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왕인박사현창협회 2017년 학술대회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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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사)왕인박사현창협회 2017년 학술대회 요지

(사)왕인박사현창협회의 2017년 학술대회가 지난 11월 23일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7층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사)왕인박사현창협회(회장 전석홍)와 왕인문화연구소(소장 임영진)가 주최·주관하고 영암군과 (재)호남문화재연구원이 후원한 이날 학술대회는 '왕인박사 현창사업의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왕인박사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현창사업이 한국과 일본에서 어떻게 추진되고 있으며, 향후 개선과제는 무엇인지 규명하는 자리가 됐다. 이날 학술대회 기조 및 주제발표 요지를 싣는다.<편집자註>
■왕인박사 현창사업의 성과와 과제(박광순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왕인박사현창협회는 해방과 독립 후 우리민족 우리고장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제 고장의 역사적 인물 찾기, 다시 말하면 향토사연구가들에 의해 각 고장에 전해오는 유적이나 유물, 혹은 전승되어온 구비를 전거로 해 지금껏 묻혀있던 자랑스러운 인물들을 찾아 연구하는 기풍이 일기 시작하는데 왕인박사연구도 그 일환이라 생각한다. 중앙의 학계에선 고대사의 복원 차원에서 고대사 연구가들에 의해 왕인박사가 연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해방과 독립,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과정에서 왕인박사를 비롯한 도왜인(渡倭人)들의 노고와 업적을 내세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왕인박사에 대한 진실의 구명과 그렇게 구명된 진실의 바탕위에서 왕인박사를 추념하자는 뜻으로 왕인박사현창협회가 구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사)왕인박사현창협회의 창립에는 지방에서는 ‘구림고적보존협회’(대표 박찬우), 중앙에서는 ‘한국문화재보호협회’(회장 이선근)가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듣고 있다. 이들이 1973년 8월 5일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왕인유적조사단을 구성해 군서면 구림리 일원을 조사한 뒤 ‘왕인박사현창협회’ 설립 발기인회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 모임이 왕인박사현창협회의 모태라 할 수 있다.
이들은 1973년 10월 3일 광주에서 “왕인박사의 위업을 바르게 인식시켜 내외에 선양함과 동시에 올바른 한일관계의 확립과 한일 양국의 참된 우호증진에 도움이 될 기념사업에 일역을 담당할 것”을 목적으로 ‘왕인박사현창협회’를 설립하고, 주요사업으로 ①왕인박사유적에 관한 내외자료수집, ②왕인박사 유적의 조사보존을 위한 정화사업 및 묘역(廟域)의 정비와 사당 건립사업 등을 결정한 뒤, 고문으로 이은상, 박철웅, 회장에 이선근, 이사장에 김신근, 왕인연구소장에 김창수(이을호 박사로 교체), 전무이사에 박찬우, 이사 유홍열, 유승국, 박남순, 손성남, 최영철, 임해림, 감사에 최종욱, 김영원씨 등을 선출함으로써 현창협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된 것이다.
협회의 제1기(1973~1985년)는 이선근 박사를 비롯한 중앙의 학자들이 주도한 기간이다. 이 기간 중에 시행한 중요사업으로는 성기동 왕인박사 탄생지의 정화와 ‘유허비’ 건립을 비롯해 진입로 개설 확장 정비 및 유적지의 조사사업 등을 들 수 있다. 제일 중요한 사업을 든다면 왕인박사유적지 임야 2만7천여평을 매입해 영암군에 기증(1974년 7월 5일)함으로써 그 후 묘역정비사업의 토대를 마련한 일과 조사연구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그 결과를 바탕으로 왕인박사유적을 ‘전남도 지방기념물(사적) 제20호’(1976년 9월 30일)로 지정받아 그곳에 ‘왕인박사 유허비’를 건립한 일이라 할 것이다.
제2기 현창협회는 1985년 7월 5일 임원을 개편해 고문에 이숭녕(백제문화연구소장), 이환의(전 문화방송사장), 전석홍(전남도지사), 회장에 민준식 박사( 전 전남대 총장), 이사장에 신태호(광주상공회의소 회장), 왕인문화연구소장에 이을호 박사, 이사에 김신근, 박찬우, 임광행, 김제권, 최재율, 박광순, 최승호, 감사에 박찬일, 최재우씨 등으로 구성해 발족한다. 전남지방 인사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으로, 이는 왕인박사유적지가 전남도의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기간 시행된 중요사업을 한마디로 줄이면 왕인묘(王仁廟, 사당)를 비롯한 묘역이 정비되고 거기에 사당을 비롯, 백제문, 학이문, 강당 등이 신축( 준공식 1987년 9월 26일)되고, 문산제, 양사제 및 성천 등이 복원됨으로써 비로소 월출산 문필봉 아래 성기동이 왕인박사의 유허지로서 영암군민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성역의 모습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한일교류의 교두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제3~4기의 현창협회는 1998년 4월 임원을 개편해 회장에 정영호 박사, 이사장에 박찬우 전무이사가 선출되고 이사 8명이 선출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후의 활동상황에 관한 자료는 유감스럽게도 찾을 수 없다. 그러다가 2002년 4월에 임원을 개편해 회장에 박찬우, 이사장에 전석홍, 그밖에 이사(7명) 및 감사(2명)가 선출되어 제4기 현창협회의 진용은 갖추어졌으나 역시 활동사항에 관한 자료는 찾기 힘들다. 박찬우 회장이 불의의 사고로 오래도록 와병 중에 계신 것이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제3~4기 현창회의 활동은 부진했으나 행정당국이 주도하는 시설사업은 괄목한 사업들이 이뤄졌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도로 우편(남쪽)에 ‘왕인공원’(2천274m²=668평)을 조성해 군민들의 휴식공간과 축제공간을 마련하는 한편, 영월관, 왕인박사 동상, 천인천자문탑 및 수석관, 연못과 분수대 등을 건립 조성했다. 천인천자문탑의 경우 탑에 새겨진 천자문이 6세기 초에 주흥사가 차운한 ‘天地玄黃으로 시작되는 천자문’이어서 5세기 초(405년)에 왕인박사가 논어 10권과 함께 천자문 1권을 일본에 전수했다는 일본의 정사들의 기록과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왕인박사의 실존 자체를 부인하는 일부의 논자들에게 좋은 빌미를 스스로 제공하는 커다란 우를 범하고 말았다. 제5기에 들어 2016년 6월 7일, 저간의 사실을 구명(究明)해 위나라의 태위요 유명한 서예가였던 종요가 찬 한 천자문비(二儀日月로 시작)를 그 옆에 세우고, 거기에 저간의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바로잡게 된 것은 다행이라 할 것이다.
제5기(2006년~ ) 현창협회는 2007년 3월 31일 총회를 개최하고 전석홍 전 고문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이사와 감사를 새로이 선출함으로써 발족했다.
전 회장은 (사)왕인박사현창협회를 실질적으로 창립했고 이끌어왔기 때문에 기업에 비유한다면 창업주라고도 할 수 있다. 제5기 현창협회가 발족한지 올해로 만 10년을 맞았다. 그간 상태포를 복원, 확장해 옛 포구의 모습을 재현코자 노력하면서 동시에 역사공원화해 방문객들이 뱃놀이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 ‘종요의 천자문탑’을 영월관 동편에 건립(2016)해 천자문에 관한 시비를 없앴다. 그간 고증문제로 시비가 많았던 왕인박사동상을 재건립토록 건의해 현재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팀이 활동하고 있다. 제5기에 이뤄진 대표적인 연구사업으로는 ‘聖基洞’의 복간이라 할 수 있다.
현창협회의 과제로는 시설사업의 경우 왕인역사자료관(박물관)의 건립과 연구소에 상근 학예사를 배치해 연구의 연속성과 자료의 체계적인 집적을 기해야 한다는 점과 자료관에 왕인박사의 일생을 요약한 간단한(약 10분) 영상물을 상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또 왕인동상을 재건립해 학생들은 물론 내방객들이 보다 친근감을 갖고 접근토록 유도해야 한다. 연구사업으로는 지금까지의 연구 활동을 기반으로 이제부터는 보다 집중적인 연구와 자료발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 일본 민간단체의 왕인박사 현창사업의 현황과 과제(김선희 건국대 교수)
근대기에 들어서 추진된 현창사업은 성격이 당시 시대상황 하에 행해진 매우 정치목적적인 것이었다. 1938년 오사카부가 ‘전왕인묘’를 사적으로 지정한 것도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재일조선인의 ‘융화’가 그 한 목적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현대에 들어 히라카타시가 왕인박사의 묘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전기는 1984년 오사카 일한친선협회가 주최하는 제1회 박사왕인축제가 ‘전왕인묘’에서 개최된 일이다. 이를 계기로 ‘왕인총 환경수호회’가 마을사람들의 자원으로 꾸려지게 되었다. 이 모임은 묘역주변 환경 정화 활동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활동 영역이 확대되어, 왕인박사 묘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안내, 무궁화 축제 개최, 영암군의 왕인문화축제 참가 등 한국과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오사카부 교육위원회는 이 모임과 영암군의 요청으로 묘역 정비 작업의 일환으로 휴게소와 화장실, 기념비를 설치했고, 1993년부터는 히라카타시가 주최가 되어 묘역 주변의 제초작업을 연2회 실시하고 있다. 현재 사적지정지의 토지는 오사카부의 소유이며, 그 관리 주최는 오사카부 교육청 문화재보호과로 되어 있다.
히라카타시와 영암군이 우호도시 제휴를 하게 된 것은 2008년 3월 히라카타시 시제시행 60주년 기념을 계기로 행해졌다. 그 배경에는 위에서 말한 민간의 교류가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는 점, 이에 수반해 행정과 의회 관계자 사이의 교류 역시 깊어졌다는 점, 매년 11월 3일 영암군의 방문단이 박사왕인축제에 참가하고 있다는 점이 주요한 사항이었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관→민의 방향이 아니라 민→관의 방향으로 ‘교류’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지역사회의 교류로 확대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2004년 왕인박사 묘역 근처에 있는 시립의 스가하라히가시(菅原東)소학교와 영암군의 구림(鳩林) 초등학교가 우호교류를 선언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재의 ‘왕인박사 현창사업’이 그 목적과 방향, 그리고 결과까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왕인박사 현창사업은 근대기에 ‘내선일체’라는 목적이 분명했다. 특히 도쿄 우에노(上野) 공원의 왕인박사 동상은 명백히 그러한 목적의식에서 건립된 것이며, 지금 히라카타시 왕인박사 묘비 주변에 세워진 돌기둥에 새겨진 기부자 이름 이 돌기둥의 이름에는 야마다 시치헤이를 비롯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 흑룡회 소속의 인물이름까지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를 들어 왕인박사 현창사업의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일부로써 전체를 폄하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현창사업의 성격이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보편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왕인박사를 기리려는 구체적인 노력은, 현존하는 사료로 확인하는 한 에도시대 이래로 계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주체 또한 왕인박사의 후예인 도래인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학과 학문의 시조, 즉 ‘문명’의 전달자로서 왕인박사를 보려는 시각에는 그 문명이 갖는 ‘보편성’을 향한 의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히라카타시의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는 왕인박사 현창사업의 양상인 왕인총 환경수호회라는 이름은 한글용 명함에 새겨진 이름이고, 원래대로라면 ‘왕인총의 환경을 지키는 모임’이다. 이 소박한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 히라카타시의 왕인박사 현창의 중요한 주체인 ‘마을사람들’은 그야말로 마을의 환경 가꾸기를 통해 마을의 역사를 배우고 더 나아가 한국과의 더 나은 관계를 위한 교류를 소망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왕인현창사업의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관점은 그 나름 논리와 의미를 갖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현창사업을 내선일체의 기억을 망각한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라거나 “역사 기억의 전복”이라고 하는 시점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왕인박사 현창에 관해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절대적으로 자료가 빈약한” 왕인박사 전승을 “고대한일문화교류 전반에 대해 보다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대사와 관련해서 사료가 풍부하여 역사적 사실 확인 작업이 가능한 것이 어떤 것이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왕인의 전승과 현창은 근세기부터 있어 왔다. 긴 역사의 일정 시기에 행해진 정치목적적인 현창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과, 현창의 현재적 의의를 찾으려는 것은 별개로 봐야한다.
영암군과 히라카타시의 우호교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류가 박사왕인의 업적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업적이 문명사의 보편이었음을 인식하는 한편, 그 ‘보편성’을 토대로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 간 교류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의 협력이 필수적일 것이다. 다양한 아이디어 공모 및 기획에 대해 더욱 고민을 영암군에 당부 드린다.
■ 1920-30년대 조선환여승람(영암군)의 편찬과 왕인박사(정성일 광주여대 교수)
조선환여승람(영암군)은 왕인박사 영암출생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이다. 그러나 이 자료의 왕인박사 출생 관련 기록에 대해 모두가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기록을 불신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조선시대까지 간행된 지리지에는 없었던 내용이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이 지리지에 새롭게 등장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며, 일제 강점기 일본인 승려의 왕인박사 동상 건립 추진 운동이 조선환여승람(영암군)의 해당 기록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이것이 왕인박사 영암 출생 기록을 부정하는 논리의 핵심 근거이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을 납득시킬 만한 문헌근거가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왕인박사 영암출생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도 조선환여승람(영암군)의 기록 외에는 현재까지도 다른 문헌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환여승람에 대해서는 왕인박사 영암출생설을 긍정하는 쪽이나 부정하는 쪽 모두 더욱 세심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조선환여승람에 대해서는 허경진의 연구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필자는 이전에 발표한 글에서 일본 불교의 영암 포교 과정을 추적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일본인 승려 아오키 게이쇼의 왕인박사 동상 건립 추진 운동의 배경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조선환여승람(영암군)의 간행 시기인 1920-30년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이 왕인박사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제기하면서, 조선환여승람의 편찬과 관련한 기존 연구를 재검토 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쓴 목적이다.
조선환여승람은 충남 공주에 살던 유학자 이병연(1894-1977)이 자신의 재산을 들여 개인적으로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인 보문사의 주소가 공주로 되어있었으며, 저자 겸 발행자인 이병연의 1934년(昭和 9) 현재 주소지는 서울, 1934년(昭和 9) 4월 10일 인쇄해 동월 15일 발행된 조선환여승람의 판권에는 이병연의 주소지가 경성부 관훈동 29번지로 되어 있다. 다만 이병연이 어떤 인물인지는 그가 잘 알려지지 않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동국여지승람이 왕명에 따라 비매품으로 편찬된 관찬(官撰) 지리지라고 한다면, 조선환여승람은 처음부터 상업적인 목적으로 보문사라는 개인출판사가 간행한 사찬(私撰) 지리지이다. 전국 각 군의 인문지리를 한 권에 한 군씩 소개한 지리지이다. 분량이 적은 곳은 50장 100여쪽 이내(영암군 33장 70여쪽, 장성군 39장 80여쪽), 분량이 많은 곳은 150장 300여쪽에 이를 정도로 편차가 컸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 책의 간행에 앞서 각 군에 대한 조사가 먼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910년부터 100여명을 동원해 1922년까지 12년 동안 전국 13도 229군 가운데 129개 군을 직접 조사했다. 조사를 마친 129개 군(충남 14, 충북 9, 경북 17, 경남 20, 전북 13, 전남 24, 강원 9, 황해 6, 함남 8, 함북 9, 경기 1, 평남 1, 평북 1) 가운데 전남이 24곳으로 이병연의 고향인 충남(14)보다 더 많아 최다를 기록한 점이 눈에 띈다. 그런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책의 편찬을 마친 뒤에도 그것을 간행하기까지는 16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더구나 조사를 마친 129개 군 중에서도 26곳의 내용만 책으로 제본되었고, 나머지 103개 군의 것은 일제의 감시와 재정난 등으로 말미암아 미결책(未結冊)으로 보관되어 왔다고 한다. 앞에 소개한 영암군과 장성군은 조선환여승람이 간행된 전국 26개 군 속에 포함된 셈이다.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이 조사원에게 포착된 시기를 가장 빨리 잡는다면 1910년, 가장 늦게 잡는다면 1937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조사원들이 일단 조사를 마치고 간행을 시작한 시기가 1922년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영암군 조사원이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을 접한 시기가 1922년 이전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일본인 승려 아오키 게이쇼의 문건이 발표된 것이 1932년이고 조선환여승람(영암군)의 간행 연도가 그보다 5년 늦은 1937년이라는 점만 가지고 조선환여승람(영암군)에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이 실리게 된 것이 아오키 게이쇼의 영향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주장을 펴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1950∼60년대 전라도 지역의 고대사 인식과 왕인 박사(박해현 금호고 교사)
그동안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해방 직후부터 1950, 60년대까지 왕인 박사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해방 이후 1950년대 말까지 이뤄진 고대사 연구는 이병도가 집필한 진단학회, 한국사(고대편)로 완성됐다. 그는 우리 민족은 내부의 상극을 극복하면서 협조를 이끌어내고, 다른 민족과 상생 및 투쟁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보았다. 이처럼 해방 이후 우리 역사 인식은 민족 주체성을 강조한 식민사관의 극복에 있었다. 이러한 역사학계의 동향은 1947년 제정된 미 군정청 중등학교 교수요목 사회생활과에서 ‘홍익인간의 이념에 입각해 애국애족을 강조하고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하자’고 한 것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1950년대에 정착되기 시작한 실증적 연구 풍토를 바탕으로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한국고대사가 지닌 민족의 내적 경험의 성장 과정을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적극적인 방향 설정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여하튼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고대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본격적으로 모색된 것은 이들 연구성과에 힘입은 바 크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1960년대에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역사학계에 이른바 ‘민족주의론’과 ‘근대화론’이 시대적 과제로 등장했다. 나아가 식민사학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 한국사 전반에 걸쳐 주체적 입장과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연구 분위기로 확산되어갔다. 이기백이 ‘국사신론’(1961)을 통해 비판이 제기된 것이 우연이 아니다. 또 1960년대에 이뤄진 고대사 연구 성과는 식민사학에 의해 왜곡된 고대사를 바로 잡고 주체적인 인식을 확립시켜 나가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고대사 범위를 확대하고 연구주제를 구체화하는 토대도 만들었다. 한편 해방 이전에 거의 일본 학자들의 독무대였던 삼국 시대 연구가 해방 이후에 국내 학자들에 의해 점차 연구가 점차 이뤄졌다. 그중에서도 신라사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사료가 풍부한 탓이기도 하지만 신라사를 우선시했던 시대 분위기도 한 몫 했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 학자들은 ‘임나일본부’ 실체를 찾기 위해 가야사나 백제사 연구를 국내 학자들보다 많이 했다. 이 중에서도 백제사 연구는 특히 방치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백제가 마한 지역을 차지한 과정을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분석해 근초고왕 때인 369년에 백제가 마한의 잔존 세력을 토벌하고 전남지역을 차지했다고 주장한 이병도의 글은 백제사 나아가 우리 전남 지역과 관련된 거의 유일한 논고였다. 하지만 이 글은 전남 지역이 4세기 후반에 이미 백제의 일부로 편입됐다는 인식을 고착화시켜 이 지역의 독자적인 역사 인식을 가로 막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말았다.
전남 지역 고고학 연구는 지금부터 백 년 전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제가 그들이 주장한 임나일본부 실체를 찾기 위해 나주 신촌리 9호분과 인근의 대규모 고분 30여 기를 연이어 발굴하면서 시작됐다. 해방 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 김원룡 교수가 영암 시종리 고분 등에서 대형 옹관을 출토하면서 비로소 시작된 전남 지역 고고학 연구는 영산강 유역의 독자적 특질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경주와 백제 지역으로 대규모 발굴 사업이 집중되면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1970년대 말까지 전남 지역은 기껏 10여 건의 발굴이 추진되어 당시 사정을 살피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렇듯 1960, 70년대의 전남지역의 역사 연구는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나 고고학적 발굴 등을 통해 이 지역의 실체를 밝히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보겠다.
해방 이전의 왕인박사에 대한 인식은 일본에서 8세기에 들어 ‘속일본기’, ‘일본서기’, ‘고사기’ 등에 기록된 이후, 17세기에 들어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왕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19세기 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내선일체 등 일제의 침략 정책과 관련해 왕인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이렇듯 왕인 연구는 언 듯 보면 정치적 산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8세기의 일본 역사책에 모두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도왜 사실은 분명해 보이고, 최근 왕인 박사의 도왜 사실이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정치적 논란이 있다고 해서 결코 폄하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 역사 교과서인 ‘중등 동국사략(1906)’에서 현채는 “박사 왕인으로 하여금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가도록 하니 일본의 문화가 이로부터 시행되었다”라고 해 일본 문화 발전의 주체로 왕인 박사를 다루었다. 왕인에 대한 우리 교과서의 서술은 대한제국 시대에 현채가 쓴 ‘중등교과 동국사략’(1906)이 최초일 것이다. 이 책은 종래 편년체 사서를 탈피해 주제별 영역별로 서술하는 방법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국사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1892년에 하야시가 쓴 ‘조선사’7권을 현채가 역술한 이 책은, 식민사관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렇듯 대한제국기의 근대적 성격의 역사교과서에는 초등, 중등을 막론하고 왕인 박사가 도일해 일본에 문자와 유학을 전해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적 영웅이나 위인을 부각시켜 나라의 독립을 지키고자 하는 애국계몽기의 애국심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과정에 일본에 우리의 선진 문화를 정착시켰던 왕인의 도일 사실은 충분히 주목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 일제 강점기 교과서인 ‘심상소학국사’에는 ‘백제가 일본에 복속될 무렵 고흥이라는 박사가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기록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백제는 왕인이라는 학자를 일본에 보내왔다. 이때가 오진(應神) 천황 시대이다. 천황은 왕인 등에게 명하여 기록을 담당하도록 하셨다. 왕인의 조상은 중국인으로 조부 때부터 백제에 거주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의 교과서에는 왕인의 도일 사실을 다루고 있으나 왕인의 조부를 중국인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내선일체를 부르짓는 역사관, 그렇다고 우리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역사 인식이 교과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본다.
해방 이후 왕인 박사에 대한 이해도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있었다. 애국계몽기에 민족을 지키는 수단이 되었던 왕인박사가 해방 이후에도 민족주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기능했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는 일제의 내선일체 후유증과 불철저한 식민사관의 극복 탓으로 왕인에 대한 관심이 일정부분 제한이 있었다. 왕인에 대한 관심은 민족주의가 한층 고양된 1960년대 이후에 이르러 그 이전보다 보다 높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왕인 연구는 일부 영암 출신 젊은 청년들에 의해 이뤄졌을 뿐 학계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그것은 왕인 박사가 일제의 내선일체에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왕인 박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한국 학자들의 연구에 걸림돌이 된 셈이었다. 1970년대 들어 이병도에 의해 왕인연구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만들어졌지만 정치적 논란을 극복하고 객관적인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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