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떼라디요스(Terradillos de Tampleions)서 엘 부르고(El Burgo Ranero (Leon))까지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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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20>떼라디요스(Terradillos de Tampleions)서 엘 부르고(El Burgo Ranero (Leon))까지 30.1㎞

"걸어온 길도, 걸어갈 길도 함께 보인다…여행이건 삶이건 잠깐 멈춰 뒤를 돌아볼 일이다"

옆 사람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배낭을 챙겨 나왔다. 김 선생 내외도 어느새 짐을 챙겨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6시25분 출발. 새벽 공기가 상큼하다. 어둑한 길을 가리비 표지판을 찾아가며 걷기 시작한다. 걷느라 피곤했던 몸이 아침이면 신기하게도 거뜬하다.
바람 한 점 없는 들판 길을 걸어간다. 한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해가 떠오른다. 떼라디요스 마을은 보이지도 않는다. 햇살이 번져 대지를 어루만지고 있다. 울퉁불퉁한 밭고랑에 그림자가 보인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방울이 햇살을 받아 영롱하다. 어릴 적 뺨을 쓰다듬어 우리를 깨우던 어머니처럼, 햇살도 풀잎이며 밀이며 옥수수 이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라고 보드라운 손길로 매만지고 있다.
나무들이 기지개를 켠다. 숲 사이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녀석의 날갯짓을 따라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날기 시작한다. 새 날을 알리는 정령이었을까, 새들의 울음소리를 따라 온 세상이 수런거린다.
걸어온 풍경이 아름답다. 걸어가면서 보던 풍경과 뒤돌아보는 풍경이 색다르다. 인생이건 여행이건 이렇게 잠간씩 멈추어 뒤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내가 걸었던 길을 찬찬히 살펴 볼 수가 있고,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지 확인해 볼 수도 있다.
맨 앞에 아내가 걷고 그 뒤를 김 선생 내외가 바짝 따르고 있다. 벌써 보름도 넘게 김 선생네와 함께 걷고 있다. 산티아고 목적지까지 함께 도착할지도 모르겠다. 때론 혼자 걷고 싶기도 할텐데 아내와 미세스 김이 저렇게 앞뒤로 어울려 잘 걷고 있다. 좀 불편하더래도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서로에게 있어서 일 터이다.
들판 가운데 서 있는 이정표는 자칫 놓치기 쉽다. 작은 밭둑길로 한 참을 앞서가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길을 잘 못 든 성 싶어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길을 잘못 가고 있어 불러세웠다. 한 걸음이 어딘데 헛걸음 쳤다고 억울해들 한다. 그래도 그 정도에서 알아차린 게 얼마나 다행인가.
단조로운 길을 따라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니 제법 큰 도시가 나타난다. 사아군(Sagagun)이다. 레온(Leon)주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큰 도시라고 했다. 한때 이 도시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부자, 지식인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고 새로운 문화를 퍼뜨렸다고 한다. 의식이 족하면 문화가 융성한다. 도시 여기저기 서 있는 청동 조각품과 이끼 낀 건물들이 역사를 말없이 증명해주고 있다.
큰 도시라서 알베르게도 많이 있고 쉴 곳도 여러 곳이 있다고 한다. 길가 가게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큰 도시 가게라 이것저것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다. 알맞게 먹어야 한다. 조금 많이 먹으면 배가 불러 걷는데 불편하고 적게 먹으면 에너지가 부족해 힘들어진다. 어느 때는 몇 십리를 가도록 가게가 없으니, 비상식량은 반드시 준비해두어야 한다.
사아군을 출발해 가는데 반대편 쪽에서 걸어오는 어떤 여자가 아는 체를 한다. 원가희 녀석이다. 반갑다. 친구를 만나 레온까지 갔다가 거기에서 반대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 길에서 만났던 사람은 좀 특별한 인연으로 기억되는 모양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 길을 혼자 걷는다. 아내도 김선생도 보이지 않는다. 순례자들이 띄엄띄엄 걸어가고 있다.
길가에 알루미늄으로 만든 저장고가 세워져 있다. 그 밑에 트럭 한 대가 대기하고 있는 걸 보니 곡식창고인 성싶다. 이 넓은 들판에서 수확한 알곡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저렇게 들판에 창고를 만들어 저장해 두는 모양이다. 허긴 그게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방법이겠다.
내가 농사짓던 시절이 떠오른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버스를 타려면 십 리길을 걸어 나가야 했던 깡촌. 리어카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농로가 없어서 모든 것을 지게로 져서 날랐다. 풀을 베어 바작에 담아 지고 들어와 집에서 퇴비를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거름을 지게에 퍼 담아 논밭으로 날랐다. 그리고 수확한 농작물을 역시 지게로 져서 집으로 날라와 타작을 해서 창고에 넣었다.
그러니 농부들의 등짝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남정네들의 등이 구부정하게 굽은 것은 무거운 짐에 눌린 때문일 것이다. 여자들은 그 무거운 짐을 머리로 이어 날랐으니 고개가 성했을 리가 없다. 몸으로 때우는 농사를 짓다보니 그렇게들 단명했는지도 모르겠다.
땅 한 뙈기라도 늘여 붙이려고 산을 엎어 밭을 만들고 골짜기를 막아 다랭이 논을 만들었다. 농토가 많지 않으니 저렇게 들판에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장할 생각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 고향 농촌 풍경을 떠올리면, 저렇게 들판 가운데 저장고를 만들어 자동차로 곡식을 챙겨 나가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지금은 한국도 농사짓는데 기계를 많이 사용한다지만, 농토가 좁은 문제야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이렇게 광활한 농경지를 보면 정말 부럽다. 미국 텍사스를 여행하면서 몇 시간을 자동차로 달려도 옥수수밭만 보이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 세상 도처에 널려있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자동차 길이 나있고 그 길과 나란히 순례길이 뻗어있다. 순례길을 따라 10미터 정도 간격으로 프라다나스 나무를 심어 놓았다. 1991년 이곳 지방정부에서 칼사다 델 코토에서 만시아 데 라스 몰라스까지 32㎞ 까미노를 정비하면서 길을 고치고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길에도 모래를 뿌려 비가 와도 길이 질척이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아직은 나무가 어려서 큰 그늘을 만들지 못하지만 이 나무들이 자란 후면 이 길을 걷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성싶다.
그런데 길 중간 중간에 놓인 시멘트 의자며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표지판이 눈에 거슬린다. 순례자를 위해 만들었다는 인공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오히려 옛 전통을 느끼며 걷고 싶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아닐까.
농부가 트렉터를 이용해 밭을 갈고 있다. 넓으나 넓은 벌판에서 모처럼 사람을 만났다. 반가운 김에 무엇을 심을 예정이냐고 물었지만 엔진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말을 못 알아먹는 때문인지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다. 허긴 시골 농부에게 영어가 통하리라고 기대하는 내가 잘못이다. 한국의 어느 농촌을 걸어가면서 영어로 농부에게 뭘 물어보면서 답을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 이 길을 걷기 위해 기본적인 스페인어 몇 마디를 배워 왔지만 턱 없이 부족하다.
사람을 만나보기가 힘들다. 이 허허 들판 길에 농부 아니면 누구를 만나겠는가. 베르시아노스(Bercianos) 마을이 보인다. 작은 마을이다. 노인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길 따라 나들이를 가신다. 산책 나가시는 모양이다. 한가하게 걸어가는 노인 뒤편으로 푸른 하늘 아래 마을이 그림처럼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순례자 비석이 서있다. "MAMFRED KRESS FRIEDRICH 9-6-1836"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77년 전, 이 길을 가다 죽은 사람의 비다. 천 년 순례길이라니 177년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겠다. 저 분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다 명을 다 했을까.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목숨 걸고 이 길을 걸어가려고 할까. 나는 또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저기 걸어오고 있는 저 순례자들은 이 비석을 보면서 또 어떤 생각을 할까.
마을 입구에 성당 안내 표지판이 재미있다. 마을을 관통하여 지나간다. 어느 집 창살 위에 '1967' 이라는 표지가 보인다. 그 해에 집을 개축하고 창문을 냈다는 말일까. 동네가 조용한데, 마을 끄트머리 집에 메어 놓은 개 세 마리가 사납게 짖어댄다. 사람을 대신하여 개들이 마을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마을을 지나면 다음 마을까지 또 지루한 들판을 걸어야 한다. 가로수 옆에 시멘트로 만든 의자가 놓여있다. 나그네를 위한 배려다. 순례자 한 사람이 그 의자 위에 누워 피곤을 달래고 있다. 여름철 땡볕아래 이 길을 걸어가려면 꽤나 힘이 들겠다. 지금은 밀밭이 저렇게 푸르지만 가을철 누렇게 익은 밀밭, 혹은 밀을 수확한 다음의 들판 풍경은 또 어떨까.
김 사장이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만나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어제 알려준 청와대 대변인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그 친구와 같은 직장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함께 생활하면서 있었던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들었다. 한 나라의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벼운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말은 생각의 집이다. 형체가 없는 생각은 말과 글로 드러나고,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생각이 얕으면 말이 경박하고 행동이 거칠다. 생각이 깊으면 말이 잔잔하고 글은 사리에 맞고 행동이 신중해진다. 땅 속 깊은 곳에서 맑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듯이, 생각이 깊어지면 말이 순하고 행동이 진중하고 글 또한 말처럼 잔잔해진다. 생각이 깊어지려면 사물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태주 시인은 '풀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은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여행했다'고 한다. 오늘날도 '독만권서(讀萬卷書)하고 행만리로(行萬里路)'하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을 기르고 말과 글을 바로 쓰는 데 여전히 소중한 방법이다. 만 권의 책을 읽으면서 선인들의 지혜와 지식을 배우고, 만 리를 여행하면서 겪은 다양한 경험이 세상을 보는 눈과 견문을 넓힌다는 의미다.
오늘의 목적지 엘 부르고(El Burgo Ranero)에 도착했다. 마을 골목을 지나간다. 집들이 대부분 흙으로 지어졌다. 이 지방은 돌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밀집을 흙에 섞어 반죽하여 만든 벽돌로 지었다고 했다. 건축은 그 지방에서 많이 나는 재료를 이용할 수 밖에 없다는 전문가의 말이 맞다.
길가 상점에 쵸코렛 0.5유로, 코카콜라 한 캔에 0.8유로라는 종이가 붙어있다. 지치고 목마른 나그네를 유혹하고 있다. 김사장과 함께 먼저 도착했을 아내가 머무는 알베르게를 찾아다녔다.
도심으로 말 탄 남녀가 지나가고 있다. 서너 군데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갔지만 허탕을 치고, 결국 자그마한 사립 알베르게에서 아내를 만났다.
그런데 화장실과 샤워실이 남녀 공용이다. 오늘 좀 힘들게 되었다. 알베르게는 대부분 툭 터진 공간이어서 프라이버시가 없다. 옷을 갈아입을 마땅한 장소도 없고 오늘처럼 화장실 샤워실이 공용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모두들 알아서 요령껏 옷을 갈아입고, 순서를 기다려 화장실과 샤워실을 이용할 수밖에.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보면 또 환경에 적응하여 그러려니 무디어지게 된다. 인간에겐 그렇게 무엇에나 적응하는 능력이 주어진 모양이다.
이곳 공립 알베르게에서 영어와 한국어로 인터넷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오랜만에 미국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뉴스도 살펴보았다.
시늉만 되어 있는 부엌이지만 밥을 끓여 먹을 수 있는 설비가 있고, 물이 나오니 됐다. 그것조차 되어 있지 않아 물을 끓여 차 한 잔 만들어 먹지 못한 곳도 있었으니까.
샤워를 끝내고 알베르게 앞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목동이 양떼를 몰고 간다. 열대여섯 마리쯤 되어 보인다. 동네주변까지 양을 데려와 풀을 먹이는 걸 보니 들판에 풀이 많지 않은가 보다. 중세 때 이지역에서는 양떼가 엄청나게 많아 농사를 짓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양모를 모아 수출하던 때의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은 농업의 모습이 바뀌었다. 땅은 경작지로 바뀌고 양떼는 저렇게 빈터를 찾아 풀을 뜯기고 있다. 시대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바뀐다. <다음호에 계속>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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