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하나 얻는 일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3년 08월 11일(금) 14:58

정찬열 군서면 도장리 출신

“내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 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1학기 말 68명 중 꼴찌를 했다. 고향에 가는데 어린 마음에도 부끄러운 성적표를 내밀 자신이 없었다.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유학 간 아들이 왔는지라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배” 했다. 친지들이 “자식 하나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했다.
당시 우리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들어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 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내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요...”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물을 수가 없다.“
전(前) 경북대 박찬석 총장의 이야기다. 이 글을 읽고 나서 한동안 먹먹했다.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려고 입을 떼는 아들에게 “그만해라, 민우가 듣는다”면서 끝까지 아들을 감싸주었다.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다는 박 총장의 아버지가 거인처럼 느껴왔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길은 진실로 그의 입장이 되어주는 데 있다. 성적표를 고쳐 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놈아, 내가 모를 줄 알고 이따위 짓을 해!” “애비가 무식하다고 너까지 무시하는거냐!” 하면서 몰아세우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성적표를 고쳐왔을까, 하고 전적으로 아들의 편이 되어주었다. 쓰리고 아린 속을 감추고 재산목록 1호였을 돼지를 잡아 1등 했다는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그렇게 잘못을 뉘우치게 했고, 아들의 마음을 얻었다. 병사는 자기를 믿어주는 장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듯이, 믿어주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은 마음을 바로 세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세상만사 마음 하나 먹기에 달렸다는 말처럼 사람이 마음을 굳게 세우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에 보낸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잘 자라주었다.
마음을 얻는 일이 세상을 얻는 길이다. 자식을 얻고, 배우자와 친구, 그리고 동지를 얻는 길이다. 믿음이 굳건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더라도 머잖아 돌아온다.
마음 하나 얻는 일, 마음 하나 바로 세우는 일.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새삼스럽게 생각해보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