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에 임했을 때나 한·미FTA협상을 진행하면서 우리 정부는 농업의 이 외형적 가치만 주목했다. 쌀을 뺀 전 농산물을 개방하는 대신 반도체와 자동차, 철강 등의 수출을 확대할 수 있는 협상결과를 얻어내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우리 식량자급률이 크게 떨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식량자급률은 1965년만 해도 93.5%였다. ‘살농정책’(농업을 포기하는 대신 다른 산업을 집중 육성해 그 이익으로 농산물은 수입하면 된다는 정책)이 기조에 깔리면서 80년대 중반 48.4%로 추락한 자급률은 2012년 23.6%로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다. 다만 쌀은 96%의 높은 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쌀만이라도 지키려 했던 농민들의 처절한 투쟁의 결과였지 정부 때문이 아니었다.
세계 식량의 ‘큰손’인 곡물메이저 카길의 맥밀런 회장은 살농정책을 이렇게 옹호한다. “개도국에서 가장 절실한 농업과제는 국내에서 소비될 식량을 생산할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각국은 국내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은 품목을 집중적으로 생산해 교역해야 한다. 생계형 농업은 자원의 오용을 부추기고 환경을 망칠 뿐이다.” 과연 그의 주장대로 농업을 포기한 대신 반도체와 자동차를 수출해 벌어들인 돈으로 식량은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을까?
이집트와 필리핀은 주곡인 밀과 쌀을 자급하던 나라다. 필리핀의 경우 60년대 국제미장연구소를 갖출 정도로 쌀 수출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최대의 밀과 쌀 수입국으로 전락해 있다. 너무 빨리 농업을 버리고 산업화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 두 나라가 포기했던 곡물의 ‘복수’는 가혹했다. 처음엔 태국 등 이웃에서 쉽게 식량을 수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식량위기가 덮치고 곡물수출이 통제되자 국민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폭동과 유혈사태까지 벌였다. 맥밀런 회장의 주장과는 달리 곡물 수입국은 식량이 부족하거나 과잉상태여도 마음대로 수입을 확대 또는 제한할 수 없는데 비해 수출국은 언제라도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곳이 바로 국제곡물시장이었던 것이다.
사실 국제곡물시장의 무역량은 생산량의 10-12%에 불과할 정도로 극소량이다. 국내소비가 우선이고 그 여유분이 수출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카길, ADM, 콘아그라, 컨티넨털, 루이 드레퓌스, 벙기, 앙드레 등 세계 7대 곡물메이저가 쥐락펴락하고 있다. 최근 들어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의 영향과 미국이 주도해온 식물성 연료정책 때문에 무역량은 더욱 줄어 국제곡물시장은 수급변화에 가격이 그야말로 요동친다. 금융자본까지 가세해 투기자본의 투전장으로 변한 지난해 세계 각국은 이집트와 필리핀에서처럼 처절한 ‘곡물의 복수’를 경험해야 했다.
그렇다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식량위기로부터 우리는 안전할까? 식량자급률 25% 이하인 우리나라가 안전지대일리 없다. 주곡인 쌀의 높은 자급률 때문에 다소나마 여유가 있을 뿐이다. 세계적인 식량위기에서 쌀은 바로 우리의 ‘식량주권’인 것이다.
이런 쌀이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정부가 협상도 해보지도 않고 ‘쌀 수입관세화’ 즉 쌀 시장 전면개방이 불가피한 선택인양 떠들어댄다. 온 국민은 세월호 사태에 이어 또다시 쌀 시장 전면개방에 속수무책인 무능한 정부를 지켜보아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거니와 쌀은 우리의 식량주권이다. 논은 일단 훼손되면 돌이킬 수 없다. 그 다음엔 처절한 ‘쌀의 복수’가 기다리고 있다. 바쁜 영농철 자식과도 같은 벼논을 내팽개치고 서울도심 한복판 거리로 나선 농민들의 호소에 정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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