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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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 방문 22일째 이야기<38>

유치원 마당에서 꼬마들이 줄넘기를 하고 있다. 우리 어릴 적 많이 했던 놀이다. 옆에서 할머니가 아이들 노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 한참 동안 아이들 노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예쁘장한 여자 아이가 가방을 매고 자박자박 걸어온다. 녀석에게 허리를 굽혀 말을 걸었다
“야, 예쁘구나. 어디 가니”
“학교”
“몇 살이지요”
“다섯 살”
“이름은”
“윤주혁이요”
“공부 열심히 하세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한 젊은 군인이 앞을 막는다.
“당신, 뭡네까?”
“왜 그러시죠”
“글쎄, 뭐하는 사람이냐구요”
군인이 내 신분을 묻는다. 이유가 뭘까. 좀 당황스럽다. 여차여차 설명을 했는데도, 묵고 있는 호텔 방 번호까지 확인한다. 마지막 날, 곧 출발 할 시간인데,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곤란할 성 싶다.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을 했다. 얘기를 하다 보니 방금 내가 말을 걸었던 아이의 아빠다. 아이를 바래주고 가던 중 내가 아이와 얘기하던 모습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평양 출발, 심양 도착
숙소에 돌아와 가방을 꾸렸다. 가져왔던 시집 한권을 김 참사에게 주고 갔으면 싶은데 그냥 가지고 가시란다. 규정상 받지 못하게 되어있는 모양이다.
운전사 방 동무가 도착. 공항을 향해 출발한다. 평양 거리에 걸린 구호가 스쳐 지나간다. “장엄한 투쟁의 해” “선군정치의 위대한 승리 만세!”…창전 거리를 지나간다. 45층 건물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3주일 간 머물렀던 북한 땅의 풍경을 떠나는 순간까지 눈에 담아 간다.
순안 공항 도착. 그동안 안내하느라 수고 했던 김 참사, 그리고 운전사 방 동무와 작별 인사를 했다. 3주일 동안 함께 생활하다보니 제법 정이 들었다. 간단한 수속을 마친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승객들이 꽤 많다. 창밖에 먼지가 인다. 활주로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공항 셔틀버스가 비행기까지 손님을 태우고 간다. 셔틀버스 차창을 통해 활주로공사 모습이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 주로 군인들이다. 바람이 세다. 흙먼지와 함께 나뭇가지가 굴러간다. 한쪽에서는 덤프트럭이 흙을 퍼다 부으면 삽으로 흙을 고른다. 시멘트가 굳은 지역을 빗자루로 쓰는 사람도 있고, 울퉁불퉁한 부분을 망치로 다듬어가는 사람도 있다. 나이 어린 군인이 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김일성 대학 정문 왼쪽 표지석에 새겨져 있던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는 구호가 생각난다. 북한 최고의 종합대학 입구에 세워진 그 구호는 우리가 북한사회를 이해하는데 시금석이 되지 않을까 싶다.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다. 고려항공 탑승.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심양행입니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 걸상띠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11시 50분,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돌아가는구나. 3주간의 특별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구나. 그동안의 일이 꿈결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무엇하러 그 위험한 곳을 가느냐고 기를 쓰고 말리던 아내, 그리고 이웃들의 얼굴도 함께 떠오른다.
이제 북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일을 그대로 알리는 일이 남아있다. 사진을 꽤 많이 찍었다. 처음 도착하여 담당자를 만나던 날, 사진은 마음대로 찍겠으니 혹 필요하면 출발 전 검토하시라고 제안했었다. 당국에서 검열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내 TV에서는 북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산천을 내려다본다. 올 때는 군데군데 노랗게 나락이 익은 논배미가 보였는데, 그 새 가을추수를 끝마쳤는지 그런 풍경은 눈에 띄지 않는다.
로동신문을 펼쳐들었다. 오늘 신문이다. 상단 로동신문 제호 왼쪽에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자!”는 글이 있고, 오른쪽에는 “당의 령도따라 내 나라, 내 조국을 더욱 부강하게 하기 위해 힘차게 일해 나가자!”는 글이 있다. 3주일 전 평양에 들어갈 때 보았던 내용이다. 로동신문 사시(社是)가 아닌가 싶다. 1면 톱은 “연풍 과학자 휴양소 준공식” 기사다. “위대한 당의 령도따라 사회주의문명강국으로 끝없이 비약하는 내 조국 땅 우에 희한한 정경들이 련이어 펼쳐지는 속에 연풍과학자휴양소가 시대의 걸작으로 훌륭히 일떠섰다.”로 시작되는 기사다.
짧은 기사 한 토막을 읽으면서도 남과 북의 문장이 다르고, 사회체제가 다르다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가 있다. 70년 분단 세월동안 남과 북은 서로 외면하며 살아왔다. 중상 비방을 일삼다보니 적대감이 쌓이고 불신의 벽이 높아졌다. 통일을 대비하는 첫걸음은 북한 알기다. 상대를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이 시작이다. 북한을 알면 북한이 달리 보인다. 이번 나의 방북이 그 일에 보탬 되는 작은 발걸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어디나 비슷하다. 남이나 북이나 미국이나 본질적으로 같다. 가서 살아보니 그렇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러하다. 먹고 살기위해 일하고, 남녀가 만나 자식 낳아 기르고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모습이 다 거기서 거기다. 어느 사회나 빈부의 격차는 있다. 부자가 모두 행복한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것도 아니다. 정치가 뭔가. 체제란 게 또 무엇인가.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들이 인간사회를 옥죄고 때로 파멸의 길로 몰아간다. 전쟁의 잔혹함과 폐해를 경험했던 우리는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 경제를 위해서도 평화가 필요하다. 전쟁의 위험 속에 경제활동이 잘 될 리가 없다. 어떻게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남북이 서로 존중하면 된다. 평화가 경제고, 평화가 대박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어느새 심양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50분이 금방이다.
심양 공항에서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간다는 재미 교포 J씨를 만났다. 언급했듯이, 그 분을 통해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의 발원지가 현 장충성당 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울 도착

인천 공항에 내리니 밤이다. 공항버스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 한강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가로등이 강변을 밝히고 있다. 여기저기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다. 그 풍경 너머 어둠 속에 묻혀있던 대동강. 그리고 깜깜하던 평양의 밤거리가 오버랩 된다.
다음 날 아침, 인터넷에 들어가 신문을 읽었다. 정부정책이나 대통령을 비판하고 힐책하는 내용이 눈에 띈다. “박근혜 참 나쁘다.” 어느 신문의 제목이다. 만약 북한에서 김정은 참 나쁘다, 는 기사가 났다면 어떻게 될까. 나올 리도 없지만 그런 기사가 날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남과 북의 차이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몇몇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마침 내 기사가 나온 날, 같은 신문에 북한에 잡혀 있다 풀려난 사람의 기사가 실렸다. “선교 목적 방북…. 성경책 두고 나오려고 했다”라는 제목이다. 워싱턴 특파원이 보낸 기사였다. 전문을 소개한다.
“북한에 6개월간 잡혀 있다 풀려난 제프리 파울(56)은 애초 북한에 성경을 두고 나올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북한에 있는 동안 가혹행위는 없었으며 오히려 음식을 너무 잘 먹었다고 말했다. 파울은 풀려난 지 1주일 만에 CBS 등 미국의 주요 방송들과 인터뷰를 하고 “제1방문 목적은 북한이 어떤 사회인가 보려는 호기심이었지만, 선교의 목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을 두고 나오는 것이 북한 법 위반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5월 청진의 한 나이트클럽에 한·영문 성경을 놓고 나왔으며, 다음날 관광안내원이 물건을 놓고 나온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곤경에 빠질 줄 알면서도 자신이 성경을 놓고 왔다고 시인했다. 그는 사흘 뒤 출국 직전 체포됐다. 파울의 가족들과 변호사는 그의 방북 목적이 선교가 아니었으며 성경을 놓고 나온 것도 실수였다고 주장해왔다.
파울은 “내 존재가 그들에게도 약간 당혹스러운 듯했다. 한 번은 그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불렀다”라고 했다.
그는 “나의 가족들과 국가에 골칫거리가 된 것에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며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신의 뜻이었고, 그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는 내가 천국에 갔을 때에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에는 관광안내원을 가장하고 지하 선교를 위해 방북한 케네스 배(44). 관광객으로 입국해 망명하겠다며 여권을 찢은 매튜 밀러(24) 등 두 명의 미국인이 아직 억류돼 있다.” (2014년 11월 3일자 경향신문 참조)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집에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단체의 초청에도 마다 않고 응했고, 매스컴을 통해서도 다녀온 얘기를 전했다. 만나는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온 걸 축하한다”고 인사말을 건냈다. 그때마다 ‘무사히’라는 말을 되새겨보곤 했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하고 위성을 쏘아 올렸다. 개인이나 국가나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방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문제의 실마리가 보인다. 북한 핵 문제도 그렇다. 북한이 왜 핵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 핵문제는 1990년 9월 소련이 남한과의 국교정상화를 결심하고 북한과의 동맹관계를 단절하는 통고를 한 그때에 시작된 것이다. 소련의 핵 보호가 철수되니까 독자적인 핵개발 노선으로 나가게 된다. 그것은 1970년대에 미국이 ‘닉슨독트린’을 발표하여 예속국가들에게 독자적 안보태세를 촉구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내세워 재래식 무력의 증강과 동시에 핵무기 생산계획을 추진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북한은 소련도 중국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극적 대전환을 위해 미국과의 공존과 화해를 모색했던 것이다.” 리영희 교수의 자서전 <대화>에 나오는 얘기다. 미국이 북한과 수교했다면 지금 같은 북핵문제는 발생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미국이 북한과 수교하고 평화협정 체결하면 핵문제 해결될 게 아닌가, 라는 간단한 해답이 나온다. 그래서 리영희 교수는 같은 책에서 “북핵문제는 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패권주의의 문제”라고 진단을 한다.
분단 70년 냉전 중에도 남북은 평화 정착과 공동번영을 위한 노력을 해왔다. 박정희 정부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고, 노태우 정부도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이루어 교류협력의 토대를 쌓았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주석이 정상회담을 갖고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에서 2007년 10·4공동선언으로 통일을 위한 실천방안을 도출해 냈다. 6·15와 10·4공동선언은 남북 정상이 만나서 합의한 평화와 통일을 위한 대원칙이다. 그 약속이 이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항구한 민족의 장래를 생각할 때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야 할 당위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의 통일정책은 평화공존의 단계적 통일론이었다. 북한의 핵실험과 위성발사로 인해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중에서 중앙일보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의 칼럼 ‘핵 동결과 평화협정의 교환이 답이다’는 주장이 눈길을 끈다. “‘혹독한 대가’의 경고가 제재와 고립에 이골이 난 북한엔 안 통한다. 핵 모라토리엄과 군사연습 중단 - 북·미 수교 - 평화협정만이 핵실험과 제재의 악순환을 끊고 북한 비핵화의 돌파구를 열 수 있다. 그런 뒤 신뢰가 쌓이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 비핵화를 논의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2016년 2월 5일자 중앙일보 참조)
실제 비핵화와 북미수교, 평화협정을 묶어서 패키지로 거래하자는 해법이 오바마 1기 내각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시절 논의된 적이 있고, 박근혜 대통령도 한때 ‘밥상론’으로 북핵의 포괄적 해법을 언급한 적이 있다. 결국, 대화를 통한 평화공존의 단계적 통일이 해결책이다. 돌아가도 그게 빠른 길이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통일 정책을 실행하지만, 통일은 정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각계각층의 의견, 국민 여론을 수렴하여 동력을 삼아야 한다. 작고한 신영복 선생의 통일에 관한 의견은 경청할 만하다. 그저 저서 <담론>에서 한 얘기다.
“나는 통일(統一)을 통일(通一)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평화 정착, 교류 협력만 확실하게 다져 나가나가면 통일(統一) 과업의 90%가 달성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평화정착, 교류협력, 그리고 차이와 다양성의 승인이 바로 통일(通一)입니다.
통일(通一)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언제일지는 알수 없지만 통일(統一)로 가는 길은 결코 험난하지만은 않습니다. 통일(通一)에서 통일(統一)로 가는 과정을 지혜롭게 관리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남과 북이 폭넓게 소통하고 함께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화(和)에서 화(化)로 가는 화화(和化)모델입니다. 통일과 화화(和化)는 통일의 청사진이면서 동시에 21세기의 문명사적 전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관계 해결과 통일로 가는 길에 북한 핵개발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북한 핵개발은 정치적 목적 외에 경제적 측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이다.
남북 경제력 격차가 심해지자 재래식무기경쟁에 있어서 위기를 느낀 북한은 핵개발에서 돌파구를 찾기로 한다. 핵을 가짐으로써 재래식 무기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무기구입에 들어가는 돈을 경제개발에 사용하겠다는 논리다. 이정도의 이론은 북한 주민들이 빠삭하게 꿰고 있다. 매주 토요일 학습시간을 통해 학습한 효과일 터이다. 실제로 북한 주민들은 아파트를 짓고, 물놀이장이나 스키장 건설 등, 주민들을 위한 놀이시설이 건설된 것도 핵개발을 통한 수령님의 령도 덕택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생활이 나아지고 있고,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고 있다는 얘기다. 핵개발이 북한 주민들로부터 환영 받고 있는 이유다.
한반도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궁지에 몰리면 쥐가 고양이를 문다. 전쟁은 멸망을 의미한다. 긴장과 대결이 아닌 평화가 필요하다. 얼마나 많은 인적자원과 돈이 남과 북에서 국방이란 이름으로 낭비되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평화가 경제다. 평화야 말로 남과 북이 함께 이기는 길이다.
한국인의 핏속에는 열정과 도전정신이 스며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강인한 정신을 가진 민족이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해외에서도, 한국인이 살아가는 어느 곳이건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분단 70년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분단 100년을 맞을까 싶어 덜컥 겁이 난다. 작은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먼 미래와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자라나는 후세에게 아픈 상처를 물려줄 수야 없지 않는가.
분단 문제를 풀어낼 역량이 우리에게 있다.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남과 북이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7·4공동성명과 6·15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이 확인했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정신으로!
북녘 산천이 눈에 선하다. 사람들의 그 순박한 미소가 떠오른다. 분단 후 남한 출신 작가로는 처음으로 3주간 북한을 돌아보고 왔다. 더 많은 사람이 북한을 다녀오고, 북한 작가들도 남한을 방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통일로 가는 길. 그 길을 손잡고 함께 만들어가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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