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 기록 100주년에 즈음하여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5년 06월 26일(목) 15:55
양달사현창사업회사무국장 이영현
1919년 기미 독립선언 이후, 전라남도 원응상 도지사와 석진형 참여관(參與官, 현 국장급) 등은 애국사상 억제 수단으로 유교를 활용키로 하고 1922년 3월 150여 명의 호남 유림들을 동원하여 ‘전라남도유도창명회(全羅南道儒道彰明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선전 도구로 1923년 7월부터 『창명(彰明)』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는데, 1925년 1월 10일 발행된 제5호의 ‘잡보(雜報)’란에 ‘고백제국 박사관왕인씨 사우건설 발기문(古百濟國博士官王仁氏祠宇建設發起文)’을 실었다.

한문으로 된 이 발기문을 요약해서 소개하자면 백제에서 박사 벼슬을 한 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한 것은 일본과 조선의 역사가 하나라는 증거이다. “전설에 의하면 왕인박사는 전라남도 영암군에 살았다고 한다.(傳說 王博士本居于全南之靈巖郡云)” 그러므로 왕인박사의 묘가 있는 대판부(오사카부) 북하내군 매방의 묘지 옆에 사당을 하나 건립하여 영구히 숭배코자 하니 많이들 호응해 달라는 내용이다.

2020년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에서 발간한 『전라남도유도창명회‘창명’』이라는 책에 수록된 이 잡지는 2021년 12월 2일 영암군과 왕인박사현창협회 주최의 세미나에서 광주대 김덕진 교수에 의해 자세히 소개되면서 군민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왕인박사와 영암과의 관련성이 언급된 첫 번째 기록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글은 누가 썼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이 잡지의 발행인이자 전남도청 시학(視學, 장학관)인 정국채(鄭國采, 1883.5.8.-1943.10.18)다. 그는 1910년 2월 17일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가 조극환 선생과 함께 영암공립보통학교 선생으로 재임하면서 영암 주재 헌병대장 등의 통역관으로 활약했다.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제자답게 영암의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현행조선어법(現行朝鮮語法)』이라는 전문 서적을 저술하기도 한 대단한 인물이다. 기미 독립선언 이후 승진하여 1920년부터 구림공립보통학교 교장으로 2년간 재임한 그는 구림의 유림과는 막역한 사이였고, 1921년 전남도청 시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 원응상, 석진형 밑에서 ‘전라남도유도창명회’ 실무를 담당하다가 1923년부터 『창명』 발행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따라서 1925년 『창명』의 사당 건립 취지문은 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라 여겨진다. 김덕진 교수도 지적하였듯이 당시 영암 구림에 왕인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었는가의 여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지만 『창명』이라는 잡지에 이 발기문을 쓴 사람은 구림의 역사와 인물사에 정통하였던 정국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1924년에는 김용순(金容珣)을 중심으로 한 호남의 유림들이 『호남지(湖南誌)』 편찬을 시작했다. 군마다 편찬위원들을 선임하여 11년 만에 간행하였는데, 조선시대 호남지들이 군현별로 만들어 합본한 책자였다면, 이 『호남지』는 건치연혁(建置沿革), 인물, 고적(古蹟) 등 주제에 따라 군별로 일괄 기술한 책자였다. 당시 영암군 편찬위원으로는 도유사(都有司)에 최동식(崔東植). 부유사(副有司)에 최계홍(崔啓洪), 교정(校正)에 문창선(文昌善)·전종화(全鍾和)가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호남지』1권 영암군 ‘고적(古蹟)’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왕인박사, 옛날 백제 근초고왕(346-375) 때 논어와 주흥사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가 응신황에게 바쳤다. 황태자의 사부가 되었고, 일본 한학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묘는 일본 대판부 북하내군 매방에 있고, 지금 묘 아래 사당을 건립하여 존숭하여 받들고 있다.(王仁博士 古百濟近肖古王時 入奉論語及周興嗣千字入日本獻于應神皇, 遂爲皇子師傅, 日本漢學從此始傳, 墓在大坂府北河内郡枚方而建祠于墓下至今崇奉云)”

여기에는 물론 왕인박사가 영암에서 살았다는 전설이 있었다든지, 영암 출생이라든지 하는 표현은 없다. 하지만 관찬 지리지 수준의 『호남지』 영암군 편 ‘고적(古蹟)’조에 실렸다는 것은 왕인박사가 ‘영암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수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 여파가 상당했다. 더욱이 이 기록은 우리나라 지리지(郡誌) 중 왕인박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1937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보다 2년이 빠르다. 또한 1925년 『창명』의 발기문에서 제기한 사당 건립사업이 1928년에 완료되었으므로, 이 기록은 1928년 직후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은 또 누가 썼을까. 『호남지』의 영암군 도유사 최동식은 현기봉의 최측근 집사로 영암의 유림 중 한 사람일 뿐이었고 다른 3인도 일본 역사를 공부한 이들이 아니다. 최동식의 아들 최현은 10여 년간 군서면장을 역임하고 1962년에는 『영암군지』 편찬위원장을 맡은 인물이지만, 그 역시 일본 역사에 조예가 깊은 인물은 아니다. 따라서 이 기록도 1928년 말까지 전남도청에 근무하면서 『호남지』 등의 편찬을 감독하였던 정국채가 기술하였거나, 1926년 8월부터 1929년 1월까지 전라남도지사로 근무하였던 석진형의 지시로 누군가 『창명』의 기록을 삽입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1937년 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서는 왕인박사에 대한 기술이 대폭 수정되면서 내용도 증가한다.
우선 군서면 성기동(聖基洞)을 영암군 ‘명소(名所)’로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기동. 군에서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백제 고이왕 때 박사 왕인이 여기에서 출생했고, 신라 진덕왕 때는 국사 도선이 여기에서 출생하였기에 성기동이라 한다(聖基洞 在郡西二十里 百濟 古爾王時 博士王仁生於此 新羅眞德王時國師道詵生於此 曰聖基洞)”.

그리고 ‘명환(名宦, 이름난 관리)’ 조에서는 왕인박사의 기록을 더욱 자세히 보완하였다. “백제 고이왕(234-286) 때 박사 왕인이 성기동에서 출생했다. 고이왕 때 박사 벼슬을 지냈고 경전의 깊은 뜻에 정통하였다. 고이왕 52년 을사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야공(冶工), 양조인(釀造人), 오복사(吳服, 제봉사)를 거느리고 건너갔다. 천자문과 논어를 응신천황에게 전하여 익히게 하였다. 일본이 유학 경전과 제도 등을 익히게 된 것이 이때부터다. 묘는 일본 대판부 북하내군 매방에 있으며, 그 아래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王仁博士 百濟古爾時 博士王仁生於聖基洞 同王時博士官精通奧意五十二年乙巳使於日本冶工及釀造人吳服師等率往 傳習進千字文論語於應神天皇 經傳儒學其他制度始此 墓在日本大阪府北河內郡枚方其下建祠)”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호남지』와 『조선환여승람』의 기록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첫째, 구림이 왕인박사의 거주지에서 출생지로 바뀌었다. 『창명』의 ‘영암 거주 전설’과 『호남지』‘고적(古蹟)’조의 기술은 왕인박사가 영암에 살았다는 정도의 서술인 데 비해, 『조선환여승람』‘명환(名宦)’ 조에서는 왕인의 탄생지를 성기동이라 명시하면서 자세히 기술하였다.
둘째, 『호남지』의 근초고왕(近肖古王, 제13대, 346-375)이 고이왕(古爾王, 8대, 234-286)으로 바뀌었다. 『일본서기』 10권의 ‘응신천왕’ 15년 기록과 연대를 맞추기 위해 응신천왕 시기의 백제 왕으로 대치한 것이다.
셋째, 고이왕 이후의 인물인 주흥사(周興嗣)의 이름을 삭제했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주흥사는 470년에 태어나 521년에 죽었다. 따라서 응신천황 이후의 인물인 주흥사를 삭제한 대신 ‘천자문’만 남겨 두었고, 이를 근거로 요즘 영암군에서는 주흥사 훨씬 이전 인물인 서예가 종요(鍾繇)의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것이라고 홍보한다.
넷째, ‘야공, 양조인, 오복사 등을 거느리고 건너갔다.’라는 기록을 추가했다. 일본 『고사기』 등의 기록을 근거로 왕인박사의 도일(度日)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서술한 것이다.
다섯째, ‘응신황(應神皇)’을‘응신천황(應神天皇)’으로 정확하게 표기한 반면에 내선일체의 의미를 감추려는 듯 ‘일본’이나 ‘존숭(尊崇)’ 등의 단어를 지웠다. 하지만 후반부의 왕인묘 관련 기술은 『호남지』 서술 방식과 거의 일치한다

이렇듯 정교하게 하나하나 짚어가며 문구들을 수정한 점으로 볼 때 이 글의 서술자는 『호남지』를 꼼꼼히 숙독한 사학자 수준의 인물임을 추정할 수 있다. 즉 『조선환여승람』의 왕인박사 기록은 일본 고대사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의 기술자들, 1731년 나미카와세이죠(竝河誠所, 1668-1738)가 지리지를 편찬하면서 발견한 문서 등을 근거로 ‘전왕인묘(傳王仁墓)’라는 묘석을 세우라고 한 것이나 1899년 9월 28일 청일전쟁 승전 기념으로 왕인박사추모제가 거행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꿰뚫고 있던 인물이 쓴 글이다.
그렇다면 이 서술자는 또 누구일까.

정국채는 아니다. 정국채는 1929년 함평군 서무계주임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30년 곡성군수를 거쳐 1934년에 공직을 떠났다. 『조선환여승람』의 편찬자인 이병연이 쓴 글도 아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광주향교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환여승람』을 편찬하긴 했지만, 이병연은 일본사에 이 정도로 깊은 식견을 가졌던 인물이 아니다. 1932년 5월 7일 ‘박사왕인동상건립목록론견(博士王仁銅像建設目錄論見)」’이란 글로 영암 구림을 왕인탄생지라고 떠들어대면서, 왕인박사 동상을 세우자고 제안한 영산포 본원사(本願寺) 주지 아오키게이쇼(靑木惠昇)도 조사해 보았지만, 그 역시 『조선환여승람』에 관심을 기울일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따라서 1925년 ‘영암 거주 전설’에서 ‘영암 사람’으로, ‘영암 성기동 출신’으로의 서술 변이 과정과 그 배경을 규명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안고 있는 과제 중 하나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영암과 관련된 왕인박사의 기록이 등장한 지 만 100주년이 되었다. 이제 왕인박사는 영암의 인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고, 왕인박사유적지는 영암의 문화관광자원이 되었으며, 왕인문화축제는 영암의 대표축제가 되었다.

따라서 매일같이 조선시대 영암군지들을 번역하고 있는 요즘, 『일성록(日省錄)』에 실린 1785년 11월 8일 정조(正祖)의 말로 이 글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이미 군지에 실려 있는 것을 사사로운 기록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100년 전에 군지에 실렸다는 것은 바로 백년 동안 이어져내려온 군민들의 공적인 의견이다.(旣載邑誌不可以私錄言---百年前舊券便是可謂百世之公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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