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로 접어드는데 어둑한 숲속에 짐승 한 마리가 죽어있다. 털이 흩어져있고 몸둥이가 많이 훼손되어 있다. 간밤에 야생동물이 힘센 짐승에게 공격을 당했던 모양이다. 자연계가 종족을 보존해가는, 약육강식의 생생한 현장이다.
돌산이 꽤 가파르다. 바위산이다. 아직 아침 이슬이 마르지 않아 미끄럽다. 순례자들이 띄엄띄엄 올라오고 있다. 산 꼭대기에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있다. 십자가 밑에 돌이 수북이 쌓여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하나씩 던져놓은 돌이다. 우리 한국에도 길가 애기무덤이나 처녀무덤에 저렇게 돌맹이나 솔개비를 꺾어 던져놓은 풍습이 있다. 시골 산길에서 볼 수 있고, 문경 새제를 넘을 때도 보았던 풍경이다. 돌 하나에 염원하나를 담아 던진다
지나가는 순례객들이 십자가 앞에서 잠시 멈춰 기도를 드린다. 무엇을 기도할까. 순례길이 안전하고 평안하기를 기원할까. 하느님께서도 저리 많은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를 다 받아줄려면 꽤나 힘드시겠다.
길가에 길게 돌을 쌓아 십자가 형태를 만들어 놓았다. 가까운 곳에 어제처럼 돌로 둥글둥글한 모형을 여러 겹 만들어 놓은 모습도 보인다. 종교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스페인어로 쓴, 제법 큰 간판이 걸려있다. 지나가는 순례자에게 물어보니 "이 산을 넘으면 앞으로 2주일이 지나야 산을 볼 수 있을 것이다"는 뜻이라 한다. 지루한 평원이 계속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널따란 평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밀밭 사이로 길이 나있다. 등성이를 넘으면 또 밀밭이다. 옛날 보리를 많이 심던 시절의 한국 농촌의 보리밭 풍경과 비슷하다. 바람 부는 날, 바람따라 보리밭이 출렁이며 언덕을 넘어가던 모습은 장관이었다.
길가 집 고물 버스 옆면에 알베르게 선전그림이 그려져 있다. 태극기가 유난히 선명하다. 어떤 사람은 자기나라 국기가 더 선명하다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기호승씨하고 알렉스가 쫒아와 인사를 한다. 어제 아헤스 마을에서 잤다고 한다. 반갑다.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이 길을 걸어간다. 기호승씨는 건설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마을을 지나간다. 건물들이 대부분 돌로 지어졌다. 세계 모든 나라의 건축물들은 그 지역에서 나는 재료가 건축의 기본 재료가 된다고 기선생이 설명한다. 그 기본재료에 따라 나라마다 독특한 형태의 건축술이 발달하고, 건축물이 생겨나기 마련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전통가옥이 흙담집이 많고 흙을 발라 벽을 막은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길가 담에 이끼가 끼어있다. 세월의 흔적이다. 농가의 창고 같은 건물이 보인다.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니 작업복이 걸려있다.
들판을 건너 부르고스 초입에 도착했다. 부르고스(Burgos)는 스페인의 민족 영웅 엘 시드(El Cid)의 고향이다. 11세기 초 아랍인과 대치할 때 엘 시드는 종교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헌신했다. 그 용기와 절개로 적군에게까지 존경을 받았으며, 전설의 주인공이 된 인물이다. '롤랑의 노래'로 유명한 불란서 롤랑(Roland)에 비유된다.
부르고스 성당까지 10㎞남았다는 사인이 보인다. 여기서 시가지를 따라 가는 길과 냇가를 따라가는 길,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시내 길을 택해 걸어가다가 버스정류소 앞에서 카트를 끌고 가는 독일 할아버지를 또 만났다. 어떤 여인이 목에다 무슨 딱지종류를 걸고 행인들에게 팔고 있다. 복권종류 아니면 버스표가 아닐까 싶어 물어보았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우체통이 길가에 세워져있다. 노랑색이다. 한국은 빨강색이었는데, 나라마다 저렇게 색깔이 다른 모양이다.
아코디언 소리가 들린다. 돈 통을 앞에 놓고 중년 남자가 손풍금을 연주하고 있다. 여러 가지 모습의 청동 조각이 이곳저곳 서 있다. 우산 쓴 소녀상도 있고,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아버지 모습의 조각도 보인다. 도시마다 나름의 풍경이 있다. 사람도 조각품도 이를테면 도시풍경의 하나다.
1시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성당을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시설이 현대식으로 잘 되어있다. 세진, 혜린, 케런, 등 한국 젊은이들을 만났다. 어제 오르테가(Ortega)에서 잤는데 시설이 아주 엉망이었다고, 무엇보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샤워를 제대로 할 수 없어 힘들었다고 불평들이다. 그러고 보면 좀 더 걸었지만 우리가 아따뿌에르까에 와서 잔 것이 잘 한 일이 되었다. 인간만사 세옹지마, 라고 했던가. 무엇이 좋은 일이 될지 그렇게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밖에 나왔더니 전통 복장을 한 순례자 한 분이 지나간다.
부르고스 성당을 보러 나갔다. 알베르게를 나서면 바로 성당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 눈앞에 우뚝하다. 세비아 성당, 톨레도 성당에 이어 스페인의 3대 성당으로 알려져 있는 이 성당에 앞서 언급했던 엘시드 장군이 묻혀있다. 13세기에 착공하여 300년에 걸쳐 완성된 고딕양식의 걸작으로 불리우는 건물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겉모습은 물론,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벽조각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양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뛰어난 건축 구조, 성화, 제단 장식 벽, 묘지, 스테인드글라스는 물론 독특한 소장품들을 지닌, 고딕 예술의 모든 역사가 집약된 성당이라고 한다. 몇 백 년 전, 선인들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1492년은 스페인에서 특별한 해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해이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이슬람 정권이 완전히 무너진 날이다. 700년 동안 이슬람국가였는데 기독교인들이 그라나다까지 함락시키고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해이다. 이사벨 여왕 시대였다. 언급한 바와 같이 부르고스 대성당이 바로 이 시기에 착공하여 완성되었다. 이처럼 거대한 성당을 지어낼 수 있을 만큼 기독교인들의 힘과 열정이 이베리아 반도에 충만한 시대였던 것이다.
저렇게 정교한 건축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우수한 인적자원은 물론, 남아메리카를 비롯 해외에서 약탈해온 금은보화를 비롯한 물자가 그만큼 풍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이다.
그런데 이사벨 여왕은 유태인 추방령을 내렸다. 이 추방령으로 스페인에 거주하던 유태인은 수난의 시대를 맞게된다.
저녁 미사를 보러 성당에 들어갔다. 순례자들이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다. 경건한 음악이 흐른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엄숙하고 진지하다.
미사를 마치고 시내 구경을 갔다. 엘시드의 도시답게 엘시드 장군의 동상이 우뚝하다. 그리고 황소 조각을 비롯하여 수많은 청동 조각품들이 시내 곳곳에 놓여있다. 음식점 앞에 놓여있는 주방장을 상징하는 조각품 하나도 상당한 예술적인 품위를 지니고 있다. 한 때 세계를 제패했던 이 나라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시내 마켓에 들렀다. 집사람이 장을 보는 사이에 세수비누를 샀다. 그런데 한 개씩 팔지 않고 두 개가 들어있는 팩을 사야한단다. 오븐에 데워먹도록 포장된 밥도 몇 개 구입했다. 하몽과 와인도 사왔다.
와인 안주에 하몽이 그만이다. 이를테면 궁합이 잘 맞는다. 저녁 식사와 겸하여 와인을 한 잔씩 나누었다. 식당 여기저기서 각 나라 사람들이 제각기 나라 말로 여독을 풀면서 저녁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오늘도 별 탈 없이 잘 왔다. 영웅의 고향, 부르고스의 밤이 깊어간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