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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정리委 ‘진실규명’ 결정
“지금 이 기분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지난 18일 축하의 말을 전하는 친지와 지인들, 그리고 각종 언론기관에서 인터뷰 요청 등 쉴새없이 핸드폰 벨이 울려대는 순간 순간 대화가 끊겼지만, 이정근(63·축산업·사진)씨는 상기된 표정으로 “가슴에 맺힌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억울하게 살인죄 누명을 쓰고 징역 2년과 징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11개월여를 복역한 그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게된 것이다. 억울함 때문에 눈물로 세월을 보낸지 무려 28년 만이다.
80년 5월 당시 34세의 젊은이였던 그는 해남 옥천지소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광주로 올라가 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상무대 영창에서 조사를 받던 중 청천벽력같은 살인혐의 누명을 쓰게 된다.
사연인즉 80년 5월 23일 신북면에서 당시 전남대 농과대 1학년에 재학중인 박문규(당시 18세)씨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사건발생 30분전에 이씨가 사건현장을 지나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이날 총기를 탈취해 광주로 향했지만 계엄군의 바리케이드에 막히자 고향인 도포면으로 내려오던 길이었다.
그러나 계엄하에서 포고령 위반 혐의로 상무대 영창에서 조사를 받던 이씨를 경찰이 상해치사 혐의로 불법구금하고 구타와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등 인권침해와 가혹행위를 가했다는 점을 진실화해위가 주목한 것이다.
모진 구타와 고문에도 이씨는 혐의를 부인하며 목격자들과의 대질신문을 요구했지만 번번히 묵살당했고, 영문도 모른채 경찰의 강압에 못이겨 지장을 찍었다.
도포면이 고향인 이씨는 복역 후 이웃의 따가운 시선에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었고, 아내와 네 딸을 데리고 영암공원내 폐가를 고쳐 살면서 정신적인 충격과 가혹행위의 후유증으로 일을 할수 없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자식들에게도 죽기전에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지난해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떳떳합니다. 특히 자식들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합니다”
이씨는 위원회로부터 서면 통보를 받으면 사법당국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고, 그동안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도 청구할수 있게됐다.
/변중섭 기자
변중섭 기자 jusb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