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王仁石像은 월출산 小祀 대상인 왕인 진영이 그 바탕"

(사)왕인박사현창協, 광주여대 국제회의장서 '2023 왕인학술회의' 개최

'5세기 영산강유역 세력과 월출산의 왕인박사 석상' 주제 발표 및 토론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2023년 12월 08일(금) 11:02
월출산 책굴 입구에 자리한 전 왕인석상(傳 王仁石像)은 백제 아신왕 14년(405) 영암지방에서 출발한 왕인을 기억하는 지역세력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진영을 그려 모셔왔고, 월출산이 소사지가 돼 지역의 조상신으로서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 됐으며, 그 이후 어느 때인가 그의 진영을 바탕으로 석상이 조영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 같은 사실은 11월 30일 오후 광주여대 국제회의장에서 '5세기 영산강유역 세력과 월출산의 왕인박사 석상'을 주제로 열린 '2023 왕인박사 학술회의' 주제발표 논문에 따른 것이다.
(사)왕인박사현창협회(회장 전석홍)가 주최하고 왕인문화연구소가 주관했으며 영암군이 후원한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강원대 김규운 교수가 '5세기 영산강유역 세력과 백제'라는 주제 발표를 한데 이어, 한국교통대 채미하 교수의 '영암 월출산과 소사 월나악(小祀 月奈岳)',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박재용 선임연구위원의 '일본 출토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에 보이는 귀중비직(歸中費直)', 동국대 동국역사문화연구소 박남수 선임연구원의 '월출산 전 왕인석상과 백제 동성왕 인물화상경의 도상(圖像)'이라는 주제발표가 각각 이어졌다. 또 주제발표 후에는 건국대 나행주 교수를 좌장으로 발표자 전원과 청중과의 대화가 열렸다.
■ 강원대 김규운 교수는 '5세기 영산강유역 세력과 백제'라는 주제 발표에서 "일본열도에서 한반도계 유물이 발견되면 양 지역 간의 문물과 사람의 이동을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의 일방적인 흐름을 강조하는 등 그동안 고대 한일 교류 등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고고자료에 대한 해석은 대부분 연구자가 속해 있는 지역을 주체로 놓고 그 지역중심으로 행해졌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이는 마치 '내가 있는 지역에 외래계 유물이 출토되는 것은 이 지역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이고, 이 지역 유물이 다른 곳에서 출토되는 것도 이 지역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이다'라는 뉘앙스"라면서, "한반도계 유물이 일본열도에서 출토될 경우 주저없이 도래인을 상정하면서도, 한반도에서 그와 반대의 양상이 보일 때는 전혀 왜인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해석의 일관성이 결여되는 모습이 없지 않다. 각 지역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주체와 객체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양 지역을 비교하고 이를 통해 일관성 있게 해석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점이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어 "단순히 개별 고고자료의 비교보다 공시적, 통시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교류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점이라 생각된다"면서, "일본열도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묘제의 피장자는 도래인을, 한반도에 축조된 왜계고분의 피장자는 왜인으로 상정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이어져왔으나 이는 일차적으로 고고자료 분석을 통해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이나 축조의 배경과 피장자 문제는 역사인식에 의해 좌우되고 있고, 또 그것을 무시할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반복되어 온 미시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거시적이고 공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한국교통대 채미하 교수는 '영암 월출산과 소사 월나악(小祀 月奈岳)'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옛 백제지역의 소사(小祀) 5곳 중 하나인 월나악은 월나군에 있었는데, 지금의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에 걸쳐 있는 월출산이다. 월출산은 월나악(月柰岳)이라고도 했으며 고려 초에는 월생산이라고 불렀다가 무신 집정기 김극기가 쓴 시에 월출산이 보인다는 점에서 월출산은 무신집정기를 전후해 불려졌다"면서, "삼국사기 제사지 신라조의 '一本'에 있는 영암산은 월나군이 영암군으로 변화된 것으로 미뤄 경덕왕 16년 이후에 월나악은 영암산으로 불려졌다"고 주장했다.
채 교수는 "삼국사기 제사지 신라조에 월나악은 소사에 편제되어 있고 무진악과 함께 무주에 위치하고 있다. 무진악은 현재의 무등산으로, 고려 때는 국제를 올렸으며 조선에서는 주의 관원이 제사를 지냈다"면서, "산천에 대한 제사는 기우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위급한 상황이 있을 때 호국적 목적으로, 또는 국가의 지방통치체제 등 다양한 목적에서 이뤄졌다. 특히 국가는 산천에 대한 제사를 통해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화했다"고 지적했다.
채 교수는 또 "무주는 웅주, 전주와 함께 옛 백제지역으로, 영산강유역이다. 369년 근초고왕의 남정으로 이 지역의 정치체가 백제에 복속되어 독자성을 상실했고 이후 공납을 통한 간접지배가 이뤄졌다고 보기도 하고, 6세기 이전 영산강유역 정치체의 독자성을 인정하기도 한다. 서악 월출산이 사비시기 오악으로 편제되었다는 점에서 백제의 영역화가 되었을 것이고 이 지역의 지배세력 역시 편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채 교수는 또 "삼국사기 제사지 신라조에는 호남 명산의 하나인 지리산에는 고려시대 신상이 모셔져 있었고 그와 관련된 인신은 위숙왕후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무주의 무등산신과 월출산신과 관련된 인신은 없다. 이것은 고려시대 영산강유역 중 나주 금성산신의 위상이 높았던 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박재용 선임연구위원은 '일본 출토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에 보이는 귀중비직(歸中費直)'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은 일본 화가산현 교본시에 소재하는 우전팔번신사에 있었던 동경(銅鏡 지름 19.8㎝)으로, 배면의 내구에 인물이나 기마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원래 있었던 신사의 이름을 따 우전팔번경이라고도 한다. 동경의 외구에는 48자의 명문이 양각되어 있고, 명문 가운데는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가 다소 있지만, '男弟王', '斯麻', 그리고 '歸中費直' 등 한일 양국 고대사연구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
는 인명도 등장한다. 현재 국보로서 국립동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인물화상경에 대해서는 칠지도 못지않게 오랫동안 연구를 진행해 왔으나 아직까지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연구위원은 "명문의 판독과 해석의 경우 상당한 진전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더욱 미궁에 빠지는 듯한 느낌인 것은 동경이 백제와 '斯麻' 즉 무령왕과 관계가 깊다는 선입견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민해왔기 때문"이라면서, "귀중비직은 전라도지역의 목씨(목씨)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는 6세기 대 왜국으로 건너 가 현재의 화가산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면서 성장해 이후 기직씨로서 중앙까지 진출하며 인물화상경의 제작에 참여했다"고 해석했다.
박 연구위원은 이어 "인물화상경의 제작시기는 563년이며, 당시 세력가였던 소아마자가 권력을 유지할 목적으로 제작해 왜왕에게 헌상한 것"이라면서, "이같은 인물화상경의 제작경위를 통해 6세기 대 왜국 내부의 상황뿐만 아니라 백제와 왜국의 관계, 그 이면에 있는 백제 중앙과 전라도 지역의 관계 등 다양한 모습을 파악해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동국대 동국역사문화연구소 박남수 선임연구원은 '월출산 전 왕인석상과 백제 동성왕 인물화상경의 도상(圖像)'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왕인박사에 대한 연구는 그가 언제 일본에 건너가 천자문, 논어 등을 전했는가와 그의 출자에 관한 것으로 요약된다"면서, 이는 "왕인에 대한 기록이 일본측 사료에 근거한 까닭으로 다양한 견해가 있었지만, 근래에 칠지도를 검토하면서 왕인박사가 아신왕 14년(405) 영암지방에서 출발해 그 이듬해에 왜국에 도착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전 왕인석상(傳 王仁石像)'에 대해 박 선임연구원은 "월출산 죽순봉 좌편 거대 암석군에 있는 책굴 입구에 위치한 전 왕인석상은 높이 257㎝, 어깨 폭이 70㎝, 얼굴폭이 38㎝로, 그 아래 평평한 곳에 문산재(文山齋) 터와 양산재(養士齋) 터가 있으며, 1985년 8월 정영호 선생이 발견했다"면서, "얼굴 위에 불교의 보살상 에서 볼 수 있는 보관(寶冠)과는 다르게 관모(冠帽)를 쓴 모습이어서 유인상(儒人像)으로 보고 있으며, 월출산의 다른 마애불과 동 시기인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나 월출산의 마애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여러 가지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즉 "불교적 영향 하의 석조물과는 다른 이례적인 석인상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에 대해서도 유인상으로 보고 왕인박사석상으로 칭해야 한다는 관점과 석불입상, 성모상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고 소개했다.
박 선임연구원은 "전 왕인박사석상을 부여 정림사지 출토 납제 삼존불과 정림사지 춡토 소조상의 '읍양(揖讓) 인물상' 및 '시종을 거느린 인물상'과 비교 검토한 결과 전 왕인박사석상의 복식과 유사한 점을 살필 수 있었다. 곧 전 왕인박사석상의 겉옷은 동전이 있는 좌임 또는 우임의 두루마기와 다르게, U자형으로 목 부분을 드러낸 원피스 형태로서 불상의 통견 형식이지만 숄을 두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상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전 왕인박사 석상의 옷자락이 좌우대칭으로 가지런한 모습은 마치 공자가 읍양하는 자세를 연상하게 하며, 겉옷 안쪽 하의로는 군(裙) 형식의 겉치마(表裳)를 입었고, 푹 파인 U자형의 겉옷 안쪽에는 '시종을 거느린 인물상'과 마찬가지로 라운드 형식의 목선이 있는 속옷 상의(內衣)를 입은 것으로 여겨진다"면서 "왕인박사의 도왜 및 전지태자의 귀환 기사와 관련해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의 시문을 풀이할 때 시문에 보이는 해상(海商)들이 보았다는 성인(聖人)은 이미 월출산의 신격화된 존재로서 영암에서 왜국으로 건너간 왕인박사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이로써 왕인이 영암지역의 조상신으로서 월출산의 신인이 되어 월출산이 이 지역 소사(小祀)의 제사지로서 인정되었고, 김극기에게는 월출산 성인으로 다가와 전 왕인석상을 자금의 상으로 지칭하였던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고 설명했다.
박 선임연구원은 "백제 동성왕 인물 화상경이 동성왕 13년(491) 신미년 8월 10일에 제작된
것인 반면, 전 왕인박사석상은 고려시대에 조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 모양의 복두나 통견의 두루마기 등은 서로 흡사한 점이 있다. 물론 복식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복식사의 관점에서 면밀하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지만, 백제 동성왕 인물화상경은 전 왕인박사석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 비교 연구 대상 자료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면서, "왕인박사석상과 백제 동성왕 인물화상경의 유사점은, 아신왕 14년(405) 영암지방에서 출발한 왕인을 기억하는 지역세력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진영을 그려 모셔왔고, 월출산이 소사지가 되어 이 지역의 조상신으로서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이후 어느 때인가 그의 진영을 바탕으로 왕인박사의 석상이 조영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고 결론지었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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