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을 읽고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2025년 01월 09일(목) 16:05 |
이후 왜적은 한 달여간 전라도 남해안을 약탈하다 이를 추적한 관군에게 다시 완도 금당도에서 크게 패퇴한 후, 보길도 등에 은거하다 남해안을 떠나 6월 21일 제주목 앞바다에 나타나게 된다. 제주 목사 김수문은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전라 관찰사인 이준경에게 구원 요청하였지만, 구원병이 도착한 것은 제주대첩이 모두 끝난 후였다. 제주 사람들만의 힘으로 왜선 40여 척과 1,000여 명의 왜적을 무찌른 제주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었는데, 을묘왜변 발발 초기 지휘관들의 도주로 모든 성이 함락당할 때 군관민이 힘을 모아 왜적을 크게 무찌른 영암성 전투와 유사한 점이 많다. 제주연구원에서 발간한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은 총 4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첫 장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의 왜구>라는 제목으로 왜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명과 고려에서 ‘왜구’라고 칭하는 단어의 역사적 기원까지 살피고 있는데, 135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명과 고려에서 쓰시마를 비롯한 일본에 속한 해적 무리를 ‘왜구’라 통칭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말선초에 왜구의 횡포로 왜구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쓰시마를 정벌하자는 주장이 명에서 대두되고 있었다. 명에 의해 왜구의 본거지 정벌이 시행되면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될 고려와 조선에서는 막대한 피해를 예측할 수 있었다. 고려 창왕 1년(1389년) 박위와 조선 세종 원년(1419년)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은 이러한 배경하에 일어났음을 설명한다. 이 장에서는 ‘왜구가 아니었던 왜구’에 대한 기록도 소개하는데, 종종 지방관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고의로 죽이고 물건을 빼앗고 왜구를 토벌했다고 보상을 받으려던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역사에 남은 유명한 사건은 을묘왜변 당시 전라좌도 방어사 남치근의 일화이다. 을묘왜변 이전 해인 1554년, 남치근은 “제주목사로 있을 때 왜선 5~6척이 당물(唐物)을 가득 싣고 풍랑을 만나 표류해 와 정박했었는데, 왜인들을 모두 죽이고 금은보화와 비단들을 공공연히 자신이 차지하고서 조금도 부끄러워함이 없었다.”라고 사관(史官)은 기록하였다.
두 번째 장은 <조선 전기 제주의 행정과 군사 체계>를 논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제주는 태조 6년 제주목이 설치되어 제주의 17개 현을 모두 다스리다가, 태종 16년 조선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에 맞게 지역을 재배치하여 1목 2현(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그 아래 마을별 호족 관리체제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제주는 전라 관찰사의 지휘 아래 전라도에 속한 제주목(濟州牧)이었지만, 바다를 건너야 도착하는 지리적 특성상 관찰사의 실질적인 감독이 어려워 정2품 관찰사에 준(準)하는 감독권을 주기 위해 종2품을 파견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다른 지역의 목사는 그 지역의 관찰사에게 보고할 수 있는데 제주목사만 예외적으로 임금에게 직접 장계를 올릴 수 있었다. 방어시설 정비의 필요성은 세종 21년(1439년) 처음 논의되며, 중종 5년(1510년) 증설된다. 이후 을묘왜변, 임진왜란 등 대규모 왜적의 침입과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제주의 관방시설은 3개 읍성(제주목읍성, 대정현읍성, 정의현읍성)과 9개 진성(鎭城), 28개의 봉수(烽燧) 그리고 38개의 연대(煙臺)가 설치되었음을 알린다.
세 번째 장은 <을묘왜변 제주대첩과 치마돌격대>이다.
을묘년(1555년) 6월 27일, 제주 앞바다에 머물던 왜적은 당시 방비가 소홀하였던 화북포(1678년 숙종4년 화북진성 축조)로 상륙하여 제주성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제주목사 김수문은 함경도에 근무하면서 동북 변방에서 여진족과 맞서 무력을 검증받은 무장으로, 실제 실록에 표현된 기사를 살펴보면 그는 전투 상황에서 부대를 운영할 때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부대 운영 경험은 제주성 전투에서도 충분히 발휘되어 효용군 70명,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5인과 제주성을 지켜내고 왜적을 패퇴시켜 을묘년 대사건을 종식하였다. 제주대첩에서 큰 역할을 한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를 이끌었던 정로위(定虜衛) 김직손을 제외하면 나머지 4인은 모두 제주 출신으로 이해되며, 갑사와 정병 및 보인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신분상 지배계층보다는 일반 평민에 해당한다고 보며, 이들의 뛰어난 기마술과 궁술이 결국 왜적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다하였다고 사료한다.
세 번째 장에서는 역사 평가에 대한 의견도 담고 있다. 제주대첩의 승전과정에서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할 대목은 70명의 군사와 5인의 치마돌격대로 왜구 일천여 명을 추격하고 섬멸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제주성 전투 과정에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데는 70명의 날랜 군사와 5인의 말을 탄 돌격대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별도의 기병부대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제주성에는 마병과 보병이 지키고 있어서 전세가 바뀌는 시점에서 이들이 함께 성 밖으로 나와 왜구를 물리쳤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즉 성 밖의 기동부대와 성안에 있던 군·민이 함께 합심해서 왜구를 추격하고 물리쳐 제주대첩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이뤘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효용군에 대한 기록으로는 영암성 전투에 대한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명종실록 10년 5월 29일 기사에 “왜구들이 감히 멋대로 돌격하게 된 것은 장사(將士)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움츠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구들은 공격하면 무너지고 쫓아가면 도망하여 조금만 군사의 위엄을 보여도 도망하여 숨기에 바빴다. 이러므로 영암에서의 승전도 또한 효용군(驍勇軍) 10여 명이 먼저 싸운 데에서 얻어진 것이다.”라고 사관이 평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세 번째 장에서는 또한 역사 해석의 일반적인 방법도 기술한다. 1988년에 발간된 『제주선현지』는 을묘왜변 중 치마돌격대의 일원인 갑사 ‘김성조’를 조명하면서 기존 사료에는 언급하지 않은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객관적 사실로 보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서 본 논문에서는 제외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후 논공은 관료 중심으로 추진됨으로써 제주인의 자발적인 헌신과 노력에 대해 다소 낮게 평가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인물에 대한 평가방법에 대해서는 “제주대첩은 공간적으로 제주에서 발생했던 사건이므로 제주 출신 인물에 대한 탐색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제주 을묘왜변 당시 참전했던 제주도 외(外) 출신 인물들에 관한 탐구도 필요하다 여겨진다. 즉, 사건을 중심에 놓고 각 인물을 조망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역사적 실체를 밝히고 계승하는 목적을 우선으로 삼아 각 인물에 관한 탐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특정 인물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네 번째 장은 <역사문화자원과 콘텐츠>
각 지역의 축제나 전투 관련 행사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 특색에 맞게 여러 가지 사업들이 이미 진행되고 있으므로 본 책에 나온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부연할 특별한 내용을 찾지 못했다. 지역 사업으로 담아낼 콘텐츠를 담기 전에 을묘왜변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가 있는지 그에 관한 연구가 선행되는 게 우선이라 여겨진다.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만약 을묘왜변 당시 영암성이 무너졌다면 왜적은 전주를 지나 한양을 향했을 것이다. 또한, 제주성이 무너졌다면 제주도는 왜구의 소굴이 되어 조선의 서남해안은 그들의 지배하에 놓였을 것이다. 을묘왜변이 아니라 ‘을묘왜란’이 될 수 있었던 큰 사건을 우리 역사에서는 너무 소홀히 대하고 있다. 을묘왜변 후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 수군은 어떤 방비를 하였기에 임진왜란 당시 남해가 ‘이순신의 바다’가 되었는지 영암군과 제주도가 중심이 되어 깊이 있는 연구를 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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