회화나무와 황경나무가 남아있다.
현씨 일가에서 작은아들들은 광암으로 분가, 현재 현씨 자손이 많이 살고 있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거부 현준호의 손녀다. 학파농장을 일군 현준호는 동경 메이지대학(明治大) 법률학과를 졸업했으며, 1919년 호남은행을 세워 영세상공인을 보호하는 한편, 그 이익금으로 가난한 영재들을 골라 장학사업을 펼쳤고, 창씨개명에 끝까지 반대할만큼 민족정신이 강했다.
1929년 광주학생의거 때는 구속학생 석방과 구명운동에 앞장선 선생은 1933년 미암면 춘동에 100정보의 농지를 간척했고, 오늘날까지 구림사람들이 생활터전으로 삼고 있는 학파농장을 간척해 영세농민의 생활안정에 기여했다. 해방 후 학파농장을 둘러싼 지주와 소작인들의 토지 소유권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24년 부친이 별세하자 뒤를 이어 전라남도 평의회원이 됐으며, 1930년 중추원(中樞院) 주임 참의가 됐다. 1933년과 1936년 다시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고 농토를 확장하기 위해 1933년 춘동 간척사업, 1939년 서호 간척사업을 벌였다. 1923년 민족교육과 민족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한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이 일어나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위원장, 광주서중학교 및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설립의 핵심적 인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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