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5‧18의 역사는 반드시 재조명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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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영암 5‧18의 역사는 반드시 재조명돼야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호남지부 이달연 영암지회장

44주년을 맞이한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영암군에서는 5·18민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가 출범했고, 17일에는 광주 오월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개최한다. 오월 항쟁은 광주뿐 아니라 영암 등 전남 15~16개 시군이 참여했음에도 전남 외 지역에서는 오월 항쟁은 광주만의 역사로 인지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이에 본지에서는 1980년 5월 당시 영암 시민군으로 활약했으며, 현재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영암지회장으로 역임 중인 이달연(68) 회장을 만나, 1980년 5월, 영암 군민들의 투쟁에 대해 알리고자 한다. <편집자주>

5‧18 민중항쟁은 1980년 5월, 광주를 중심으로 계엄령 철폐, 신군부 퇴진, 민주 정부 수립 등을 요구한 민주화운동이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참혹한 학살과 탄압을 당했고, 그 소식을 접한 영암에서는 광주시민들과 뜻을 함께하기 위해 시민군을 꾸려 신군부 세력에 대응하고 총과 총알을 탈취해 시위대에 전달하는 등 목숨을 걸고 독재 통치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영암군민 102명이 연루자로 집계되며, 5‧18 전체 기소자 404명 중 광주(208명) 다음으로 많은 지역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동참했던 영암의 이러한 자랑스러운 역사 등, 광주 밖의 5‧18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주목된 바 없다.

지금부터 44년 전, 1980년 5월 영암의 치열했던 현장과 5‧18 이후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겪었던 참혹한 진상을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이달연 영암지회장을 만나 소개한다.




“광주에서 시민들이 죽어간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씨가 5‧18 항쟁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발발 3일 후인 5월 21일이었다. 신북면에서 태어난 이 씨는 도로변에 살았는데,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 차량이 유리창을 두드리며 “전두환 물러가라. 광주시민들이 죽어 간다”며 시위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당시 23살, 혈기왕성했던 이 씨는 동네 선배 및 친구였던 전수용, 이영일, 유은열 씨와 함께 광주로 가 광주시민들과 함께 싸우기로 한다. 그들에게 먼저 필요했던 것은 자동차였다. 마침 마을에 택시 한 대가 빠져있었고, 4명은 택시를 건져 활동 차량으로 이용했다.

그렇게 택시를 끌고 영암 각 지역에 광주의 상황을 전하다 보니 어느새 택시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동참자가 많아졌다. 이후 일행이 트럭을 구해와 트럭을 타고 다니며 함께 싸울 인원들을 태웠고, 어느새 23명이 됐다. 그중에선 당시 신북고등학생이던 박재택, 나종구 씨도 있었다.

“각목을 들었던 손에 실탄 가득한 총기까지 쥐게 됐죠”
22일, 이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각목을 들었지만 신군부 세력에 맞서 싸우려면 총이 필요했다. 그렇게 각 경찰서로 무기를 찾아 다녔지만 미리 무기고를 비워 놓은 상태였다. 그러다 시종면 내 중대본부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있던 이성모 씨가 시종지서 뒷산에 무기를 묻어놨다는 경찰들의 이야기를 듣게 됐고, 이 정보를 동네 동생이었던 박재택 씨에게 전달한다.

박 씨는 이 정보를 이 씨를 비롯한 무리에게 말했고, 그들은 시종서 뒷산을 헤쳐 카빈 소총 등 총기 300여 정을 손에 쥐게 됐다.

총은 있었지만 총알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은 소총 300여 정을 싣고 나주로가 시위대에 나눠주기도 하고, 총알과 교환하기도 했다.

다음날 이들은 도포면 성재리 예비군 중대장이 경운기에 실탄 2만3천발을 가마니로 덮어 옮기는 것을 확인했고, 실탄까지 확보하며 전투태세를 마쳤다.

이들은 광주로의 행군을 시작했지만 이미 사방이 바리케이트가 쳐진 상태였고, 계엄군 사격에 헬기까지 떠버리니 광주행은 결국 무산됐다.

영암으로 돌아온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광주로 향하는 시위대를 만나면 총알과 총기를 나눠줬고, 지역 상인들은 김밥과 주먹밥 등을 전하며 5‧18 항쟁에 적극 참여했다.

“지옥은 5‧18 이후에 찾아왔어요”
항쟁 이후 경찰들은 무기를 탈취했던 이 씨 일행 검거에 나섰다. 이들은 영암경찰서에 연행돼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비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야 했다. 이후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다. 이 씨는 상무대를 지옥이라 표현했다.

이 씨는 상무대 영창에서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맞았다고 한다. 병장 한 명이 돌아다니며 철창 앞에서 “스무 대”라고 말하면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어야 했고, 병장은 호신봉으로 손을 내려쳤다. 너무 아파 손을 내지 못하면 문을 열고 들어와 군화 신은 발로 밟는 등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이러한 상무대 생활은 3개월간 계속됐다.

상무대에 있는 동안 1심 재판이 열렸고, 이 씨는 ‘내란수행’ 혐의로 7년 구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넘어갔다. 다행히도 수감 6개월여 만에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나 영암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상무대에서 겪은 폭력 때문에 이 씨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허리도 크게 다쳤고, 귀도 잘 안 들리게 돼 장애등급까지 받게 됐다. 이는 이 씨만의 불운이 아니라 이 씨와 함께 트럭에서 군부통치 반대를 외쳤던 마을 선후배들도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힘겹게 사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이 씨는 장사를 했던 자영업자였기에 몸을 추스른 뒤 살아왔던 방식대로 생활을 이어갔지만, 취직을 해야하는 이들에게는 국가내란죄 등의 범죄자라는 빨간 줄이 꼬리표로 따라와 취업도 하지 못하고 기본적인 보조금만 받으며 아직도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또한 직접 운동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이 씨의 동생도 대학을 우수하게 수료했음에도 형인 이 씨의 죄목으로 인해 취업의 문턱에서 수없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싸웠을 겁니다”
이 씨는 오랜 기간 5‧18의 후유증을 겪으며 지내왔지만 다시 5‧18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참여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 씨는 이후 5‧18민중항쟁영암유공자동지회에 참여하게 됐으며 지금은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영암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회장으로 취임하며 이 씨가 바라는 것은 5‧18 당시 영암사람들이 보여준 정신을 더욱 널리 알리는 것이다.

“5‧18을 광주의 역사로만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만 오월항쟁은 전남 16개 시군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고 영암은 광주 다음으로 많은 이들이 기소될 만큼 본인들 일처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하지만 5‧18의 지역사는 아직도 제대로 주목받은 적이 없어요. 비록 지역에서 열리는 조그만 행사지만 저희 지회에서는 5‧18을 맞아 영암군민들의 자랑스러운 역사의식을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5월 17일 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 많은 참여 바랍니다”
이승우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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