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청 최고참 공직자가 E-메일 띄운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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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행정

군청 최고참 공직자가 E-메일 띄운 사연

박태홍 기획감사실장,

"소재지 활성화 시책(사업) 제목만이라도 내달라"호소
"정년 얼마 안 남은 선배가 후배들 귀찮게 해" 사과도
'동료여러분! 얼마 전 영암군정책개발단을 발족하였습니다. 대강의 얼개가 나와서 정보 공유 차원에서 지상에 보도하였습니다.
동료여러분께 한 가지 협조를 구하고자 합니다. 영암군2020프로젝트의 1단계로 군소재지에 대한 10대 시책을 검토하고 있는데, 그동안 관내에서 자주 거론되었던 사항을 우선 담아봤습니다.
동료들께서는 1단계 군소재지에 대한 시책이 확정되기 전에 여러분께서 평소 생각해 오신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시책(사업)의 제목'만 저에게 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채택된 사항에 대해서는 인센티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공직자가 조용히 있지 못하고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건강하시고, 뜻하시는 일 모두 다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군 기획감사실 박태홍 실장이 지난 9월16일 오전 내부 인터넷을 통해 동료공직자 169명에게 띄운 E-메일이다. 얼핏 군정발전을 위한 통상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과정이겠거니 하겠지만, 실상은 요즘 군청 내 공직자들의 근무자세 또는 분위기에 대한 선배공직자의 깊은 고민까지 담겨 있다.
군청 내 최고참인 박 실장이 E-메일을 띄운 것은 민선6기 영암군정의 종합마스터플랜이 될 '영암 2020 프로젝트' 때문이다. 이를 위해 40대 안팎의 7∼8급 주무관 20여명으로 구성된 정책개발추진단을 꾸렸고, 직접 단장을 맡아 1단계 과제로 '영암군 소재지 발전계획 10대 과제'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과제를 놓고 난상토론을 이어갈 때마다 묘한 기류가 감지됐다. 활발한 의견제시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정책개발추진단에 낀 주무관들 대다수가 난감해했다. 다름 아니라 소속 과장이나 팀장들로부터 질타아닌 질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왜 다른 실·과·소 업무를 네가 거론하느냐', '아이디어를 냈다가 책임질 수 있느냐', 심하게는 '네 일이나 잘해라'는 등등의 핀잔을 들은 것이다. 핀잔의 강도는 '정식으로 인사발령을 내주면 일 하겠다'고 말하는 주무관이 있을 정도였다.
박 실장이 E-메일을 띄워 영암군 소재지 발전을 위한 '시책(사업)의 제목'만이라도 보내달라고 한 것도 같은 차원이다. 간부회의를 통해 실·과·소장들에게 전 직원의 아이디어를 받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에 적극적으로 응한 실·과·소장은 절반도 채 안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박 실장이 직접 팀장 이하 169명의 직원들에게 (공문)서식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니 시책 또는 아이디어의 제목만이라도 메일로 보내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박 실장은 올 7월1일자 정기인사로 주민복지실장에서 기획감사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년 7월이면 공로연수에 들어갈 예정이다. 동료공직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공직자가 조용히 있지 못하고 귀찮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쓴 이유다.
사실 그동안 군수와 부군수를 뺀 군청 내 최고위직(4급)인 기획감사실장에는 주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고참 공직자가 임명되곤 했다. 또 그 공직자는 그야말로 합당한 예우를 받다가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다. '정년대기소'로 부른 이유다.
반면에 박 실장은 1년 남짓 공직생활을 남겨두었으면서도 영암군의 최대 숙제인 소재지 활성화 계획을 추켜들었다. 뿐만 아니라 10대 과제를 추려 적어도 3개 과제에 대해 내년 본예산에 반영하고, 한 가지 사업이라도 마무리한 뒤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각오다. 잘못된 관례를 깼을지언정 군정업무의 컨트롤타워인 기획감사실의 수장으로선 분명 당연한 자세다.
E-메일 띄운 사연을 듣기 위해 찾은 박 실장은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선배가 후배들만 괴롭히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정년대기소로 전락하고 기획감사과로도 격하되면서 상실한 컨트롤타워 기능을 되찾기가 정녕 불가능해진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정도였다. 심지어는 지방자치제도 시행과 함께 군수가 바뀌면 열심히 일한 사실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따라서 그저 군수 입맛에 맞는 일만 찾아 시늉만 내면 되는, 무사안일 내지 복지부동의 근무관행이 영암군청 공직자들 사이에도 고질병폐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정말로 진정 영암읍 소재지를 살릴 정책 대안이 나오면 그만"이라며 극구 자제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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