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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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방문 9일째 이야기<13>

점심을 먹고 있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리어카를 끌고 논바닥으로 들어선다. 가만히 지켜보았다. 리어카에 실린 나무 가구의 문을 열자 닭이 쏟아져 나온다. 열댓 마리는 되어 보인다. 닭들이 논바닥에 떨어져 있는 벼이삭을 주워 먹느라 바쁘다. 그런 다음 녀석은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저렇게 닭을 데려다 이삭을 주워 먹게 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점심을 끝내고 논두렁을 따라 녀석에게 갔다. 무어라 물어도 씽긋이 웃기만 한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는 이삭이 남는다. 남은 이삭을 쥐도 먹고 새도 먹고 야생동물이 주워 먹으며 겨울을 난다. 저렇게 닭 모이도 된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면 저런 모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요즘 남한에서는 논바닥에 이삭을 남기지 않는다. 기계로 타작을 한 다음, 볏짚을 비닐로 말아 유산균으로 발효시켜 ‘곤포(梱包) 사일리지’를 만든다. 이 사료뭉치 하나면 소 50마리의 한 끼 식사가 된다고 한다. 논에서 볏집과 이삭이 사라지면서 야생동물에게 비상이 결렸다. 먹을 것이 없어져 생존을 위협받게 된 것이다. 남겨주는 미덕이 그리운 세상이다. 힘든 시절, 아버지 밥상을 곁눈질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남기신 밥 한 숟갈도 이를테면 이삭이 아니었을까.
곤포 사일리지를 먹는 소도 옛날을 그리워할 성 싶다. 작두로 볏집을 썬 다음 콩깍지와 쌀겨를 섞어 쇠죽을 끓여 소를 먹이던 시절, 마굿간에서 쇠죽을 끓이면 소가 냄새를 맡고 혀를 내둘리면서 침을 흘렸다. 소죽을 퍼주면 맛나게도 먹던 황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논두렁에 콩을 심어놓았다. 내가 농사를 지을 때도 논두렁콩을 심었다. 식량 자급자족을 외치던 시절이었다. 돔부콩을 드문드문 넣어 햅쌀로 밥을 하면 고소한 쌀밥 속에 섞인 포근포근한 콩이 부드럽게 입에 씹혔다. 자르르 기름기가 흐르던 햅쌀밥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인다.
한 농부가 달구지에 깻단을 싣고 느릿느릿 걷고 있다. 푸른 가을 하늘, 달구지에 깻단을 싣고 소 코뚜리를 붙잡고 집에 돌아가는 농부의 모습. 한 폭의 그림이다. 우리가 살아왔던 추억이 북녘 땅에 저렇게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리원 미곡협동조합
사리원으로 가는 길. 가로수 밑에 주민들이 앉아있다. 점심시간인 모양이다. 오른쪽으로 비닐하우가 여러 채 줄지어 서있다. 묘향산에서 보았던 반영구식 비닐하우스다.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을 방문했다. 농장 사무실 앞에 맨드라미가 곱게 피었다. 보랏빛 맨드라미꽃을 오랜만에 만났다. 10년 전이던가, 세계에서 제일 큰 나무가 있는 북가주 레드우드 국립공원을 방문했을 때 뜰에 피어있던 분꽃, 맨드라미를 보며 반가웠던 기억이 살아난다.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것은 무엇이던 기억 속에 담겨 있다가 반가움으로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조선속도로 세계를 앞서나가자”라는 구호가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써 있다. 도로에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벌판 저쪽에서 자전거에 볏집을 싣고 오는 사람이 보인다. 소달구지가 볏짚을 한가득 실어 나르고 있다.
홍보담당책임자를 만났다. 강경일이라는 젊은 분이다. 서른아홉이란다. 우리 일행을 높은 동산으로 안내한다. 들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사리원 시가 보인다. 시멘트로 지은 연립주택 형태의 마을이 산 아래 모여 있다. 저쪽 마을은 살구동네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마을 특성에 따라 이름을 지어 부른다고 한다.
원래 마을 앞 농토가 바다자리였는데 간척지를 막아 논이 되었단다. 협동조합 관할 논이 750정보라고 한다. 정보당 예상 수확량을 물으니 10톤 정도라고 한다. 지난 번 묘향산 가면서 나락을 벨 때 그곳 관리자는 5톤 정도라고 대답했는데, 산중 다락논과 평야 지역은 소출에 많은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수확량 중 60-70%를 국가에 납부한단다. 조합의 전체 농민은 2,956명이며 분조 규모는 20명 정도란다. 20명 단위로 생산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얘기이다. 개인 텃밭은 한 가구당 30평이란다. 공동으로 작업을 하게 되면 능률이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사상교육이 잘 되어있어 그런 염려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젊은이들의 결혼은 문제가 없을까 싶어 운을 떼었다. 청년동맹원들이 합숙소에서 생활하더니 올해 3쌍이나 결혼을 했다고 자랑을 한다. 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하여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별다른 어려움 모르고 넘어갔다고 한다.
장마장 얘기를 꺼냈다. 각자 다른 생산품을 가지고 나와 서로 바꿀 수 있는, 이를테면 물물교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시장 형태라고 대답한다. 보통 행정구역 단위로 장이 서고, 이쪽 지역은 열흘에 한 번씩 장마당이 열린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장마장이 열리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 공화국은 생산, 분배, 교환, 소비의 경제형태가 완벽하게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며 본인의 의견을 피력한다.
“전기사정이 긴장하지 않습네까”
“그렇습네다”
운전사 방동무가 물으니, 안내원이 답변한다. 전기사정이 좋지 않다는 얘기다.
최제원씨 댁을 방문하다
농가를 방문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러시라며 선선히 앞장을 선다. 길가 담 밑 텃밭에 배추가 탐스럽게 여물었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니 마당을 빙 둘러 파, 무, 배추, 미나리 등 채소를 심어놓았다. 감나무에 감이 탐스럽게 열렸다. 방문 앞에 ‘10 인민반 최제근’ 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다. 바로 밑에 ‘선군생활문화 모범가정’이라는 표창장이 액자에 넣어 걸려있다. 방충망 뒤로 거실이 보인다. 주인이 나와 반갑게 맞아준다.
방에 들어가 통성명을 했다. 나이를 물으니 올해 예순아홉이시란다. 비닐 장판이 깔려있고, 테이블 위에 TV가 놓여있다. 예쁜 커버를 씌워놓았다. 방을 둘러보니 ‘장군님 식솔’이라는 액자가 문지방 위에 걸려있다. 한 장짜리 달력이 유리문에 붙어있고, 졸업사진과 표창장이 벽에 걸려있다. 가족사진을 여러 장 액자에 넣어 걸어두었다. 몇 가지만 빼면 우리네 옛 시골 안방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벽시계가 2시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어떻게 살아가시냐고 물었다. 장군님 덕택에 잘 살고 있다는 답이 돌아온다. 방바닥에 공책이 펴 있어 집에 학생이 있냐고 했더니, 좀 전에 손자가 숙제를 하더니 놀러나간 모양이라고 대답한다.
방바닥에 놓여있는 공책을 펼쳐보았다. 초등학생 국어 노트다. “짐승 다루는 말, 이라는 제목 아래 (소-이랴, 와와), (돼지-꿀꿀...), (고양이- 야웅), (말-쩌쩌), (닭-꺼꺼...),(개-뭉툴이)” 라고 씌여있다. 개는 왜 뭉툴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병아리를 보고 기를 쓰고 쫒아 오던 족제비는 개가 나타나자 기가 죽어 비실비실 뒤걸음을 쳤다”는 문장을 써놓았다. ‘기를 쓰고’와 ‘기가 죽어’를 넣어 짧은 글짓기를 하라는 숙제인 모양이다.
또 다른 페이지에는 “물음문- 공원에 가니?, 추김문- 공원에 가자, 시킴문- 공원에 가거라” 하는 내용도 있다.
옆방을 좀 구경할 수 있냐고 했더니, 그러시라며 안내 해준다. 아주머니가 먼저 들어가 얼른 방을 치우신다. 창문 왼쪽에 재봉틀이, 오른쪽은 책장이 놓여있다. 책장 앞에 작은 책상이 놓여있는데 손자 공부방으로도 사용하는 모양이다. 곡식포대가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이동식 작은 버너에 불을 붙혀 매탄가스를 켜 보인다.
취사는 어떻게 해결 하시느냐고 물었다. 매탄가스를 이용한다고 한다. 가축의 분뇨를 한데 모아두면 가스가 나오는데 그것을 이용한다는 얘기다. 부엌으로 안내를 해서 이동식 작은 버너에 불을 붙혀 가스를 켜 보인다. 올망졸망 부엌살림이 보인다. 냄비도 보이고 얇은 망사로 덮어 놓은 음식물도 보인다. 부엌 바닥에 상을 펴놓고 며느리가 수돗물을 내려 설거지를 하고 있다. 이 시간에 며느님이 집에 있는 걸 보니, 손님이 온다고 불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최제근씨 집을 나와 들판 가운데 타작현장을 가보기로 했다. 트렉터를 이용하여 타작을 하는 현장이다. 마침 휴식 시간이다. 일하는 분들과 얘기를 나누고 나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니 아가씨가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친다. 어렵게 사진을 찍었다. 티 없이 웃는 아가씨의 모습이 가을 하늘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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