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테가(Ortega) 지나 아따뿌에르카(Atapuerca)까지 30.2㎞

"알베르게는 만원 시오리를 더 걸어 문화인류학의 혁명 아따뿌에르까에서 자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3년 08월 11일(금) 15:06
아침 7시20분 출발. 어제 저녁 먹고 남았던 감자로 아침을 때웠다. 그리고 몇 개 남은 라면은 김 사장과 내 배낭에 나누어 넣었다. 작은 도시의 웬만한 가게에서는 라면을 구경하기기가 어렵다. 벌써 열흘째 김사장 부부와 함께 걷고 있다.
한 시간여쯤 걸었을까. 멀리 바위산이 보이는데 큰 구멍들이 여러 군데 뚫려있다. 종탑이 뚜렷이 보인다. 바위동굴을 이용해 세운 성당이다. 천혜의 장소다.
바람이 만만치 않다. 어제 만났던 혜린 학생이 의자에 앉아 무언가 기록하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 출발했는가 보다. 옛날 집이 쓰러져가는 그대로 방치되어있다. 저대로 관광자원이다.
좀 쉬었다가 다시 걸어가는데, 앞서가는 혜린이 걷는 모습이 좀 불안정하다. 가만히 보니 배낭을 잘못 맸다. 김 사장이 불러 세워 어깨끈을 줄여주고 허리띠도 조정해 준다. 따로 놀던 배낭과 몸이 착 달라붙어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며 녀석이 환하게 웃는다. 배낭하나를 제대로 매면 필요 없는 고생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
바람에 밀려 비야프랑까(Villafranca) 마을까지 왔다. 중년 남자가 애초기로 풀을 베어내고 있다. 집에 잡초가 길어나면 풀을 깎고, 청소를 하고 집안 단속을 하고….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저렇게 어디나 비슷하다.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의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부터 산길로 접어든다. 오카(Oca) 산이다. 옛날에는 이 산 숲이 빽빽해서 산도적 떼와 사나운 짐승들 때문에 순례자들이 두려워했던 곳이란다. 지도를 보니 다음 마을 오르데카(Ortega)까지 12㎞가 넘는다. 중간에 마을이 없으니 물이랑 먹을 것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떡갈나무 숲이 우거진 한적한 길을 두 시간쯤 오르락내리락 걸었다. 독일에서 왔다는 한 남자가 길가에 서 있다. 도와줄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먼저 가란다. 아내가 볼일 보러 갔는데 기다려야한다며 픽 웃는다.
산꼭대기에 십자가가 세워져있다. 유골 발굴 현장 사진을 포함하여 꽤 긴 설명을 해놓은 걸 보니 전쟁이나 내란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묘지인성 싶다. 그런데 스페인어로만 되어있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영어로 된 안내판도 함께 마련해 놓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침 한 순례자가 비석을 자세히 바라보기에 무슨 얘기나고 물었더니 설명을 해준다. 스페인어와 영어를 할 줄 아는 분이다. 스페인 내전(1936~39년)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거란다.비문은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살인행위는 헛된 짓이었다."라고 씌어 있다고 했다.
근처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쉼터래야 테이블 몇 개를 마련해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행복하다. 우리도 테이블 한 개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까 만났던 독일인 부부가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 길을 걷다가 만나면 이렇게 금방 친구가 된다.
다시 길을 떠난다. 길이 산 속에 깜박깜박 숨어있다. 아슬하다. 자전거 탄 사람들이 지나간다. 왼쪽으로 고속도로가 나 있다. 걸어서, 자전거를 타고, 혹은 버스를 타고, 모두들 길 따라 나란히나란히 가고 있다. 오늘 밤 머무는 곳은 저마다 다를 터이다. 저 산을 넘고 넘어 보이지 않는 그곳에 오늘의 목적지가 있다.
"PROHIBIDO HACER FUEGO DEBEKATUA SUA EGITEA…"라는 긴 글이 간판 위에 써있다. 옆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우리식으로 '산불조심' 정도의 내용일 터이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사람은 그림을 보고서야 간판에 적힌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저 간단한 그림이 얼마나 쉽게 뜻을 전달하고 있는가.
나는 때로 그림 그리는 사람이 부럽다. 글은 그 문자를 아는 사람하고만 소통하지만 그림은 모든 사람과 통하는 만국 언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글로 쓴 내 글을 내 아들 딸이 읽어주지 않는 것이 아쉽다. 읽지 못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 성 싶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에 익숙한 그들이, 주말 학교에서 한글의 기본정도를 배운 저들이, 내가 쓴 글을 읽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극이다. 많은 이민 1세들이 겪어야하는 힘들고 아픈, 그리고 서러운 현실이다.
오늘은 거리 표시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지방정부의 행정구역에 따라 산티아고 길에 대한 관심의 농도가 달라지는 모양이다. 스페인 중앙정부의 시책이 지방에까지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는다는 증거다.
유채꽃이 지기 시작한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힌다. 황토길 양쪽으로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조림사업을 해서 심어놓은 듯 줄이 반듯반듯하다.
오늘의 목적지 오르테가에 도착 했다. 이곳 오르테가 대성당은 산후안(San Juan) 성인이 1,100년대 지은 로마네스크식 건물이다.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여인도 이 성당을 찾아 기도를 올리면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는 유명한 곳이다. 숲이 우거진 깊은 산골에 성당을 지어 근처 숲속에 숨어 순례자를 헤치는 무리로부터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렇게 깊은 산골에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알베르게가 만원이다. 성당을 둘러본 후, 다음 마을인 아헤스(Ages)를 향해 출발한다. 길가 나무가 독특하다.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나무껍질에 희끗희끗한 것들이 붙어있다. 벌판 한 가운데 나무 한그루가 눈에 띈다. 길 옆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나에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바로 근처에 둥그렇게 돌을 이어놓아 무슨 표지를 만들어 놓았다. 무슨 뜻일까.
3.7㎞를 더 걸어서 아헤스(Ages)마을에 왔는데 이곳에도 빈 방이 없단다. 다음 마을까지 2.5㎞를 더 걸었다. 아따뿌에르까(Atapuerca)다. 이 마을에서 선사시대의 생태계 및 환경을 입증할 방대한 자료들이 출토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문화 인류학의 혁명적인 장소라고 말한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상징적인 간판이 세워져있다.
알베르게를 찾았다. 5유로다. 성당 아래 위치한 아주 오래된 건물인데, 옛날에 마굿간으로 쓰던 건물인 성 싶다. 말 고삐를 메어 놓던 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숙소 천정도 옛 그대로다. 아주 오래된 옛날 말이 주무시던 곳에서 우리가 오늘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추억이 될 듯싶다.
주방이랍시고 간단한 가스 곤로하나가 있지만, 그것도 감지덕지다. 마켓에 들렀다. 유리창에 영업시간이 붙어있다. 아침7시부터 오후2시, 네시반부터 일곱시반까지다. 두시간반 동안은 낮잠을 잔다는 의미다. 저렇게 낮잠을 자고도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는데, 어떤 사람들은 밤잠을 줄여가며 일하며 살아간다.
장을 봐 와서 저녁을 지었다. 와인 한 병(2.9유로), 계란 한줄, 빵, 우유, 주스, 참치켄, 과일을 사왔다. 예상대로 라면은 없다. 어제 산 라면을 끊이고 와인 한 잔을 곁들이니 성찬도 이런 성찬이 없다. 김사장 부부와 함께 잔디 위에 놓인 테이블에서 건배를 한다. 산티아고 길이 주는 호사다.
양치기가 양을 몰아가고 있다. 해가 설핏하니 집으로 가는 길인 모양이다. 2백여 마리 되는 양떼를 양치기가 세파트 한 마리의 도움을 받아 일사분란하게 데리고 간다. 특별한 풍경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페데리카를 만나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38살인데 남자친구와 함께 왔다고 한다. 조금 있으니 한국인이 들어온다. 덴마크에서 일하고 있다는 청년, 이종형씨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잠자리를 정했고, 배불리 밥을 먹고, 어울려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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