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치인들 가운데 고비마다 고사성어를 즐겨 사용하기로 유명한 이는 단연 김종필이다.
박정희를 도와 5·16쿠데타에 성공해 정권의 2인자가 됐으나 주체세력과의 갈등으로 첫 외유에 나설 때에는 '자의반타의반(自意半他意半)'이라는 말을 썼다. 자신의 외유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뜻이다. 박정희를 도와 성공한 군사 쿠데타에 대해서는 '역사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는 휘호로 그 당위성을 주장했다.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자 그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봄이되 봄 같지 않다"고 말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P연합을 촉구하면서 신년휘호로 쓴 '즐탁동기(櫛琢同機)'는 그가 쓴 고사성어 중 압권으로 평가받는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는 의미였다.
1993년 철원 출신 7선의 정치인 김재순은 정계를 은퇴하면서 그 감회를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표현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직후 공직자 재산공개과정에서 불거진 퇴진압력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외유를 떠나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빗댄 표현이었다. 토사구팽은 1995년 김종필이 김영삼 대통령과 결별할 때도 썼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통렬한 질타였다.
고사성어라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박근혜나 정몽준도 고사(故事)를 인용해가며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2010년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당시 한나라당 내에서 벌어진 찬반논란에서다. 정몽준은 "세종시 수정안 반대는 '미생지신(尾生之信)'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공격했다.
미생지신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미생(尾生)이란 이가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그가 어느 날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정시에 약속 장소에 나간 미생이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도 애인은 나타나지 않고,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 결국 교각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미생지신이 나오는 사기(史記)의 '소진열전'과 장자(莊子)의 '도척'은 서로 의미가 상반된다. 소진은 미생을 '신의 있는 사람의 본보기'로 들고 있는 반면, 장자에는 '융통성이 없는 우직한 사람'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몽준은 후자의 뜻으로 사용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도 고사로 응수했다. "미생은 죽었어도 귀감이 됐고, 그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한비자(韓非子)의 고사 '증자(曾子)의 돼지'를 인용한 것이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아내가 시장에 가는데 아이가 울면서 같이 가겠다고 보채자 "장에 갔다 와서 돼지를 잡아줄 테니 집에 있으라"고 달랬다. 아내가 장을 보고 오자 증자는 곧장 돼지를 잡으려했고, 이를 본 아내는 기겁을 하며 말렸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려고 한 말인데 정말로 돼지를 잡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항변이었다. 이에 대해 증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에게 속임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어미가 자식을 속이면 자식이 어미를 믿지 않게 된다." 이렇게 말한 증자가 돼지를 잡았음은 물론이다. 박근혜는 이때부터 '신뢰의 정치인'이 됐지만, 지금은 국민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 감방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결국 정몽준의 평가가 옳았던 것은 아닌지 싶다.
한편 지난 대선 때 이런 박근혜를 적극 옹호하며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최근에는 자유한국당 대표로 선출된 홍준표가 현충원 방명록에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썼다 한다. 지난 2월 성완종 리스트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그리고 지난 4월 대통령선거 후보자 방송연설에서도 쓴 즐풍목우는 장자의 천하편에 나오는 고사성어다. 바람에 머리를 빗고, 비에 몸을 씻는다는 뜻으로, 긴 세월 이리저리 떠돌며 고생하고 난관을 무릅쓰고 노력한다는 의미다. 홍준표가 이를 다시 쓴 것은 당 대표로서 어려움에 처한 당을 재건하는데 몸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언론들은 앞 다퉈 해석한다. 하지만 그의 즐풍목우의 행보가 다시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시도 때도 없이, 듣는 이의 고충은 아랑곳 않고, 배설하듯 내뱉는 그의 저급하기 짝이 없는 '막말' 퍼레이드에 고개를 젓는 국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다(참고로 언급한 정치인들의 이름에 직함이나 존칭을 뺀 것은 친근감의 표시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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