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군민신문 창간 14주년 特輯提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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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민신문 창간 14주년 特輯提案

"영암군 문화유산 제1호 영암읍성, 복원계획 세우자"

'둘레가 4천369척에, 평지 높이는 12척이고 고험처(高險處)의 경우는 9척이다. 여장(女墻 성 위에 이빨 모양으로 배열한 성가퀴로, 성첩(城堞)이라고도 불리는 낮은 담) 높이는 3척이며, 적대(敵臺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 좌우 옆에 있는 치성 위에 세운 시설)는 6개, 문은 3문인데 옹성(성문 밖에 반원형이나 삼각형으로 축성된 작은 성)은 없으며, 여장 길이는 639척에, 샘이 둘이고, 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는 파지 않았다.'(문종실록)
'석성이고, 둘레가 4천369척, 높이가 15척, 성안에 4개의 우물이 있다.'(동국여지승람)
'석성이며 둘레는 4천369척, 높이가 15척이며, 치첩(雉堞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이 1천25곳이다. 성내에는 연못이 2개소, 우물이 4개, 건축물 5동이 있었다.'(여지도서)
'성문이 3개 있고, 성내에 연못 1개가 있으며, 건물은 15동이다.'(1872년 영암군지도)
영암읍성에 관한 옛 문헌의 기록들이다. 그 첫 기록이 '문종실록'이니 문헌 상 영암읍성은 조선 문종(1450∼1452년) 대에 처음 등장하는 셈이다. 읍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로, 그 전기에는 서북쪽의 거란과 동북쪽의 여진을 주요 방어 대항으로 쌓았고, 이후 동여진의 동해 연안으로 침범이 잦아지자 연해읍성의 축성이 필요해졌으며,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서남해를 중심으로 한 극심한 왜구의 약탈로 연해읍성의 축조가 이어졌다. 따라서 영암읍성도 고려 말 축조되기 시작했으며, 퇴축(退築 성을 확장하는 일)을 거듭한 끝에 1451년(문종1년)에 완공보고서가 조정에 올려진 것으로 보아 조선 초 그 완전한 모습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디지털영암문화대전 참고)
전남문화재연구원이 2009년 8월 내놓은 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영암읍성은 둘레가 2.01㎞에 해자 흔적이 있고, 객사와 동헌 등 큰 건물이 무려 15동이나 있었다. 당시 전라도 육군본부 격인 강진 병영성보다 두 배 가까이나 큰 규모였으니 전라도 최대 규모의 읍성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1555년 5월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에는 최초의 의병장이었던 양달사 장군이 대첩(大捷)을 거두며 성내의 수많은 백성과 병사들의 목숨을 구한 곳이기도 했다.
100여년 군민들 피땀으로 쌓은 최고 금자탑
1872년 영암군지도 中 읍성지역
1872년 영암군지도 中 읍성지역
잠시 눈을 감고 당시를 회상해보자. 남쪽으로는 호남의 소금강 월출산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서남해의 바닷물이 영산강과 함께 덕진다리 인근까지 넘실댄다. 그리고 영암읍은 지금의 서남리, 남풍리, 동무리, 역리에 걸쳐 2㎞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읍성 안에 객사와 동헌 등 크고 작은 건물이 고즈넉이 자리한다. 적어도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영암읍성과 영암읍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었을까?
을묘왜변 때 양달사 장군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 「바람벽에 쓴 시-달사는 어디로 갔나」의 이영현 작가는 이런 영암읍성을 '사라진 영암군 문화유산 제1호'라고 표현한다.
<영암군민신문>의 고정칼럼 '낭산로에서'에 기고한 글을 통해 그는 "영암읍성은 영암군민이 100여년 동안 피땀을 흘리면서 쌓은 최고의 금자탑이다. 하지만 지금 그 문화유산은 우리에게 없다. 사금파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저 소슬한 대숲 속에, 우리의 발밑에 흔적만 남아있을 따름이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조선 말기, 고종을 굴복시킨 일제는 자기네 선조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축조된 읍성을 마주하기가 내심 부끄러웠는지 도로 건설과 상권 활성화 명목으로 성곽 훼철에 팔을 걷어붙였고, 성곽을 허무는 망치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해방 이후에는 영암의 유지들이 중장비를 동원해 성벽을 모조리 긁어내렸고, 일부는 성돌과 목재들을 팔아 쏠쏠한 재미까지 보았다. 그리고 70년대 새마을운동은 남은 성돌들을 도로 경계석과 주춧돌과 담장석 등으로 활용하면서 빗자루질 하듯이 말끔히 쓸어냈다. 반만년 영암군 역사상 최초로 군민들이 피땀을 흘리면서 대를 이어 조성한 최고의 걸작 영암읍성은 남녘을 호령하던 위풍당당한 동헌 건물과 임억령의 시구가 걸려 있던 고풍스러운 객사, 김시습의 흥취가 깃든 대월루 등과 함께 그렇게 자취를 감췄다"고 분개했다.
도로 경계석과 주춧돌과 담장석으로 버려져
이 작가의 지적대로 영암읍성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그나마 남아있던 읍성 대부분이 파괴되고, 현재는 성곽 일부만이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 등으로 활용되고 있는 등 붕괴되거나 훼손상태가 매우 심각하다.
영암군이 파악한 자료에 의하면 현재까지 남아있는 영암읍성은 6개 구간 1천50m(토성 600m, 석성 450m) 가량이다. 토성은 ▲영암읍교회~영암정수장~영신아파트 뒤편(270m), ▲의회 청사 옆~영암공원 현충탑 뒤편(140m), ▲열무정 좌측~열무정 아래~5일시장 위쪽(110m), ▲영암경찰서 뒤편(80m) 등 4개 구간이며, 석성은 ▲교동리 KT 건너편~읍 교회 뒤편(150m), ▲원불교 뒤편~통일교회 옆~경찰서 앞(300m) 등 2개 구간이다.
각종 공사로 파괴가 지속적으로 이뤄지자 영암군이 지난 2001년 군비 6천800만원을 들여 도서관 뒤편 석성 일부 구간인 35m가량을 복원 정비한 적이 있으나 훼손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문화재 지정과 함께 복원에 나서야 하지만, 두 가지 일 모두 선뜻 나서기가 어렵다.
우선 문화재로 지정할 경우 그 주변 200m 이내에서는 개발 제한 등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에 심대한 제약이 불가피하다. 주민 동의도 필요할뿐더러 재산권 행사 제약에 따른 보상대책도 세워야 한다. 복원 역시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대기 어렵다. 실제로 읍성 복원을 위해 소요되는 비용은 1m당 444만3천500원(높이 4.1m 폭 5.3m 기준)이라는 계산도 있다. 영암읍성 복원에는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된다는 뜻이다.
읍성은 역사와 문화 축적된 독립적 역사공간
그렇다면 영암군의 문화유산 제1호 영암읍성을 지금처럼 방치해도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 광주전남연구원 김만호 연구위원은 '광주전남 읍성(邑城)의 현황과 활용방안'이라는 연구논문을 통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읍성을 광주전남의 새로운 관광활성화 콘텐츠로 활용하자"고 주장한다.
"읍성(邑城)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축적된 독립적 역사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읍성은 지역의 사정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달라 경관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지역별로 차별성을 갖는다. 또한 읍성은 군사·행정·생활을 목적으로 설계된 공간이므로 해당 지역의 역사 전반을 품고 있다. 대부분의 읍성이 500~6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읍성의 성문, 성벽, 관아건물 등은 '역사도시'라는 지역의 이미지 제고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이에 따라 광주전남에 소재한 전통 읍성 15곳을 현장 조사한 후 이를 문화재의 지정여부와 현재의 보존 상태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시·도지정문화재(전라남도 기념물), ▲시·도지사가 지정한 문화재자료, ▲성벽을 일부 보존·복원해 놓은 읍성, ▲흔적이 거의 없는 읍성 등 5가지로 분류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낙안읍성과 나주읍성, 시·도지정문화재(전라남도기념물)는 고흥읍성(흥양현읍성)과 강진읍성, 시·도지사가 지정한 문화재자료는 광주읍성(광주읍성유허)과 진도읍성, 문화재는 아니지만 성벽을 일부 보존·복원해 놓은 읍성은 영암읍성을 비롯 보성읍성, 순천읍성(순천부읍성), 영광읍성, 장흥읍성, 해남읍성 등이다. 광양읍성, 구례읍성, 무안읍성 등은 는 흔적이 거의 없는 읍성이다. 이렇듯 문화재 지정여부 및 지자체의 관심도에 따라 15개 읍성의 현재 상태는 차이가 컸다.
읍성 복원 '표시하고 기억하기'부터 시작해야
그러면서 김 연구위원은 이들 읍성별로 활용을 위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첫째 단계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것으로 철저한 기초연구다. 지표조사나 발굴조사를 통해 읍성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동시에 과거 읍성의 윤곽을 현재의 지도 위에 표시하는 일이다. 이와 함께 읍성과 관련된 인물, 사건, 사진 등을 다양하게 수집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표시하고 기억하기'다. 읍성의 성문(城門)이나 주요 관아건물 터에 표지석을 세우고 설명문을 첨부해 읍성의 역사를 표시하고 기억하는 단계다. 성벽이 있었던 자리나 도로의 벽면에는 그 흔적을 표시하고 이를 활용해 ‘읍성둘레길’을 조성하는 방안도 필요하고, 소규모 유물전시관이나 역사자료관을 건립해 읍성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전시해 알릴 필요도 있다고 김 연구위원은 강조한다.
세 번째 단계는 실제로 읍성을 정비하고 복원하는 단계이다. 김 연구위원은 "낙안읍성이나 나주읍성의 경우 읍성의 원형을 복원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하면서, "최근에는 도시재생사업과 연계해 읍성을 복원하거나 이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 나주읍성 순천읍성 광양읍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진도읍성, 고흥읍성, 보성읍성처럼 성벽의 일부를 정비, 복원해 공원화한 사례도 참고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복원이 힘든 지역의 경우, 광주의 사례인 광주폴리Ⅰ이나 '사이버 광주읍성'처럼 다양한 방식의 활용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김 연구위원은 또 "현실적으로 모든 지역에서 읍성이나 성벽을 복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선 문루(門樓)나 주요 관아건물 등을 복원하되 이를 정원화 해 매력적인 역사공간으로 창출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읍성 공간은 주민들의 편의시설과 새로운 관광자원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지역사회에서는 '영암읍성보존회'(회장 황용주)가 창립됐다. 영암군은 사상 처음으로 영암읍성의 보존 및 활용방안을 찾기 위한 연구용역 예산 1천800만원을 반영했다.
황용주 회장은 "현재의 영암읍성 중 토성은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석성(石城)은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다. 우선 이 부분만이라도 복원 정비해 문화재로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영암읍성보존회는 앞으로 형식적인 모임보다는 영암읍성과 영암인, 그리고 영암의 비전을 연구하는 포럼으로 운영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영암군 문화관광과 문진규 과장은 "용역을 통해 무등아파트 주변 등 석성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영암읍성의 보존 및 활용방안을 모색해보겠다"면서, 아울러 "영암읍성의 향후 보존 및 활용방안에 대한 체계적인 방향 설정을 통해 개발과 보존의 균형 속에 효과적인 문화재의 보존 및 활용방안도 찾겠다"고 덧붙였다.
영암읍성보존회가 창립된 것이나 영암군이 영암읍성의 보존 및 활용방안을 찾기 위한 연구용역에 나선 것은 비록 구체적인 결실은 아직 없으나 움직임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바로 영암군의 역사를 되찾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이에 <영암군민신문>은 영암읍성 복원을 위한 더욱 큰 그림을 그릴 것을 제안한다. 철저한 기초연구를 토대로 '표시하고 기억하기'부터 시작하자. 남문(南門) 등 세 개의 성문(城門)도 원형에 가깝게 시급히 복원하자. 전체 성곽 복원에는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된다지만 우선 대숲 속에 버려진 성돌들을 찾아 차근차근 읍성을 다시 쌓아보자.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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