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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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청춘의 사랑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오후에는 창전거리에 있는 살림집을 가보자고 한다. 사리원 부근 협동농장 주민 아파트를 방문한 후, 도시 주민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던 터였다.
창전거리 아파트면 지은 지 오래지 않은 고급아파트다. 60년대에 지었던 아파트를 헐고 2012년에 새로 만든 건물이라고 했다. 이곳 아파트가 어느 정도 규모냐고 물었더니 3천 세대 정도라고 한다. 3천 세대? 꽤 큰 마을이다.
2층 1호다. 주인 김혁씨가 맞아준다. 나이를 물으니 서른다섯이라고 한다. 아내는 아이가 아파 병원에 데리고 갔다고 한다.
거실에 소파가 놓여있고 바로 위 벽에 표창장과 사진이 걸려있다. ‘로력영웅표창장’이다. 평양방직공장 직포공 문강순, 이라고 되어있다. 문강순이 아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두 부부가 김정숙 평양방직공장에 함께 근무한다고 했다. 아이는 한 살 일곱 달인데, 이름이 김복동이라고 한다. 이름이 좋다고 말했더니 빙긋 웃는다. 전화기 한 대가 거실 바닥에 놓여있다.
아파트는 방 다섯 개, 화장실, 부엌, 식당 거실로 되어있는데 140평방미터라고 한다. 평수로 치면 몇 평이나 될까. 방을 좀 돌아볼 수 있냐고 묻자 앞장서 안내를 한다. 아이 방은 작은 침대가 있고, 그 옆에 놀이기구들이 놓여있다. 비행기, 오뚜기, 꼬마 인형 같은 장난감이 정리되어 있다. 침대 위 벽에 아이와 엄마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서재는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책상 위에 사전 몇 권과 라디오가 보이고, 그 위로 김일성 사진과 함께 어록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다. 방 하나에는 “당이여 그대는 어머니”라는 족자 하나가 달랑 걸려있다.
부엌, 안방, 화장실, 등을 돌아보았다. 단촐하고 꾸밈없는 소박한 살림살이다. 방이 다섯 개라 하지만 모두 자그마한 넓이다.
김정은 부부와 이집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거실 벽에 걸려있다. “2012년 원수님이 래방하셨을 때 찍은 사진”이라고 소개 한다. 원수님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냐고 물었다. 원수님께서 아들이면 좋겠나 딸이면 좋겠나 물으셔서, 아들이건 딸이건 건강한 아이면 좋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아내 얘기를 꺼낸다. 어릴 적 고아로 자라 중학을 졸업한 후 입사했는데, 직장에서 영웅칭호를 받을 만큼 열심히 일했고, 지금은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이라고 한다. 남한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자리다. 어떻게 그런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며 얘기를 시작한다.
본인은 함경남도 북청읍 출신이라면서 북청을 아시냐고 묻는다. 그곳 출신이 생활력이 강한 분들이 아니냐고, 남한에서는 북청하면 ‘북청물장수’가 떠오를 만큼 많이 알려진 지역이라고 대답했다. 이준 열사의 고향이라고 덧붙인다. 그 사실은 처음 알았다.
북청에서 중학을 졸업한 다음 군에 입대하여 제대한 후, 김책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여 2005년 졸업했다고 한다. 대학생 때 신문 기사를 보고 지금 아내를 공장으로 찾아 갔다고 한다. 처음 만난 사람을 보고 “나를 만나러 온 남자는 많다, 그리고 일을 더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결혼할 수 없다”며 돌려보내더란다. 그러면서도 “기다릴 수 있으면 기다리라”고 한 가닥 미련을 남기더란다. 그 후,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3년 간 교제한 다음 정이 들어 결혼을 했다고 한다. 재미있지 않는 연애 담이 있겠는가마는 사연이 재미있다. 용자취미(勇者取美), 용기 있는 사람이 원하는 여인을 얻을 수 있다.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문짝에 다음과 같은 글이 붙어있다. “확인 합시다! 가스 불, 전기, 물?” 집을 떠나기 전에 다시 확인하라는 의미일 터이다.
나오면서 보니 복도에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안내판이 걸려있다. 안내판 중앙에 “평양시가 모든 면에서 전국의 모범이 되자!”라는 말이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적혀있다. 새소식란에는 “20층 2호 리종기 할아버지! 잔디밭 물주기 사업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일반인의 자랑, 란에는 해당 아파트 호수가 소개되어 있다.
바로 옆에 ‘선군생활 문화 모범가정 수여기준’이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선군시대의 요구에 맞게 사회의 세포인 가정을 철저히 혁명화 하여야 한다. 시대적 요구에 맞게 살림집을 문화적으로 꾸리고 거두는 것을 비롯하여 가정살림살이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원숙하게 풀어나가도록 하여야 한다. 선군시대의 요구에 맞게 옷차림과 몸단장을 바로하고 다니도록 하여야 한다. 언어생활의 문화성을 높이고 례의도덕을 자각적으로 기켜야 한다. 식생활의 문화수준을 높여야 한다. 유휴자재수매사업과 저금사업에 적극 참가하여 세대 앞에 맞겨진 경제과업을 100% 수용하여야 한다. 혁명적경각심을 높이고 거주, 퇴거, 숙박 등록질서를 잘지켜 한 건의 사고도 없어야 하며 민간반 항공훈련에 적극 참가하고 가정의 반화학가방을 지참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은 기준을 정해 놓고 절차에 따라 모범가정을 선정하는 모양이다. 하나씩 살펴보니 의식주를 비롯한 일상생활 전반에 관한 규범이다. 상을 수여하는 기준이니 강제조항은 아니겠지만 큰 소리로 부부싸움을 한다거나, 눈에 거슬리는 옷차림을 하고 나다닐 수는 없겠다. 경우 없이 떠들고 이웃의 불편이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살아가는, 일부 남녘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사리원부근 농가를 방문했던 일이 떠오른다. 수준이 사뭇 다르지만, 그 곳과 이곳을 수평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울 성싶다. 농촌과 도시는 그 환경부터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 창전거리는 평양에서도 알아주는 지역이니까. 남한도 마찬가지다. 시골집과 서울의 고급 아파트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을 터이다.
평양방직공장 방문

평양방직공장은 대동강변에 있었다. 오늘 우리가 방문했던 살림집 주인 김혁 부부가 근무하는 공장이다.
안내원이 홍보관에서 안내를 시작한다. 1948년 세워진 이 공장은 현재 종업원이 8천500명, 3교대로 근무한다고 했다. 북한의 5대 방직공장 중 가장 큰 곳으로 국내 의류의 3분의 1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공장의 역사, 생산량 등의 통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다.
1967년 홍수피해가 심각했으나 곧 복구 되었고, 1986년 서해갑문이 완공 된 후 홍수로부터 안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시된 사진 가운데 김혁씨 안방에 걸려있던 것과 같은 사진이 보인다. 김정일을 비롯 김혁의 부인 문강순과 공장 직원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 바로 옆에 문강순 인터뷰 기사가 액자에 넣어 걸려있다. 2011년 11월 11일자 로동신문이다. 전면 기사다. 경공업 전선의 미더운 새 세대 선구자, 라는 제목 아래 ‘평양방직공장 직포공 문강순 동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사진이 함께 나와있다.
기사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4만2천710m! 이것은 직포공 한 명이 2년 동안에 짜야할 천이다. 그러나 평양방직공장의 한 처녀는 그것을 단 1년 동안에 짰다. 그녀는 그렇게 지난 13년 동안 해마다 년간계획을 두 배로 완수하여 총 555,234m의 천을 짜냈다. 이처럼 많은 천을 짜고도 처녀는 자기가 한 일이 크다고 생각할 줄 모른다….” 신문 한 면이 그녀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이 신문 기사를 보고 김혁씨가 아가씨를 찾아갔던 모양이다.
홍보관 귀퉁이에 “그이 없인 못살아”란 시 한 편이 걸려있다. 다가가 읽어 보았다. 김정은을 찬양하는 노래가사이다. 1절부터 3절까지인데 매 절마다 후렴이 있다. “친근하신 그이의 정 가슴에 흘러 / 자나깨나 그 숨결로 따뜻한 마음 / 하늘같은 인덕과 믿음에 끌려 / 우리 모두 따르며 사네 // (후렴) 그이 없이 못살아 김정은 동지 / 그이 없인 못살아 우린 못살아 / 우리의 운명 김정은 동지 / 그이 없으면 우린 못살아…”
안내원이 기숙사를 둘러보시겠냐고 묻는다. 공장건물과 떨어져 있는 7층 건물이다. 침실, 식당, 도서관, 병원, 매점, 옷수리점, 목욕탕 등 부대시설을 둘러보았다. 꽤 넓고 쾌적한 휴게실 한쪽에 아까 보았던 “그이 없으면 못살아”라는 노래가 걸려있다.
직공은 중학을 졸업 한 처녀들이 많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본인이 원하면 계속 근무할 수 있고, 남편이 지방출신이면 평양으로 불러서 함께 생활할 수도 있다고 한다. 6개월 정도 교육을 시킨 다음 현장에 배치한다고 했다.
숙소로 돌아와 7시경 저녁 식사를 마쳤다. 혼자서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잔디밭 가 시멘트 블럭에 관리원 이름들이 써 있다. 그 부근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의 이름인 성 싶다. 젊은 남녀 둘이 지나간다.
“야, 내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압네? 혈압치기 직전이라!”
“혈압치긴…이기나 좀 무어라”
전화를 받지 않아 화가 났다는 청년에게 시치미를 뚝 떼면서 ‘이거나 좀 먹어라’고 처녀가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 청년에게 건넨다. 저렇게 은근히 감싸주는 여인의 나긋나긋하고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녹아나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 청춘의 사랑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뭐라 소곤거리며 나란히 걸어가는 두 젊은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나에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 누군가를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시절이. 장갑을 한 짝씩 나누어 끼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잡고 찬바람 부는 거리를 추운 줄도 모르고 밤새 걸었던 추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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