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달사 의병장이 조선 최초 의병장인 이유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 2025년 12월 05일(금) 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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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달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명종실록』에 실린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갔나(有功達泗歸何處)’이고, 두 번째 기록은 을묘왜변 78년 후인 1633년 나주 회진(會津)의 진사 임연(林埏, 1587-1654)이 쓴 ’남암공사장(南巖公事狀)‘이다. 『명종실록』의 포상자 명단에서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영암군에서조차 잊혀졌던 양달사 의병장을 역사 속으로 환생시킨 글이 바로 이 ‘남암공사장’인 것이다. 임연은 정암 조광조(趙光祖), 양달사의 스승인 학포 양팽손(梁彭孫) 등과 함께 같은 날 사마시에 급제한 귀래당 임붕(林鵬, 1486~1553)의 증손자로, 그의 첫째 부인은 의병장 김천일의 손녀이고 두 번째 부인은 학포 양팽손의 고손녀(高孫女)이다. 자신의 처가인 나주 김천일 집안과 화순 양팽손 집안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양달사에 대한 전기를 쓰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잘 아시다시피 1555년 5월 11일 70여 척의 배를 타로 해남과 완도 사이의 해로로 침입한 왜구는 달량성을 포위하였다. 5월 13일 전투에서 영암군수 이덕견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접하고,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양달사는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영암성 안으로 들어갔다. ‘남암공사장’의 글을 인용하자면, 그는 <군수가 없는 성안으로 들어가 어른들에게 “나를 공조(工曺, 지역의 대표자)로 삼으시오, 나는 죽을 각오로 일전을 펼칠 것이오.”라고 하였다. 양공(梁公)의 지혜와 용기는 본래 군민들에게 으뜸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어른들이 그를 공조로 추대하고 따르면서 말하기를 “모든 자제와 장정들이 소문을 듣고 기꺼이 나설 것이오.”라고 적혀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첫째 양달사가 창의한 날짜가 5월 13일이고, 둘째 양달사가 스스로 나섰으며, 셋째는 어른들이 그를 대표로 추대했다는 점이다. ‘조선 최초 의병장’이라고 불리려면 최소한 이 세 가지 조건에는 부합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뛰어난 공적까지 남겼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2024년 8월 28일 장흥투데이에 실린, ’조선 최초 의병장은 기산리 백세례(白世禮) 부장(部將)이었다’라는 기사를 보자.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을 보면, 양달사에 이어서 그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그의 본관은 수원(水原)으로 백광훈(白光勳)의 삼촌이다. 어려서부터 힘이 뛰어났고,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部長)에 제수되었다. ‘을묘왜변 때 장흥부사 한온과 더불어 병사들을 이끌고 달량성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져 전사하였다(乙卯與本倅韓蘊領兵赴達梁之役 矢盡釖折 竟死于賊)’라고 적혀 있다. 5월 11일 달량성이 포위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장흥부사와 함께 달량성으로 달려갔다가 전사한 인물로, 양달사보다 2일 먼저 창의를 했으므로, 그가 ‘조선 최초 의병장’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는 장흥부사 한온의 부장이자 관군이었다. 따라서 2일 먼저 나서긴 하였지만, 의병장은 아니다.
다음은 전 무장(현 무안)현감 이남(李楠, 1505-1555)이다. 지난 2025년 10월 24일 해남의 ‘시민의 소리’에 ‘해남군 최초 의병장 이남 장군을 아시나요?’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해남 마산 출신인 이남은 본관이 원주(原州)로 지략이 뛰어나 1531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무장현감을 역임하고 처가인 강진에서 말년을 보내던 중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해남현감 변협과 함께 달량진으로 가다가 왜적을 만나 전사하였다. 『명종실록』 1555년 5월 21일 기사에도 <변협이 달량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는데, 전 무장현감 이남과 힘을 합쳐 접전하다가 적에게 격파되어, 이남은 죽고 변협은 겨우 몸만 빠져나왔습니다(邊恊聞達梁被圍 率軍三百人馳往救之 與前茂長縣監李楠 竝力接戰 爲賊所破李楠死焉邊恊敗北).>라고 적혀 있다. 백세례처럼 그도 5월 11일 나섰다가 5월 13일 전사한 것이고, 그래서 ‘조선 최초 의병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 어디에도 이남이 스스로 창의를 했다든지, 주민들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는 말은 없다. 더욱이 이남이 해남현감 변협과 함께 힘을 모아 싸웠다는 것은 해남현감이 지휘하는 관군에 소속되어 싸웠음을 의미한다. 이분 역시 양달사보다 2일 먼저 나서긴 했지만 ‘조선 최초 의병장’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광주대학교 김덕진 명예교수는 ‘200여 명의 향민을 모아’ 창의를 했다고 주장하는데, 『원주이씨 인터넷 족보(https://www.yesjokbo.org/)』에는 이런 기록들이 전혀 없다.
양달사현창사업회가 출범한 이후 6년이 지났다. 그리고 양달사 의병장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공공연히 양달사 의병장의 공적을 폄훼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일부 사학자나 인근 시군만 아니라, 몇몇 영암군민들조차 양달사 의병장의 업적을 깎아내리려 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분들에게 『양달사 장군 문헌집』을 한번 들여다보길 권하면서, 대사성 윤득부(尹得孚)가 양달사 묘지명에 기록한 말을 들려주고 싶다. <물이 땅을 덮으면 일시적으로는 물이 땅의 기세를 누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땅의 기운을 덮을 수가 없듯이 양달사의 공적이 아무리 묻히더라도 남들이 양달사의 공적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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