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에 희생당한 아버지의 한을 푸는 게 제 마지막 과제입니다” 전 도포농협 조합장 양유복 씨 인터뷰 이승우 기자 yanews@hanmail.net |
2025년 06월 27일(금) 0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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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포초등학교 제 29회 동창회 기념사진 |
“아버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76세 양유복 씨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기억은 멈춰 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단지 보도연맹에 가입한 이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가 학살됐다. 그리고 남겨진 가족은 혹독한 시간들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전 도포농협 조합장인 양유복 씨의 아버지 양재철 씨는 1950년 7월, 보도연맹 관련 민간인 학살사건의 희생자다. 보도연맹은 해방 이후 좌익세력을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으나, 6·25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일괄 구금, 학살했다.
양 씨의 아버지는 보도연맹 가입자가 아닌 일반 주민이었다. 하지만 당시 보도연맹 단원으로 연행됐던 한 청년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양 씨의 아버지 또한 구금됐다.
이러한 억울한 사정이 알려지자 장인어른은 소를 팔아 양재철 씨를 구출하려했지만, 그는 본인이 죄가 없으니 금방 풀려날 것이라며 시아버지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얼마 후 연보리 차내골 산골짜기에서 경찰의 집중 총격 학살이 일어났고, 양 씨 아버지 또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뱃속의 아이와 홀로 남겨진 스물셋의 아내
양 씨는 “아버지는 당시 3살 누나에게 꽃신을 사주겠다며 외출하셨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양재철 씨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당시 그의 아내 강양덕 여사는 임신 6개월이었다. 3살 딸의 꽃신을 사러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울부짖으며 찾아 헤맸고, 시신 더미 속에서 손수 지은 옷과 금니로 남편을 식별해 직접 시종면 봉소리 산에 이장했다.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불과 23세였다.
그 후 태어난 양 씨와 어머니, 누나는 모진 고난의 세상에 살아야 했다. 그들에 대한 외면은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큰아버지는 아버지 앞으로 남아있던, 조그만 논밭까지도 가져가려고 했다. 당시 양 씨는 유년기였음에도 큰아버지의 말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상처와 고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농사를 지어 아이 둘을 키운다. 당시 외할아버지 집안이 좋아 어머니를 재혼시키려 했지만 어머니는 본인이 새 가정을 꾸리면 내 딸과 아들은 또 한 번 버림을 받게 되기에 그 고된 길을 홀로 버티며 걸어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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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루하루 서러움과 배고픔 속에 자란 양 씨는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한다. 집에는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당시 양 씨는 힘든 기억밖에 없던 고향 땅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양 씨는 콩나물 공장, 인쇄소 등 일만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어떠한 연고도 없던 중학교 갓 졸업한 양 씨를 거둬주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양 씨는 고향에 있을 때는 서울 사람들은 다들 여유롭고 편하게 일하고 생활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행상꾼인 작은 아버지를 따라 겪은 서울 사람들은 정반대였다. 오히려 시골 사람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하고 늦은 밤 일을 마쳤다. 이 모습을 본 양 씨는 이런 부지런함을 본받아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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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양 씨는 고향에 내려왔지만 농사를 지을 땅이 없었다. 하지만 양 씨가 힘겹고 악착같이 버티며 자라온 모습을 지켜봐 왔던 동네 이웃이 무상으로 야산을 빌려줬고, 양 씨는 직접 삽으로 구덩이를 파 수박 농사를 시작했다.
농사 첫해부터 성공적으로 수박 밭을 가꿔 갔던 양 씨는 안주하지 않고 수박 및 농사 관련 서적, 농민신문 등으로 농법 연구에도 매진했다. 그 결과 전국 최초로 참박을 접목한 수박접목 재배가 대성공을 거두었고 기상악화나 전염병에도 양 씨의 수박은 거뜬하게 자라며 당시 수박 거래가격의 3배 이상의 가격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양 씨는 거래 수익금을 고생하신 어머니에게 드렸다.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며 만세를 부르던 어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후 전국적인 주목을 받으며 주변 농민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된 양 씨는 도포농협 조합장까지 하게 되고, 아내인 윤공례 여사와 슬하 5남매를 멋지게 키웠다.
이제 일흔을 훌쩍 넘은 양 씨에겐 단 하나의 목표만 남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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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야속하게도 전 정권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뉴스를 접하게 됐다. 양 씨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 씨는 윤 전 대통령과 박민식 전 국가 보훈부 장관에게 300여명의 탄원서를 모아 한겨례 신문 등에 기고를 했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 손주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2023년 양 씨는 과거사정리법에 따른 진실화해위원회가 광주에서 민원 접수 및 조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광주로 향했다. 긴장한 것인지, 아버지의 누명을 드디어 해결할 수 있겠다는 설렘 때문인지 노크를 하는 양 씨의 손은 파르르 떨렸다고 한다.
당시 사건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진화위 관계자의 말에 양 씨는 아버지 없이 살아온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본인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마음 다잡고 양 씨는 아버지가 영암 경찰에 연행된 사유부터 사망 과정, 사건 후 수습까지 아픈 기억들을 꺼내어 전했다.
이후 1년이 더 지난 2024년 12월 17일, 아버지 양재철 씨의 사건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진실규명 결정 통보를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양 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보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소싯적 수천 평의 땅에서 전국에 이름 날리며 수박 농사를 지었던 양 씨는 이제 집 뒷마당에 조그만 하우스에 본인들과 가족들 먹을 만큼만 농사를 지으며 부인과 손주들 보는 낙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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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어버지처럼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사람이 나라에 없어야 한다며 판사, 검사가 되겠다는 손주들의 말을 떠올리며 양 씨는 또 한 번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 손주가 ‘증조할아버지처럼 억울한 사람 없게 하겠다’며 판검사가 되겠다고 해요. 그 말을 듣고 또 울었어요”
“이제 제 나이도 70이 넘었고 남아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자의 직계가족이 살아 있을 때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그들에게 진솔한 사과와 배상을 해야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후손들을 위해 이 마지막 과제를 꼭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이승우 기자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