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내에서 낭산 외숙을 기리며

신지호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2년 07월 13일(금) 09:33
일제의 정권이양 회유책 단호하게 거절 건국사업에 열중
낭산의 還鄕때는 교동리서 서우내까지 환영 인파로 장관
제헌의원, 3∼6대 국회의원 영암서 당선 영암의 얼 상징
물욕에 담담하고 초연 조선시대 청백리 황희정승 떠올라
서우내의 낭산 생가가 복원된 것을 감명 깊게 바라본다. 67년 전 해방이 되던 해, 어머니가 우리를 데리고 친정살이를 하셨던 나의 외갓집이다. 고개를 들면 월출산의 산성대가 여전히 내려다 보고 있다. 산자락을 쓸고 내려온 솔바람이 외할머니 손길처럼 정겹고, 도랑 건너 수박등에 참솔나무 세 그루는 옛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의연하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 가족을 처가(내 외갓집)에 맡기시고 서울로 가셨다. 해방된 나라에서의 새 일자리 때문이었다. 나는 영암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낭산 외숙을 처음 뵌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낭산은 일제와의 독립투쟁의 역경 속에서, 연천 전곡의 농장을 경영하며 칩거(蟄居)하시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으신 것이다.
패망한 일제는 우리나라에 정권이양을, 그동안 일제에 가장 날카롭게 대하던 낭산에게 위임하려 했으나 일제의 회유책(懷柔策)에는 동조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등 민족진영계 인사들과 건국사업에 열중하고 계셨다. 해방 후의 그런 와중(渦中)에 낭산은 꿈에도 그리던 영암을 찾으신 것이다. 고향이면서도 일제하에서는 마음대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분주함 속에서나마 먼저 고향의 하늘을 우러르고 싶으셨을 것이다.
열 살의 내 어린 눈에 낭산의 환향(還鄕)은 가히 장관(壯觀)이었다. 교동리 입구에서 서우내 외갓집까지의 밭두렁길은 따르는 환영인파로 금세 넓혀졌고, 외갓집의 안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외조부모 앞에서의 낭산은 독립투사로서의 위엄보다는, 마음대로 찾아뵙지 못한 부모에 대한 불초(不肖)의 죄스러움이 더하셨으리라. 가족과 친척들을 한 사람 씩 어루만지시며 이름을 불러보는 감회의 순간이었다.
‘오, 네가 지호로구나’ 처음 대하는 나를 쓰다듬어 주시던 조카에 대한 따뜻한 손길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 때 낭산 외숙에 대한 생각은, 이후로 알게 된 그 분의 항일위업과 독립의 열정으로 숭모(崇慕)의 정(情)이 되어 내 평생 이어지고 있다.
서우내 외가에서 그 때 6개월 밖에 살지 않고 우리는 광주로 떠났지만, 10여년 후 내가 교직발령을 영암으로 받게 되면서 외가는 내 친가나 고향보다 더한 평생의 삶의 의지처가 되었다. 서우내의 낭산 생가는 6 25때 불타 없어지고, 새로 마련한 교동리 187번지의 외가를 내가 지키며 살게 된 것이다.
당시 외가의 분위기는 낭산의 행보에 따라 바뀌었다. 낭산의 숱한 정치노선과 활동의 기류에 따라 함성도 나오고 어떤 때는 긴장과 걱정에 쌓이기도 했다. 낭산의 정치행보는 서울과 국제무대에서 이루어지지만 낭산의 마음의 기반은 당연히 영암에 있었다. 제헌의원과 3,4,5,6대 국회의원을 영암에서만 당선하셨으니 영암의 얼과 함께 하신 것이다.
바쁘신 정치일정 속에서 한번 씩 귀향을 하시면, 고향집에서의 첫 의례는 어머니(나의 외할머니)께의 인사였다. 외할머니는 안방 아랫목에서 국가적 거목(巨木)의 큰 절을 받으시고, 민망하신 듯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시면 그제서야 낭산은 좌정(坐定)하시는 것이었다. 연세 차이가 별로 없으시는 계모에게 동양의 깍듯한 예법을 꼭 지키셨다. 그리고 잊지 않고 권속(眷屬)들의 손을 꼭 쥐어주시며 어른의 도리를 다하셨다.
낭산은 고향에서의 늦은 밤 시간도 소중하시다. 찾아온 정객들과 군민들 친족들과의 대화가 끝나면 꼭 나를 찾으신다. 아련하게 남아 있는 영암의 산천을 모처럼 틈을 내어 가슴에 담고 싶으신 것이다. 교동리에서 회촌의 학교 앞까지, 또는 옛날 나고 자라신 생가 터가 있는 서우내까지의 밭두렁길을 좋아하셨다. 월출산 자락에 달이 환한 밤이면 더 좋고, 달이 없는 밤이라도 별빛 속의 풀섶에서 번득이는 반딧불이와 세상 근심 잊은 듯한 풀벌레소리도 그렇게 좋아하셨다. 이 좋은 고향의 풍광(風光)속에서는 황홀한 꿈을 이루신 듯 만족해 하셨다. 들길을 걸으시는 동안, 사람이 욕심내지 않고도 큰 뜻을 이루고, 바르게 사는 길을 넌지시 일러주시곤 했다.
이 때의 낭산은 정말 소박한 자연인이었다. 경기고보 동경제국대학 독일의 백림대를 두루 거치신 최고의 지성인, 일제에 맞서 ML당 사건 때는 일본 검사에게 독립조선의 헌법 제1조는 내가 쓴다고 일갈한 불호령, 조선 동아일보 등에서 특파원이나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 예리한 통찰력, 일제의 언론 탄압을 규탄하고 민족의 단결을 호소한 신간회사건, 우리 민족의 국학연구를 위한 조선어학회의 주도 등에서 나타난 강한 투지, 해방과 독립의 격동기에서의 열정 등은 이 아름답고 순수한 영암의 자연 앞에서는 잠시 접어두시는 듯 했다.
낭산의 자연주의와 인간중심주의사상은 많은 독서에서의 영향인 것 같다. 일제하의 7년 옥중생활을 하시면서 많은 고전들을 섭렵(涉獵)하셨다고 한다. 고문진보(古文眞寶),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 소동파의 적벽가(赤壁賦), 백낙천의 장한가(長恨歌) 등을 암송했으며, 두보(杜甫)와 이태백(李太白)의 시로 옥중의 심사를 달래셨단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슈펭글러의 독일어판 ‘서구의 몰락’은 8개월에 걸쳐 철저하게 완독하고, 신구약성서(新舊約聖書) 불교신역성전(佛敎新譯聖典)도 이때 독파하셨다고 한다.
나는 6-70년대 영암에서 사는 동안 서우내의 낭산 생가터에 고추 마늘 등 밭작물을 지으며 해방 당시 우리 살던 때 외갓집의 흔적들을 더듬곤 했다. 외할머니가 거처하시고 친척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안방과 대청마루, 외할아버지가 기침소리를 내시며 한문을 읊조리시고 손님들과 담소하시던 사랑채, 뒤꼍에 대나무 숲, 안마당에 박혀있던 작은 바윗돌, 옹달샘, 장독대, 해방 당시의 얼마 안되는 기간이지만 길게 느껴지는 외가의 흔적들이다.
따라서 낭산 생가를 복원할 때 나는 유일한 산 증인으로 몇 번이고 복구 현장에서 고증(考證)을 했다. 낭산이 나서 자라시며 꿈을 키우셨던 생가는 그렇게 지금 복원되었지만 낭산의 향기와 서슬같은 기개는 얼마나 되살아날지. 그 충정(衷情)을 생생히 기리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몫이다.
낭산이 재산으로 이 땅위에 남겨놓으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생존해 계실 때 장충동의 주택이 유일한 재산이었는데, 그나마 소유하신 지 몇 년 만에 야당시절의 정치활동 비용으로 넘어가버렸다. 그리고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둘째 따님(金子香)집의 방 한 칸이 고작이었다. 낭산은 물욕에 담담(淡淡)하고 초연(超然)했다. 해방 당시 일본인 경기도지사가 낭산의 고매(高邁)함을 알고 서울에 있던 그의 저택을 넘기려 했으나 낭산은 단호히 거절하셨단다. 영등포구 상도동의 꽤 많은 토지를 공인의 것이 되어야 한다며 동아일보사에 기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낭산 외숙의 생전 사시던 모습들이 조선 초기의 청백리 황희 정승의 일화를 꼭 떠오르게 한다.
영암의 선거구민이나 낭산을 따르는 국민들은 낭산의 정치노선에 재산을 털어 협조하신 분들이 적지 않지만, 낭산은 그 분들에게 어떤 대가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 분들은 오직 낭산의 바른 정치에 대한 바람으로 희생과 열정을 다 했을 뿐이었다.
낭산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나는 금호동의 거처에서 뵈었다. 겨울방학 때라 틈을 내어 어른께 문안을 드리러 간 것인데, 평소의 건강하신 모습 그대로였다. 76세의 고령이신데도 나라를 위한 열정은 여전하셨다. 인천에 조력발전소 건설의 당위성,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 시급히 처리를 해야 할 과제 등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설명하셨다. 두 평이나 될까하는 작은 방에서 독립투사이고 노정치가이신 나의 외숙을 내가 뵌 마지막 모습이었다.
‘학문의 최고봉에 이르시고, 평생을 나라와 민족만을 염두에 두신 분, 순박하셔서 재산이 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청렴결백의 극치’라고 친구인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 시인은 낭산의 일생을 평했다.
1972년 1월 7일, ‘郎山 金俊淵 선생’ 사회장(社會葬)에서의 서정주 작사, 나운영 작곡의 애도가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떠오른다.
‘콩으로 메주도 안되는 나라에서 / 진리이려 애태우다 가신 선생 /
영생하셨으니 / 영생에서 이젠 소원대로 하옵소서 //후략(後略)’
낭산의 꿈의 둥지였던 생가와 얼이 담긴 기념관을 바라보면서, 나의 외숙 낭산을 생각한다. 옳다고 믿는 일엔 물불 가리지 않는 고집에 혹시 고독하지나 않으셨을까. 아니지, 굽히지 않는 그 지조와 오염되지 않은 순수를 지키셨기에 후세의 사람들은 낭산을 기리 잊지 않으리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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