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릉은 왜 도굴되지 않았을까?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2025년 01월 23일(목) 15:14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기 때문에 조선왕릉은 대부분 서울시와 경기도 등 수도권에 분포되어 있지만 제6대 임금인 단종은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기 때문에 영월에 안장되어 노산군묘라 부르다가 제19대 임금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킴에 따라 장릉으로 승격하게 되어 왕릉 중 유일하게 비수도권에 소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고대국가 왕들의 무덤은 시대를 막론하고 외적의 침입과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을 당하거나 고고학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무덤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인데 조선왕릉은 임진왜란 시 왜군들에 의해 선릉(성종과 정현왕후 무덤)과 정릉(중종의 무덤)이 일부 도굴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왕릉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왕릉이 도굴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묘지 축조방식에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 우리나라 묘지 축조방식은 돌로 방을 만드는 석실묘였다. 석실묘는 돌을 쌓아 올려 조성하였기 때문에 묘지를 파고 들어가기가 쉽게 설계되어 도굴이 가능한 축조방식이었으나 조선 초기에 국가의 예절 규범을 주희(朱熹)의 주자가례(朱子家禮)로 바꾸면서 장사문화가 석실묘에서 석회를 이용한 회곽묘로 바뀌어 도굴이 어렵게 되었다. 석회와 모래, 황토를 섞어 만든 회곽묘는 석회가 주위의 수분을 흡수하여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열을 방출, 내부온도를 섭씨 200℃가량으로 끌어 올려 고온 살균해버릴 뿐만 아니라 석회를 돌덩어리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작용을 했다.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잘 보존된 미이라와 한글편지, 의복 등이 종종 발굴되는 것은 회곽묘의 이러한 화학적 반응의 결과로 알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회곽묘는 장비 없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깨뜨릴 수 없었기 때문에 도굴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회곽묘가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 도굴 미수사건”이다. 1868년 독일 상인이었던 오페르트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당시의 실세 흥선대원군이 이에 응하지 않자 한가지 무모한 일을 시도한다. 조선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시체와 부장품을 인질로 삼아 통상문제를 흥정하고자 남연군묘 도굴을 계획했다. 오페르트는 필리핀, 중국인 등 140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도굴단을 구성, 남연군묘가 소재한 충남 예산에 도착 묘지를 파헤치고 밤새 관을 깨트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관이 너무나 단단하여 실패하자 결국은 새벽에 날이 밝자 도망가고 말았다. 조선왕조 왕릉이 단단한 회곽묘 덕분에 도굴꾼들은 피할 수 있었지만, 선조들이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의 궁금증을 밝히고자 하는 고고학자들의 발굴욕구는 피해 갈 수 없었을 것 같은데 왜 지금까지 조선왕릉은 한 번도 발굴조차 시도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조선왕릉은 발굴의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이 승하하면 국장을 담당할 도감을 설치하고 대략 약 3∼5개월에 이르는 국장 기간 동안 왕릉을 조성하였는데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에 능의 구조, 건축물과 석재, 공사 기간, 참여 인원, 조각품의 설계도에 이르기까지 공사의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세세하게 기록하여 발굴하지 않아도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 부장품도 거의 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넣었더라도 모형으로 넣었기 때문에 발굴의 실익이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오늘에 와서는 왕릉을 발굴할 경우 세계문화유산 지위를 상실할 우려도 있어 앞으로도 왕릉을 발굴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의 장제 문화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후세계를 신봉하면서 명당을 찾아 온갖 정성과 예를 갖추어 극진하게 망자의 시신을 매장하는 문화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묘지조성도 하지 않고 화장을 해서 봉안당에 안치하는 문화로 바뀌고 있다. 장제 문화는 엄격한 규범 속에서 치러지는 가장 보수적인 행사로서 국가나 사회질서를 흔드는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 한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인데 급격하게 변화하는 장제 문화를 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지 않나 생각을 해 본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