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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평 작사가의 작품에는 고향의 풍경과 정서, 그리고 잊히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자연스레 스며 있다. 이번 기획은 그의 작사 인생을 되짚는 동시에, 영암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그의 언어와 감성의 근원이 되었는지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편집자 註>
작사가 김지평 선생은 영암을 노래하고, 추억하였던 시대의 가객이다. 이제는 체험하지 못하고, 추억으로만 남을 바닷가 영암의 옛 정취를 노래에 담아 고향 땅을 늘 그리던 사람 김지평 선생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노래의 모티브가 영암천 모래사장이라고 잘 알려진 ‘당신의 마음’, ‘숨어우는 바람소리’ 외에도, 가사에 월출산과 회문리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어린 고향’, 그리고 도포 해창에서 배(영암호)를 타고 영산강 줄기를 따라 목포항을 드나들던 시절을 노래하는 ‘뚜야의 편지’ 등은 고향 땅을 추억하는 그의 대표적 노래이다.
선생은 덕진면 금산마을 출신으로 영암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작사가로 데뷔하기 전 사형수를 담당하는 교도관이었는데, 사형수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영감에 어릴 적 뛰놀던 영암천 모래밭의 정취를 담아 ‘당신의 마음’을 작사하였다. 이 작품으로 작사가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전업 작사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작사가로 전업 후 가톨릭 성음음악원에서 시창, 청음, 화성, 창작, 반주, 지휘 등 12과목을 이수하고 작곡가로도 데뷔하였다. 음악전문 출판사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며 서울예대와 명지대 실용음악과에도 출강하였다. 그리고 1985년부터 2019년까지 약 25년간 KBS와 MBC에서 <세월따라 노래따라>. <세월60년 노래60년>, <해방50년 노래60년> 등의 구성 및 해설을 맡아 활동하였다.
한편 저술 활동도 활발하게 하여 『한국가요정신사』, 『십대들의 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 『한국가요백년사 인물총선』, 『우리노래 대전집』, 『각곡 해설 가요반세기』, 『레코드 해설판 한국가요 반백년』, 『가수가 되려면』, 『이야기로 엮은 팔도민요집』, 『해설판 학생애창 건전가요』 등을 저술하여 대중음악의 역사를 정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인생은 미완성 - 만남은 완성]
5월 광주 5년 후인 1985년 봄, 광천동에서 자취하던 같은 반 친구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대로가 뚫리면서 번화한 곳으로 변했지만, 그 당시 광천동은 작은 개천이 흐르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달동네 같은 곳이었다. 빈 좌석 없는 시내버스에 올라 손잡이를 잡고 버티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귀에 박히는 노랫말이 들어온다. “~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걸 ~” 청량한 목소리를 가진 ‘이진관’이란 가수의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였다. 고등학교를 광주로 진학하며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하던 시절이라 철학적 노랫말에 더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는 김지평 선생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노랫말을 쓴 분이 누구인지 몰랐고, 더구나 고향 영암의 선배님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영암에도 이런 대단한 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40년이 지나 2025년 가을 선생을 나주역에서 처음 뵈었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훤칠한 키와 건강한 자세에 놀란다. 차에 올라 영암으로 내려오는 길에 영암의 대표적 명소인 월출산에 대한 화두를 꺼내신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월출산 만한 산이 없다며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내신다. 독보적 절경을 가진 월출산에 아직 기찻길이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시며, 다른 지역의 관광지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순환 관광열차라도 나주역과 연결된다면 월출산을 방문하는 데 큰 도움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선생의 말씀을 빌리면, 우뚝 솟은 월출산과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이란 천혜의 자원을 가진 영암의 관광은 아직 미완성이다.
[당신의 마음 - Glory 영암]
박정희 정권이었던 1973년은 대한민국 가요사에 영암의 인물들이 한 획을 그었던 해이다, TBC 제9회 방송가요대상에서 남자 가수상에 남진, 여자 가수상에 하춘화, 작사상에 방주연이 부른 ‘당신의 마음’을 작사한 김지평 선생이 각각 수상하였다.
그해 작곡상에는 패티 김이 부른 ‘이별’의 작곡가 길옥윤이 수상하였는데, 작곡상을 제외하고 세 분야를 영암 출신의 향우들이 가요대상을 휩쓸었다.
영암 삼호 출신의 남진, 영암 출신으로 익히 알려진 하춘화, 영암 덕진 출신의 김지평 선생이 한자리에 서서 영암사람의 문화적 위상을 휘날렸지만, 당시에는 서로 영암 출신임을 몰랐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인 김창조 선생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영암골에 그대로 남아 후배 음악인들에게 깃들인 듯하다.
‘당신의 마음’은 영산강이 막히기 전 바닷물이 드나들던 너른 영암천 바닷가 모래밭을 추억하며 썼던 곡이다. 작사상을 수상한 김지평 선생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무애(無涯) 양주동(梁柱東) 박사로부터 노랫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크게 찬사를 받는다.
그 후 심사위원으로 인연을 맺은 양박사로부터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몇 번의 소식을 드린다. 드디어 양 박사께서 광화문에 있던 동아일보에 원고를 주러 가는 일이 있어 그 사옥 앞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게 되는데, 열정 가득했던 젊은 김지평 선생의 즐거운 환호성이 들릴 듯하다.
[고우신 어머니 - 오일장 국밥]
“돈 사러 가는” 어머니를 따라 영암 오일장에 나올 때면 고향마을 덕진 금산마을에서 덕진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다리 밑 흐르는 물 위로 던졌다고 한다.
과거 덕진 여사가 이 다리를 놓으면서 많은 비가와도 언제든지 다리를 건너 영암 소재지에 나다닐 수 있게 됨에 감사드리는 인사였는데, 오랫동안 전해오는 덕진 사람들의 관습이었다고 한다. 돈이 귀했던 시골 마을에는 동네 한 바퀴를 다 돌아도 급전을 구할 수 없었기에 5일마다 돌아오는 영암장이면 집 안에 있는 곡식, 채소 등 돈 될 것을 갖고 나가 좌판에 앉아 물건을 팔았는데 이를 어른들은 ‘돈 사러’ 간다고 표현하였다.
“빗발은 못 들게 하고 햇볕은 들게 하신” 선생의 어머니는 아들을 장터 국밥집에 앉혀 국밥 한 그릇 시켜준 후에 정작 본인은 바리바리 싸 오신 이러저러한 물건들을 들고 돈 사러 다니느라 국밥 한 그릇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다. 아들은 그 국밥 한 그릇을 먹으면서 어머니가 가져온 물건을 다 팔고 올 때까지 어떤 날에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고단했던 그 시절 혼자 먹던 영암장 국밥을 잊지 못했던 선생은 나주역을 출발한 후 월출산이 보일 즈음 늦은 점심 식사 제안에 ”간단히 국밥 한 그릇이면 좋아요.”라고 답하신다. 뜨끈한 국밥 한 그릇 하기 위해 영암 터미널 앞 국밥집에 들어서는데 우연히 시종 오 선배도 지인과 늦은 점심을 하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서로 인사를 나눈 후 돼지국밥 한 그릇을 두고 선생은 어머니와 추억을 되새기며 천천히 음미하는 동안, 오 선배가 식사를 마친 후 우리 식사비까지 내주며 유쾌하게 먼저 국밥집을 나선다. 그리웠던 오일장은 아니었지만, 고향의 국밥 한 그릇의 정겨움은 둥지를 지킨 어머니의 사랑처럼 선생에게 기억될 것이다.
글쓴이 조정현은 영암사람으로 현재 영암군민신문의 ‘낭산로에서’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2년 『1953년 영암군향토사』, 2023년 『일제강점기 영암군 현황 및 독립운동사』, 그리고 2024년과 2025년에 걸쳐 영암문화원에서 추진한 『영암인물사』 발간에 참여하였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5.11.2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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