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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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 방문 14일째 이야기<23>

아침 식사는 호텔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손님은 우리 일행 뿐이다. 식사 후 산책을 나갔다. 인도를 따라 여인들이 백팩을 메고 걸어간다. 출근하는 모양이다. 남자들도 백팩을 메고 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잘 지은 멋진 기와집이 보여서 무슨 건물이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다. 신흥관이라고 한다. 함흥냉면의 본산이란다. 평양에는 옥류관이요 함흥에는 신흥관이라는 얘기다. 함흥에 왔는데 함흥냉면 맛을 보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점심을 여기서 먹자고 한다.
‘함경남도 혁명사적관’ 건물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을 올라갔다. 언덕 높은 곳에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서있다. 멀지 않은 소나무 우거진 쪽에 자그마한 정자가 보인다. 성천각이라고 한다. 정자에 올라서니 시내가 한 눈에 바라보인다. 함흥이 아침 안개에 쌓여있다. 어제 건너왔던 성천강 다리 위로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저 강을 경계로 동쪽은 농업지구, 서쪽은 공업지구로 나눠진다고 했다.
사람들이 오갈 뿐, 자동차는 보이지 않는다. 출근 시간이면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에 시달리던 생각을 해 보니 별 세계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30여명 남녀가 줄을 맞추어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다. 무엇하러 가는 사람들이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다. 김일성 김정일 동상에 인사하러 가는 행렬이라고 한다. 회사 설립일이나 결혼 같은 특별한 날에 지도자에게 인사하는 것은 주민들의 일상생활의 하나라고 설명 해준다.
흥남비료공장 방문
흥남을 향해 출발 한다. 운전사 방 동무의 처갓집이 이 부근이라서 어제 저녁 다녀왔다고 했다. 처갓집 다녀온 얘기를 한다. 처 할머니가 86세이고 장인은 47세이신데, 두 분이 식사 때마다 반주 한 잔씩을 빼지 않는다고 한다. 3대가 함께 산다고 했다. 평양에서 대학을 졸업한 다음 지방에서 일하고 있는 처남을 칭찬한다. “…고런 징표를 다 갖췄으니, 소꼬리 보단 닭대가리가 되겠다고 지방에 내려온 기 아니겠시유.”
3대가 함께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북한에 그런 가정이 많은가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주택공급의 한계도 있지만, 그 보다는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게 아이들의 교육은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가족제도의 장점이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노년을 양노원에서 보내는 서구식 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전통적 미풍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당연한 얘기다. 날이 갈수록 핵가족화 되어가는 현실에서 그럴 수 없어 아쉽지, 자식이 부모를 모시며 사는 것 보다 더 좋은 일이 사실 어디 있겠는가.
함흥 시내를 빠져 나간다. 인도 위로 우마차가 지나간다. 마부는 마차 위에 걸터앉아 끄덕 끄덕 소를 몰고 간다. 소 뒤에는 소똥을 받아내는 똥받이를 달아놓았다. 그 옆으로 사람이 걸어가고, 자전거가 뒤따르는 모습이 보인다. 바로 뒤쪽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평양, 함주 간을 운행하는 기차라고 했다. 교통순경이 자동차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9시경 흥남비료 공장에 도착했다. 말로만 들어왔던, 일제가 1930년에 세웠다는 비료공장이다. 정문에 ‘26호모범기대련합기업소’라는 표지가 보인다. 이 비료공장은 해방 이후 한국의 최대 비료공장이었다. 분단이 되면서 북한은 남한에 대한 비료공급을 중단했다.
<<남한은 자력생산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화학비료를 전량 수입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독일정부가 광부들의 송금을 담보로 한국정부에 1억5천만마르크(3천만달러)를 빌려주어 처음으로 비료공장이 세워졌다. 1964년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77달러, 필리핀 국민소득은 170달러, 태국은 260달러였으니 한국이 얼마나 가난한 나라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이 국민소득 3만달러를 오르내리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
공장 입구에 “검사원의 아낌없는 찬사” 라는 큰 글씨로 쓴 간판이 보인다. 그 밑에 <2보수직장 제관 2반 용접공 홍성일 동무 주야간 계속되는 가스청정직장 변탈 1,2탑 환산관 교체작업에서 속도와 질을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 모든 사람들 감탄!>이라는 사연이 적혀있다.
자전거를 타고, 혹은 걸어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는 사람은 출근하는 사람이고 나가는 사람은 퇴근하는 사람들이다. 근무 교대를 하는 모양이다.
공장을 걸어서 들어간다. 한 건물 앞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다녀가신 건물”이라는 글씨가 빨강색 바탕에 금빛 글씨로 걸려있다. “백두산의 아들 김정일 장군을 천만년 높이 받들어 모시자!”라는 글이 백두산 그림 위에 크게 써 있다.
홍보관으로 안내를 한다. 흥남비료공장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이 년도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다. “흥남비료공장은 우리나라의 비료생산에서 생명선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 어록이 사진과 함께 벽에 붙어있다. 6·25사변 때 폭격으로 공장이 파괴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건설되었고, 2011년 10월 요소비료를 생산하게 되었다는 얘기 등을 안내원이 청산유수로 설명한다.
종업원은 산하 공장 4개 직원을 포함 약 7천명이라고 한다. 공장 안에 화학공업대학이 있다고 한다. 80만톤 질소를 생산할 예정이었는데 금년은 100% 달성했다고 한다. 요소는 논농사에 필요하고, 질소는 밭농사에 필요하다고 한다. 종업원들이 24시간 3교대로 근무를 하고 있으며, 공장은 40만㎡ 넓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갈탄재로 블록도 만든다고 한다. 전기 때문에 고전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날이 가물어 수력발전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해 전기사정이 호전되지 못하는가 싶었지만, 금년 농사가 풍년이라니 다행이다.
“이 분이 꼭 아바이 같아요” 김 참사가 한 마디 한다. 인상도 좋고 안내하는 태도가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그제서야 안내원이 이전에 이 공장의 부지배인이었다고 자신을 밝힌다.
문을 나서는데 ‘나들문’이라고 써 있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문이라는 뜻인 모양이다.
안내원이 ‘주은래 방문 기념비’앞으로 안내한다. 1958년 주은래 중국수상이 이곳을 방문했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다.
공장 곳곳을 안내하는데 잘 보이는 곳에 시 한 편이 걸려있다. <인간의 도덕>이라는 제목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면서 지켜야할 도덕 / 그 모든 것 법이 자기의 조항으로 못다 밝히고 / 못 미친 생활의 구석을 도덕이 환히 불을 켜고 있다 // 그 불빛은 환히 자기량심과 사람들의 눈 / 그것이 때로는 법보다 더 무서운 것이거니 사업에서 실수는 만회할 수 있어도 / 한번 저지른 도덕의 실수는 일생을 두고 회복하기 어렵어라 / … / 물에 빠진 아이들을 건지려 남 먼저 얼음구멍에 뛰어들지 않았다고 / 법의 판결을 받게 될 것인가 // 사람이 사람으로 존경받는 것 직위냐 권세냐 / 아니여라 그의 마음 속에서 도덕 빛날 때 인간이 인간으로 존경받을 수 있고 // … 아름답게 살자 젊은 날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 늙은날엔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한생을 보람높이 살고 싶지 않은 사람 / 이 세상에 있으랴!//
꽤 긴 내용이다. 그렇지만 삭막한 공장생활에 시 한 편이 주는 위안과 위로는 작지 않으리라. 서울의 지하철 곳곳에 붙어있는 좋은 시들이 그러하듯이.
공장을 둘러보아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여성 공장장이 뒷짐을 지고 계기를 살펴보고 있기에, “일하는 분들이 다 어디로 갔나요?” 하고 물으니 빙긋이 웃기만 한다. 다시 밖으로 나와 걸어 나오는데 공장 한 켠에 “장군복 태양복 수령복” 이라는 글씨가 크게 보인다.

바람찬 ‘흥남부두’
흥남부두 전경
흥남부두 쪽을 향해 떠난다. 차에 올라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현인이 불렀던 ‘굳세어라 금순아’란 노래다. 노래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자리에 앉은 김 참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바닷가 방파제에 다다랐다. 흥남부두가 멀리서 보인다. 부두 중앙쯤에 거대한 크레인이 서 있고, 오른쪽으로 군함이 보인다. 항구 앞 작은 섬은 ‘대진도’라고 했다.
말로만 들어왔던 흥남부두. ‘국제시장’ 이라는 영화를 통해 더 널리 알려진 항구. 1950년에 저 항구를 통해 흥남철수작전이 펼쳐졌고, 미군과 함께 10만명 피난민이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갔다.
한국전쟁 당시 함경남도 장진군 고토리의 ‘장진호 전투’는 그 어떤 전투보다 치열했다. 영하 30~40도의 혹한 속에 12만 중공군에 포위된 미 해병대 1사단 장병 1만5천명은 전멸 위기에 처했다. 당시 미 해병은 중공군을 상대로 17일간 사투를 벌이며 이들의 남하를 저지했고, 10만명의 피난민이 흥남 부두를 통해 탈출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장진호 전투의 대단원은 ‘흥남 철수’의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이렇게 간단한 몇 줄로 당시의 상황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이 없을까 살펴보던 중, 다음 글을 읽게 되었다. 2015년 1월 7일자 한겨레신문 칼럼이다.
“흥남 철수는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 실패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철수는 기적적인 성공이었지만, 맥아더의 무모한 북진작전은 미군 전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실패였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애초 조중 국경선에서 50㎞ 이남까지만 북진하라고 명령했지만, 맥아더는 정치적 야망 때문에 이 명령을 무시하고 전면적인 북진을 지시했다. 중국 인민군의 개입에 대해서도 오판했고, 그들의 전력을 무시했다. 그 결과 중공군의 유인과 매복 전술에 휘말려 모진 희생을 낳으면서 38선 이남으로 퇴각했다.
개활지가 많은 서부전선은 그래도 나았다. 협곡과 산악지대를 통해 북진했던 동부전선의 상황은 참혹했다. 50㎞의 협곡으로 철수하면서 미군은 무려 6500여명의 장병과 군속을 잃었다. 함흥에 도착했지만 중공군은 이미 원산을 장악하고 있었다. 탈출로는 바다밖에 없었다.
맥아더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26개 이상의 원자폭탄을 북쪽 지역에 투하하려 했다. 1950년 11월26일쯤 모든 전선에서 철수 명령을 시달하면서, 그는 동해에서 서해까지 국경 지역을 방사능 낙진으로 덮어버리겠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전면적인 흥남 철수를 명령하고, 12월9일 그는 다시 원폭 사용에 대한 재량권을 본국에 요청했다.
당시 주민들 사이에서 원폭 투하는 기정사실처럼 되어 있었다. 설사 원폭이 아니더라도, 포격 때문에 그곳에선 쥐새끼 한 마리 살아남기 힘들었다. 당시 함흥 일원에 쏟아 부은 함포 및 로켓포는 인천상륙작전 때의 1.7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주민들은 앉아서 죽으나 가다가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최선은 미군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그곳은 폭격을 당하지 않을 테니까. 수많은 금순이와 오빠들이 미군을 따라 흥남부두로 몰렸다.”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흥남부두로 몰렸다. 죽고 사는 일이 가랑잎 같은 배 한 척에 달려있었다.
흥남철수는 미군 철수를 위한 작전이었다. 피난민을 데리고 가는 계획은 원래 없었다. 피난민을 태우자고 미 10군단장을 끝까지 설득한 사람은 고(故) 현봉학 박사였다. 그는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의사로, 미국 측을 설득해 9만8천여명의 피난민을 미군 수송선을 통해 남으로 내려오도록 했다.
흥남철수를 얘기하면서 1950년 당시 35세 ‘레너드 라루’ 선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7천600톤급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이었다. 선원은 12명. 흥남에 입항하여 퇴각하는 미국해군에 연료를 공급하고 돌아갈 계획이었다. 추위 속에 떨며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영하20도. ‘자동차 엔진이 얼어 터지는’ 추위라고 미군들이 당시를 기록했다. 강풍 몰아치는 부두에 서서 애원하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 선장은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을 태우시오. 타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한 척의 배에 구출한 인원이 1만4천여명. 기네스북에 기록될 만큼 많은 인원이었다. 배가 항구를 출발했다. 미국 군함이 계속 포를 쏘아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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