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박정희는 유신헌법도 모자라 태극기와 애국가를 앞세운 애국주의를 국가적 총동원사업으로 추진했다. 오늘날 교육부에 해당하는 문교부는 충남도교육청이 시행하고 있던 '국기에 대한 맹세'의 내용을 고쳐 '무조건 충성' 조항을 부각시킨 맹세문을 전국에 배포하고 암송하라고 강요했다. 당연히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일이 잇따랐다. 국기를 모독한 혐의로 많은 학생들이 제적을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학부모들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하지만 대법원은 "학칙이 우선"이라는 황당한 논리로 원고패소 판결했다. 헌법에 명시된 가치는 내팽개친 채 권력에 빌붙어 황당한 판결을 내린 대법원의 부끄러운 역사는 유신시대 때가 절정이었으리라.
유신시대에는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애국가를 따라 불러야 했다. 애국가 상영이 의무화됐기 때문이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8년에는 아예 '오후6시 국기 하강식'을 전국적으로 거행하라는 지시를 내려진다. 관례처럼 행해지던 국기하강식이 의무화된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국민들은 오후 6시만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서서 차렷 자세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해야 했다.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은 1989년 이후 사라졌다. 모든 건물에 국기게양대를 설치해야 하는 의무조항도 1999년 폐지됐다. 2007년부터는 "몸과 마음을 바쳐"를 "정의와 진실로서"로 바꾼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사용되고 있다. 아직도 정통성 잃은 유신정권의 잔재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음이다.
그런데 최근 행정자치부가 '전 국민 나라 사랑 태극기 달기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모든 정부 부처가 참여하고, 전국 지방자치단체는 운동추진단을 구성해 운영한다. 방송과 민간기업, 학생을 동원하고 어린이집과 경로당을 방문해 홍보활동을 편다. 더 나아가 민간건물과 아파트 동마다 별도의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 개정도 추진 중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태극기 게양률을 높임으로써 애국심을 고양하겠다는 것이 이 운동의 목표다. 행자부는 심지어 '3·1절 국기달기 운동 및 의정업무 설명회 자료'를 통해 공무원은 인사·복무 차원에서 태극기 게양운동을 추진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실적이 나쁘면 근무 평점이나 인사에서 불이익을 준다는 얘기다.
애국을 강요하던 유신의 '추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태극기 달기운동은 왜 나온 것일까? 다름 아닌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한 박근혜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말 한마디 때문이다.
"애국가에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런 가사가 있지 않습니까.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해야 하고…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싸움 하다가도 애국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고…우리가 이렇게 해야 소중한 우리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과 그의 아내가 다투다 애국가가 울리자 싸움을 멈추고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한다. 영화는 분명 1970년대 대한민국의 현실을 풍자한다. 하지만 이를 보며 박 대통령은 유신시대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좋은 시절'의 기억만이 떠올랐음이다. 영화를 보며 서민들의 고단한 삶의 여정보다도 맹목적인 애국심을 강요해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유신의 발상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국기 등 상징물을 내세워 국민들에게 애국을 강요하는 나라는 이젠 지구상에 북한 한 곳 뿐이다. 행복지수 세계1위의 나라 덴마크 국민들은 비단 국경일 뿐 아니라 자신의 생일에도 국기를 단다고 한다. 다름 아닌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국가에 대한 자발적인 애국심에서다. 행정자치부의 태극기 달기운동은 이런 점에서 앞뒤가 바뀌었다. 유신 때처럼 '애국'을 먼저 요구할 게 아니라 국민들의 기본적 권리 먼저 보장하려 애써야 한다. 최소한 국민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는 국가의 기본 도리부터 이행해야 한다. 그러면 태극기는 국민 모두가 집집마다 자랑스럽게 게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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