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비는 국보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2025년 08월 22일(금) 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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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서거정 시를 보면 ‘도갑사의 비석은 글자가 반이나 없어졌다(道岬碑殘字半無)’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첫 번째 도선국사비는 이 당시 심하게 퇴락해 있었다. 그래서 이를 늘 안타까워하던 도갑사 옥습(玉習)은 1636년 도선국사 비석을 다시 건립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었으며, 억불숭유의 사회 분위기 때문에 성금을 모으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1639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굴욕적인 패배로 강화협정을 맺은 인조는 청 태종의 요청으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했던 삼전도(현 송파구 광나루 하류)에 1639년 12월 31일 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를 세운다. 이른바 ‘삼전도비(三田渡碑)’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1651년 어느 날, 어느 정도 성금을 모은 옥습은 당시 명문장가로서 삼전도비문을 쓴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을 찾아갔다. 자신이 도선국사에서 무학대사로 이어진 비보풍수 사상의 적통 제자임을 밝히고 나서 도선국사비 재건립을 위해 비문을 지어 줄 것을 간청했다. 기록은 없지만 이날 옥습의 깊은 불심과 집념에 적잖게 감동한 이경석은 며칠을 고심한 끝에 비문을 지어주기로 하면서 계획의 일부 변경을 제안했다. 형 이경직에게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라고 하였을 정도로 삼전도 비문을 지은 일을 치욕스러워하고 있던 그는 도선국사비를 삼전도비 못지않게 웅장하게 건립하자고 제안했다. 그럼으로써 삼전도비 비문 찬자(撰者)로서의 굴욕감을 조금이나마 털어내면서 조선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그래서 비문을 선뜻 지어 준 그는 옥습으로부터 앞으로도 난관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두 번째 제안을 했다. 왕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도선국사비 비명(碑銘)을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비명’에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도선국사비의 비문들 중 그가 지은 비문 안에만 ‘수미(守眉)’라는 이름이 없다는 점, ‘수미대선사(守眉大禪師)’를 넣어 제목만 바꾸는 일은 어렵지 않다는 점 등이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데, 이게 맞다면 그것은 신(神)의 한 수였다. 190여년 전에 세조의 왕사(王師)였던 수미대사가 미처 이루지 못한 사업이라고 둘러대면서, 무학대사의 스승 격인 도선국사와 세조의 스승인 수미왕사의 업적을 함께 적은 거대한 비석을 건립하고 싶다는 제안을 효종이 반대할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삼전도비처럼 웅장하게 세워서 인조가 당한 치욕을 조금이나마 씻어내고 조선에 중흥의 활기를 불어넣고 싶다는 말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도갑사 중창시 세조가 막내동생 영응대군(永膺大君)을 대시주(大施主)로 삼았던 선례에 따라 동생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1622-1658)를 대시주로 참여시켰고, 한석봉의 제자로서 삼존도비를 총괄 감독하였던 서예가 오준, 김광욱 등도 선뜻 동참했다.
이리하여 지난 2022년 ‘도선국사 재조명 세미나’에서 이영숙 규남박물관장이 말했듯이 옥습의 도선국사비 재건립 사업은 ‘도선의 풍수도참설에 기대어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는’ 조선국의 신활력 사업으로 승격되었고, 이때부터 도선국사비 재건립 사업은 조정 대신들과 전라도관찰사 등의 지원 속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청나라에서 트집을 잡을까봐 비석의 높이는 5.7미터인 삼전도비보다 조금 작은 5.13미터로 하였지만 폭과 두께는 동일하게 했다. 대신 이수(螭首)에는 삼전도비처럼 비상하는 듯 뒤얽힌 두 마리의 용문양을 새겨넣었고, 비신의 좌우면에도 삼전도비보다 더욱 아름답게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용들을 새겼다.
이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이 비석에 이름을 올린 우리 영암 선조들의 면면이다. 도선국사비에는 인평대군과 삼정승 육판서 등 21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영암인으로서 비석 제작에 직접 참여하여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서예가 김시간(金時暕)은 시서(市西) 김선의 둘째아들이자 구림 현덕승의 사위로서, 결혼 후 덕진 강정마을로 이사를 온 광산김씨 입향조다. 앞면 좌측에 적힌 이수인의 추기(追記) 외에도, 그가 쓴 뒷면의 ‘국사도선비음명(國師道詵碑陰銘)’전액(篆額)은 김광욱(金光煜)의 앞면 전액보다 강건하면서도 필획에 기품이 있다. 당시 영암 출신의 관료로서는 영계 신희남의 증손인 홍문관 부제학 신천익과 효와 충으로 이름을 날린 능주목사 곽성구, 김완 장군의 아들로서 무재(武才)를 크게 떨친 해성군 김여수, 의병장 박승원의 둘째아들 평안병사 박성오, 1565년 임호·현징 등과 함께 회사정을 건립한 군기첨정 조행립 등이 이름을 올렸는데, 모두가 자랑스러운 우리 영암의 선현들이다.
삼전도비로 추락한 왕권 회복과 패배감에 젖은 조선 백성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다시 세워진 도선국사비, 건립 당시 영암 구림과 도갑사에 드나들었을 고관대작들도 역사상 최대규모였을 것이므로 도선국사비를 국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