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Burgos)에서 혼타나(Hontana)까지 29.4㎞

"빗속에서 아리랑 따라 배우는 이탈리아 아주머니들…촉촉한 기운에 씨앗은 싹 트고 새싹은 살 찌고"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3년 10월 27일(금) 14:59
우리가 묵었던 알베르게. 만원이어서 다음 마을까지 가야했으면 힘들 뻔 했다
새벽, 아직 어둑어둑한데 주섬주섬 짐을 싸서 출발하는 사람들로 알베르게가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가만가만 한 사람씩 움직이지만 이곳처럼 50명 이상 수용하는 곳은 잠귀가 웬만큼 무디지 않으면 깨어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보니 6시가 넘었다.
화장실 앞에 기다리는 줄이 길다. 남자용 화장실 앞에 10분이 넘게 기다렸는데 감감무소식이다. 두드려보니 빈 화장실이다. 무엇에 속은 기분이다.
7시 10분 출발. 스반이 성당 앞 잔디밭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반갑게 아침인사를 한다. 여기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잤나보다. 저렇게 텐트에서 잠을 자고 최소 비용으로 먹을 걸 해결하며 여행하면 큰 비용은 들지 않겠다.
알베르게 옥상에서 내려다 본 마을 모습. 돌담 사이로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언덕배기에 밀밭이 보이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에 오리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는 정경이 영낙없는 우리네 시골 풍경이다.
알베르게 옥상에서 내려다 본 마을 모습. 돌담 사이로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언덕배기에 밀밭이 보이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에 오리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는 정경이 영낙없는 우리네 시골 풍경이다.
부르고스 시내에 가로등이 켜져 있다. 이 도시는 순례자에게 까미노에서 특별한 분기점이 되는 곳이다라고 안내서에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레온까지 메마르고 거친 돌투성이의 끝없는 평원인 메쎄따(고원)가 이어진다고 한다. 지루하고 힘든 코스라서 순례자에게 고통스러운 길이 될거라 했다.
이 길을 걷기 전, 산티아고 길을 안내하는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그 중 한 책은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의 여정을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는 한 줄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 길의 거리가 177㎞, 보통사람이 6일 동안 걸어야 할 여정이다. 이러이러한 길인데 여차여차한 사정으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던가, 뭐 그 정도의 설명쯤은 해 주는 게 작가로서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니었을까.
도시를 빠져나오자 들판이 나온다.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풍경이다. 밀밭 대신 땅콩 밭이 많다. 신작로 옆에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길 따라 부지런한 순례자 몇이 한적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머리가 하얀 노인이 땅콩밭 고랑에서 이슬을 털며 무얼 잡고 있기에 "할아버지 지금 뭐하고 계세요~" 큰 소리로 물었더니, 다가와 플라스틱 통을 보여준다. 달팽이를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걸로 무엇을 할거냐고 물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냥 웃기만 한다. 알아서 해석하라는 의미다.
10여분쯤 걸어가다가 아주머니 두 분을 만났다. 우산을 쓰고 있는데 이분들도 달팽이를 잡았다. 비닐봉지에 달팽이가 담겨있다. 먹기 위한 것인지, 팔기 위한 것인지 물어도 손바닥에 달팽이를 내보이며 아까 할아버지처럼 그냥 웃는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길가 철조망 건너편으로 말 두 마리가 어울려 놀고 있다. 두 녀석이 놀고 있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저렇게 갇혀있어도 그 안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인 모양이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우장을 꺼내 둘러썼다. 우장을 둘러쓴 사람들이 골목길을 돌아 터벅터벅 걸어간다. 이탈리아에서 온 아주머니 두 분과 함께 걸어간다. 자기나라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기에 한국 노래를 한 번 배워보겠냐고 했더니 좋다고 한다. <아리랑>을 선창하면서 따라 부르라 했더니 금방 따라서 배운다. 아리랑은 외국인이 따라 배우기 쉬운 노래다. 가사도 어렵지 않고 발음이 까다롭지 않고 반복이 많아 아주 즐겁게 배운다.
잠깐 비가 멈춘다. 비 맞은 풀잎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밭을 갈아 씨를 뿌려놓은 곳은 촉촉한 기운에 촉이 나고, 새싹들은 이 비에 살이 찌겠다. 길은 질퍽하여 신발에 흙이 달라붙지만 그래도 견딜만 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갔을까. 멈췄던 비가 다시 내린다.
호밀로스(Homillos)마을을 지난다. 호밀로스는 물이 지나는 파이프의 홈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까 아리랑을 배웠던 아주머니들은 이 마을에서 머물겠다고 했다. 비를 맞으며 논둑 밭둑 사이를 한 시간 남짓 걸었더니 산솔(San Sol)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까미노 중에서 가장 궁금증을 일으키는 수수께끼 같은 마을이라고 한다. 산바디요(San Baudillo)라는 마을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1503년에 주민들이 일제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염병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유대인 추방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후자가 더 옳을지 모르겠다.
1492년 이사벨 여왕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을 완전히 축출하고 기독교 국가를 세웠는데,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은 동시에 내렸었다. 1503년이라면, 쫒기던 유대인이 이곳 시골 마을로 들어와 은신하며 살다가 급히 집단으로 피신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그나저나 유대인들은 왜 그렇게 미움을 샀을까. 후일 나찌 독일로부터는 더할 나위 없는 박해를 당하게 되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라 필요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랬을까.
비가 계속 내린다. 최소한 이 마을에서 멈췄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그런데 아내와 오늘 목적지를 미리 정해놓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벌판이 나타난다. 진흙탕 길을 걷는데 한 발을 옮겨놓기가 힘이 든다. 우장을 둘렀지만 비바람 치는 벌판을 건너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장이 바람에 찟겨 나가고 방수가 되지 않은 신발은 물이 질컥거린다. 춥고 배가 고팠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비오는 들판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도 걷는 사람은 자전거를 들쳐 메고 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한결 나았다. 진흙으로 범벅된 자전거를 메고 흙탕길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말없이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인간의 행렬은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저 고생을 하며 이 길을 걷고 있을까. 나는 또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사진을 찍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카메라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3시경 목적지 혼타나(Hontana)에 도착했다. 먼저 온 아내와 미세스 김이 방을 잡아놓았다. 6인용 방이다. 칙칙한 냄새가 알베르게에 가득하다. 더운물로 샤워를 했더니 몸이 풀린다. 김사장이 늦게 도착한다. 함께 그리고 따로, 그렇게 걸어가기 마련이다. 주방이 좁지만 불평할 처지가 아니다.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신발 속에 신문지를 넣어 두고 잠을 청한다. 모두들 힘이 들었던지 이내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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